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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의 아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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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2년 10월호>
감독(장로 ; 목사)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고 디모데전서 3:2에서 말씀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은 이 구절을 두고 ‘감독은 단 한 개의 결혼 반지만을 가져야 하며 오직 하나의 결혼 서약서만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사사로이 해석하고 있다. 물론 그런 내용은 신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로마 카톨릭이 새롭게 도입해 온 해석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로마 카톨릭에서는 어떤 형태이든 “한 아내의 남편”인 성직자나 감독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 중 아무도 결혼 서약서를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들 스스로 “혼배성사”라고 부르는 결혼예식을 치룬 사람이 없다.대부분의 개신교도들은 쉽게 결혼하고 이혼하는 풍조에 대항하기 위한 하나의 안전장치로서 이 반성경적 해석을 채택하여 오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이런 태도는 오늘날 많은 배교한 근본주의자들이 환란성도의 구원에 관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마태복음, 히브리서, 요한계시록을 던져버리게 되는 이유가 된다. 그 동기들은 고상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교리의 변질을 가져올 뿐이며, 이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면 그 고상한 형제들은 진리대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간파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들을 ‘알렉산드리아 이단’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역사적으로 이단의 원류의 자리에 있음을 밝혀오고 있다. 그들은 서로의 잘못을 덮어주고 보호해 줌으로써 자신들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용해야 하는 성경을 계속적으로 공격한다. 알렉산드리아 이단들은 자신들이 진리라고 믿고 싶어하는 것들이 바로 진리인 것처럼 가장한다. 그들 자신들은 성경을 수 정할 수 있을 만큼 총명하다고 스스로 말하며, 또 실제로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 우리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수정하거나 그들을 바로 잡을 만큼 영리하지 못하다. 단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 잡을 수 있는 성경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디모데전서 3장의 의미는 누가 읽어도 한 번에 명확히 알 수 있다. 그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감독은 일부다처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경이 의미하는 바 대로 믿고 성경이 말씀하는 그대로를 믿는다면 위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감독은 처첩을 거느릴 수 없다.’는 것임을 즉시 알게 될 것이다. 이는 재혼한 그리스도인은 감독이 될 자격이 없다든가 또는 감독은 재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 부부가 분리되는 3가지의 성경적 입장이 있다. 배우자의 한 편이 죽는 경우와 배우자로 부터 유기된 경우, 간음한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이혼이 허용되는 경우가 있다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이혼하지 않아야 한다. 배우자를 버리지 말아야 하며 이혼소송을 먼저 걸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들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한다. 상대에 대한 믿음이 없다해도 이혼하는 것은 피해야 하며 서로 용서하고, 잊어버리며, 모든 것을 보혈 아래 놓아야 한다.
이제 목사의 아내를 보자. 어떤 목사의 아내의 경우, 그녀는 가르치기를 잘하고,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을 수 있고, 또 회계에 능할 수도, 아니면 사역에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거나 그밖의 다른 훈련을 받은 사람일 수 있다. 또는 단지 잔잔히 미소를 짓거나 가정을 돌보고,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밖에 다르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사람일 경우도 있다(이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목사의 아내가 어떤 부류에 속하든지, 그녀는 교회에서 드러나게 활동하지 않는 것이 좋다. 성경 공부를 가르치거나, 피아노 반주를 하거나, 교회 방문자들을 맞아드리는 일이나, 심지어는 육아실을 맡아 일하는 것도 하지 않는다. 단지 밝은 표정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회중과 함께 찬송하며 목사인 남편의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한 음식을 장만하고, 때때로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고, 병원에 입원 중인 성도가 방문을 요청할 때 남편과 함께 그 요구에 응하고, 그런 후 집안 일에 힘쓴다(딛2:5).
이상적인 아내는 자신의 남편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하여 그녀의 복장이나 음식, 일하는 습관들을 예의 바르게 하려고 노력한다. 또 남편의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그렇게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적어도 호의적인 관계를 깨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잠언 31장은 현숙한 여인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열심히 일하며, 성실하게 집안을 돌보며, 주의 깊게 말하고, 위기가 왔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내가 남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사역을 도우는 방법’에 대한 책자나 강의도 필요하지 않다. 성경의 가르침은 비가 갠 뒤의 태양광선처럼 분명하다. 그러나 현대에는 남편으로 하여금 위의 문제에 “대처하게” 하고 “서로 나누게” 하는, 그리고 모든 일을 아내와 균등하게 하려는 운동들이 광범위하게 번지고 있다. 이런 운동은 나약한 남자들을 양산할 뿐이다. 여자들은 단순히 이런 문제에 대하여 대처하고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런 철학은 여자들로 하여금 성경에 불순종하도록 인도할 뿐이다. 만약 결혼생활이 50:50으로 균등하게 되어 있다면 그 남편은 죽어 있는 상태이다. 마치 무승부의 게임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 50:50의 균등한 상황에서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가 없다. 의회에서도,입법부에서도,나라에서도, “가정”에서도 50:50의 상황에서는 아무 결정도 내릴 수가 없다.
이제, 아내가 사역에 정말로 동참자가 되었다면 몇가지 문제가 발생된다. 그녀는 남편의 동역자들의 생활습관까지도 조정하려고 할지 모른다. 또는 주일학교 총 책임자와 충돌할 가능성도 있다. 때로는 남편의 동역자들을 시기하고 그들을 경쟁자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해서 인간의 본래 성품을 벗어 버렸다거나 “거룩한 여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배교한 근본주의자들로서 그들은 사람이 “거룩”하게 되었다면 그들이 성경을 공격해도 그들을 신뢰해야 한다는 관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만약 목사의 아내가 매우 유능한 성경교사라면(많은 경우 그렇다), 다음과 같은 문제, 즉 어린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사람들이 목사의 아내가 가르치는 주일학교에서 빈둥빈둥 지내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외의 사소한 문제들이 튀어 나온다. 이런 일은 어떤 목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이곳 펜사콜라 성경 신학원에서는 신학생의 아내들에게 모든 강의를 무료로 개방해 놓고 있다. 그 목적은 목사와 아내가 서로 올바르게 균형을 잡음으로써 그 아내가 영적인 일에 열등감을 갖지 않고, 목사는 그가 사역함에 있어 어떤 문제가 일어날 것인가를 미리 아는 사람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강의를 통해서 그녀는 “전쟁”을 대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현명한 여인은 루비보다 값진 것이다.” 잭 하일즈(Jack Hyles) 목사와 그의 아내는 가정에서 ‘친밀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목사의 아내는 종종 외로울 때가 있으며, 그 자녀들은 늘 교회의 다른 아이들보다 적어도 두 배는 영적으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목사는 아내와 사랑이 충만한 가운데 지내야 하며, 자녀들은 그런 모습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가끔 자녀들을 데리고 아내와 즐거운 시간을 가짐으로써 목사는 다른 여자들의 목사일 뿐만 아니라 자기 아내의 목사가 되어야 하며 자기 아내의 사생활도 지켜주어야 한다. 또 때때로 집안 일을 도와주고 함께 외식도 해야 한다. 가족 전체가 교회에 함께 가는 것 외에도 함께 기도하고, 함께 놀며, 함께 휴가를 보내고 저녁시간도 함께 보내야 한다.
목사의 아내가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남편의 사역을 도와야 한다는 고정된 규칙은 없다. 그러나 목사는 이런 문제에 관한 도움을 받기 위하여 늘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아내는 그렇게 할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