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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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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8월호>
『너희는 이 세상과 일치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롬 12:2). 하나님의 뜻에도 두 번째로 좋은 뜻이 있고, 세 번째로 좋은 뜻이 있다. 즉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보다는 못하지만 그 다음으로 좋은 차선책이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 31장은 야곱이 시리아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내고 돌아오는 부분을 다룬다. 그는 네 명의 아내와 열두 명의 자식들을 데리고 가는데 산에서 장인을 만난다(창 31:36-42). 예언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한동안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떠나 있었던 이스라엘을 보여 준다. 야곱은 오늘날의 유대인들과 같이 꾀가 많고 잘 속이는 자였다. 또한 육신적이고 물질주의적이었다. 형 에서가 무서워 떠났다가 이방인들과 20년 동안 지내며 이방인을 위해 일했다. 이제 그 이방인을 떠나려 하자 그가 화가 나서 야곱을 죽이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떠나 있던 이스라엘이 다시 돌아오려는 과정에서 이방인들과의 사이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보여 준다.우리는 야곱이 하나님의 뜻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 있었을 때 그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이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는 상황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는데, 필자는 당신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날 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첫째, 당신이 복을 받은 장소에서 벗어나게 된다. 예컨대 나오미가 자신의 남편과 함께 베들레헴 유다를 떠났을 때 그녀는 복의 장소를 떠난 셈이다. 베들레헴은 “빵 집”이라는 뜻이며 생명의 빵이신 주님께서 오신 장소이기도 하다. 유대 민족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다. 그들은 성전도, 제사장도, 선지자도, 에봇도 없었다. 이사야는 그들을 둥지에서 쫓겨나 떠돌아다니는 새와 같다고 했다(사 16:2). 그들은 민족들 가운데서 방랑했고 후에 다시 회복된다. <킹제임스성경>의 구약은 “말라키”로 끝나고, 유대인들의 구약은 “역대기하”로 끝난다. 미국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이 그들의 구약에서 읽는 마지막 말씀은 “일어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돌아갈 용기가 없다. 누가 그런 말썽 많은 땅에 돌아가기를 원하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복의 장소에 들어가지 않았고 복의 장소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장소는 팔레스타인이며, 예루살렘이요, 시온 산이다. 『너는 땅의 제단을 나에게 만들어서 그 위에 너의 양들과 너의 소들로 번제와 화목제물을 바치라. 내가 나의 이름을 기억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내려와 너에게 복을 주리라』(출 20:24).
야곱은 여전히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정말로 축복하실 수 있는 장소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야곱은 에서에게서 도망치려 했고,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복의 장소에서 달아났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면 이 점을 알아 두라. 즉 당신이 아무리 도망쳐도 하나님께서는 움직이실 필요조차 없다. 당신이 도망가서 이역만리 러시아, 우크라이나, 남극이나 북극에 있다 할지라도 당신이 피해서 도망간 그 하나님께서 바로 그곳에 계신다. 요나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께로부터 도망갈 방법은 없다.
복의 장소를 떠나지 말라. 복을 받고 있고 영적 양식을 공급받고 있다면 그곳에 계속 머물라! 타락한 그리스도인이 꾀는 말을 듣지 말라! 불만 많고 불평하기 좋아하는 자의 말을 듣다 보면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고, 결국 참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자들에게 영향받지 말라. 하나님과 당신 사이의 문제이다. 소문을 퍼뜨리는 자, 비평을 일삼는 자, 육신적인 그리스도인 때문에 “베들레헴”을 떠나지 말라.
둘째, 야곱은 악평을 얻게 되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섬기다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수주, 수개월, 수년을 보낸 뒤에 돌아온다. 결국 회복되기는 하지만 그러는 동안 악한 이름을 얻게 된다. 즉 세상으로 자신의 간증을 망쳐 버린 것이다. 이는 마치 불을 쬐고 있던 시몬 베드로와 같다. 베드로는 훗날 오순절에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하기도 했지만, 한동안 자신의 간증을 망쳤던 적이 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던 날 그가 불을 쬐고 있을 때 사람들이 물었다. “너도 그 자들 중의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는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그들은 재차 베드로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가 저주하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하니라』(막 14:71). 그들은 “그래? 그럼 넌 그 자들 중의 하나가 아니구나!”라고 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주님의 제자들 중의 한 명이 맞았다. 이처럼 복의 장소에서 벗어났을 때 당신은 자신의 간증을 잃게 되는 것이다.
오래전에 캘리포니아의 어떤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그는 몇 년마다 감옥을 들락날락하며 두세 번 감옥살이를 한 인물이었다. 마약 병동에서 그가 전화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병동에 마약 환자가 500명 정도가 있는데 그중 세 명을 주님께 인도했다고 했다. 나중에 병동에서 나와서는 다른 사람에게 한밤중에 전화를 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게 전도지가 좀 있는데 우리가 함께 거리에 나가서 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눠 줘야 해요. 이 사람들은 지옥으로 가고 있어요!” 그는 분명 혼들에 대한 부담을 가진 사람이었다. 어쩌면 당신보다 더 많은 부담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간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의에 대하여 깨어 있고 죄를 짓지 말라. 어떤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지식이 없기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하노라』(고전 15:34).
성경에는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려 하나님께서 그들이 있기를 바라는 장소에 있게 된 세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채 그분의 뜻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집트”(세상)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그들은 모세, 바울, 맛디아이다.
모세는 40년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세상, 곧 이집트로 돌아가지 않았다. 바울도 아라비아에서 수개월 동안 성장하며 시간을 보낸 뒤 사역에 들어갔다. 그도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맛디아는 유다 이스카리옷을 대체할 사람으로 선정된 인물이다. 이 말은 맛디아가 침례인 요한의 사역 시기부터 예수님의 부활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즉 맛디아는 그 기간 동안 줄곧 예수님과 사도들과 함께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다가 자신의 선생님을 배반하는 것을 보았다. 또한 시몬 베드로가 저주하고 맹세하며 주님을 부인하는 것도 들었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사도”라고 하는 자들이 그런 짓거리를 하는 것을 보았다면 “교회를 옮기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마귀는 성도들을 유혹한다! 하지만 맛디아는 어떻게 했는가? 그는 끝까지 함께하여 결국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맛디아는 복의 장소에 끝까지 붙어 있었던 것이다.
셋째, 야곱은 수치와 슬픔을 거둬야 했다. 야곱은 자신이 뿌린 것을 거둬야 했다.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는 동안 잘못된 아내를 얻었다. 라헬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레아를 얻었다. 레아는 그가 사랑하지 않은 여인이었다. 또한 야곱은 산에서 주의 천사와 씨름하는 동안 불구가 되어 여생을 절면서 살아야 했다. 또한 딸 디나가 창세기 34장에서 가슴 아픈 일을 당한다.
다윗도 자기가 지은 죄의 열매를 거둬야 했다. 그의 아들이 그의 딸을 근친상간한 것이다. 모세도 자신이 뿌린 것을 거뒀다. 주님께서 바위에게 말하라고 하셨는데 화가 나서 바위를 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당신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채 수년 혹은 수개월을 보낼 수 있다. 어떤 이는 다시는 하나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 뜻 안으로 들어가도 뿌린 것은 거둬야 한다는 것이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우롱당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라』(갈 6:7).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을 신중하게 생각해 보라. 혹시 마약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당신은 마약을 소지하고 있다가 발각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고, 그것으로 어떤 기회들을 잃어버리게 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마치 자신의 목을 스스로 긋는 것과 같다.
야곱은 수치와 슬픔을 거둬야 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어머니는 그가 돌아오기 전에 죽었다. 리브카는 야곱에게 “잠시만 있다가 네 형의 화가 가라앉으면 돌아오면 돼!”라고 했지만 그 “잠시”가 20년이 되어 버렸다. 그가 돌아왔을 때, 리브카는 이미 무덤에 묻힌 상태였다. 야곱은 자신의 어머니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게다가 형 에서 앞에서 수치를 당해야 했다. 야곱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형 앞에서 일곱 번 절해야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말 1:3) 육신적인 사람 에서 앞에 엎드려야 했던 것이다. 당신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사람 앞에 엎드려 본 적이 있는가?
한번은 다윗이 사울에게서 도망치고 있을 때 골리앗의 칼을 들고 가드 왕 아키스에게로 갔다. 아키스는 “아니, 이 친구는 골리앗의 머리를 자른 사람이잖아! 사람들이 사울은 수천을 죽였는데 다윗은 수만을 죽였다고 노래하지 않았어!”라고 했다. 다윗은 갑자기 돌변하여 문을 긁적이고 수염에 침을 흘리며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 왜 그랬는가? 악한 왕의 손에 죽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야곱의 경우도 그와 같았다. 여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자주 이 일을 생각해 보는데, 그 여종은 소위 “사도들의 통치자”를 거짓말하게 하고 저주하게 만들었다. 혹시 그 여종이 오순절에 설교하고 있는 베드로를 보았더라면 어떻게 했을까? “저 인간은 불 옆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저주하고 맹세했던 자예요!”라고 소리치지 않았겠는가! 그랬더라면 정말 굴욕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승리의 간증을 할 수 없었다. 훗날 파라오를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생애의 세월이 짧고 험악하였으나 내 조상들의 순례의 날들, 곧 그들의 생애의 세월에는 미치지 못하였나이다』(창 47:9). 참 변변찮은 간증이지 않은가! 당신이 죽기 전에 자식들 앞에서 간증을 한다면 자식들이 그것을 믿을 수 있는가? 당신은 자식들과 손자들 앞에서 승리의 간증을 남기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반면에 바울의 간증을 들어 보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어 의로운 재판관이신 주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내게 주실 것이며 또 나뿐만 아니라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이라』(딤후 4:7,8). 야곱은 믿음이 없었기에 바울처럼 간증하지 못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맥베스>에서 살인을 저지른 맥베스는 이렇게 말한다. “축복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아멘’이 목구멍에 붙어 나오지를 않는구나!” 어쩌면 당신이 결코 “아멘!”이라고 소리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당신의 삶이 올바르지 않았다면 당신의 간증 또한 올바를 수 없다.
프리드리히 “대제”에게는 기마대를 이끄는 “폰 질랜트”(Von Zealand)라는 장군이 있었다. 언젠가 다른 때와 같이 승리가 있은 후 장교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었고, 오십 명 정도 되는 고급 장교들이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연회에서 불가지론자였던 프리드리히 “대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상스러운 농담을 하며 한바탕 웃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 폰 질랜트 장군은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 경례를 하며 말했다. “황제여, 당신은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십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서른여덟 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나는 노인이기에 이제 곧 당신보다 더 위대하신 분의 존전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나를 나의 죄에서 구원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황제께서는 바로 그분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황제여, 나는 나의 구주를 사랑하는 노인으로서 이제 영원의 문턱에 서서 작별 인사를 드립니다!” 장군은 자리를 떴고 그 일로 파티는 완전히 끝나 버렸다. 당황한 프리드리히 황제는 “폰 질랜트 장군, 나를 용서해 주시오! 나를 용서해 주시오!”라고 소리쳤다.
질랜트 장군의 간증은 강력하고 효과적이었다. 그는 차선이 아니라 최상의 삶을 살았고, 일등석을 타고 하늘나라로 가는 삶을 살았다. 당신도 그렇게 살다가 주님께로 가야 한다. 밥 존스 시니어는 이렇게 말했다. “죄는 결코 그것을 짓는 사람을 더 좋은 상태로 남겨 두고 이별하는 법이 없다.” 어쩌면 당신은 나에게 “럭크만 목사님, 하나님께서 당신을 정말로 복 주셨고 들어 쓰셨잖아요?”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렇지만 내가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더 들어 쓰시고 더 복을 주실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얼마나 정확히 행하고 있는지 주의하라. 미련한 사람같이 행하지 말고 현명한 사람같이 행하여 시간을 사서 얻으라. 이는 그 날들이 악하기 때문이니라. 이로 인하여 너희는 어리석게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엡 5:15-17).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