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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교회사와 십자군(Anti-church History and the Crusa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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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7월호>
이제 국가와 결탁하여 예수 그리스도 없는 천국을 이루어 보려고 노력했던 카톨릭 교회의 반(Anti) 교회사를 살펴보겠다.샤를마뉴
(Charlemagne, A.D.768-A.D.814)
그는 모든 로마 카톨릭 독재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본보기이다. 샤를마뉴는 나폴레옹, 우르반, 그레고리, 헨리 8세등과 함께 반(Anti) 교회사의 영역에 속한다. 그에게서는 어떠한 성경대로 믿는 믿음이 발견되지 않으며, 신약성경을 따라 행하는 지역교회에 속한 적도 없었다.
샤를마뉴의 커다란 야심은 이 땅에 천국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의 가장 큰 목표는 성경의 예언들을 뒤집어 엎는 것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 없이 지상에다 기독교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샤를마뉴가 “중세의 모세”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실제 그는 8세기의 콘스탄틴이었다. 샤를마뉴가 모세라면 “피의 메리 여왕”은 룻일 것이다. 샤를마뉴는 자기 생애 동안 50번 이상의 군사작전을 수행하였는데 롬바르드, 바바리안, 슬라브, 사라센, 그리이스 등과 싸웠다. 이러한 전쟁은 자기와 로마 카톨릭 교황들의 발 아래 전 유럽을 한 국가 연합체로 일치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샤를마뉴는 계시록 13장에서 사탄의 성취할 일을 해 보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샤를마뉴는 학교들을 세웠고 소위 ‘기독교’에 대한 강한 믿음을 소유했다. 그는 아침 저녁으로 미사에 참석하며 헌신적이고 규칙적으로 교회에 나갔다. 교황에게 보내는 금, 은, 보석 등의 값비싼 선물들로 베드로 광장에 있는 로마은행을 가득 채웠다. 눈에 띄는 그의 개인적인 업적 중의 하나는 다섯 번째 부인이 죽은 후에 자기의 첩을 네 명으로 제한 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와 일치하지 않는 모든 구라틴 역본을 고쳤으며 카톨릭 유아세례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죽였다.
샤를마뉴의 삶 중 가장 위대한 사건(?)은 A.D.800년 크리스마스날에 로마에서 일어났다. A.D.799년 로마에서 큰 폭동이 일어나서 교황 레오가 기습당하고 위기에 몰렸다. 그는 사도직을 승계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베드로, 야고보,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대신에 샤를마뉴 대제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샤를먀뉴는 교황을 도왔다. A.D.800년 크리스마스 날 샤를마뉴가 성베드로 성당의 제단에 엎드려 기도하고 있을 때 교황 레오가 그의 뒤로 와서는 샤를마뉴 머리 위에 금면류관을 씌워 주었다. 그러자 로마의 아프리카 교회는 이 일에 대해 ‘하나님에 의해 임명된 아우그스투스’라고 외쳐댔으며 샤를마뉴가 프랑스로 돌아오자 유럽의 모든 지배자들이 ‘가이사’로서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워 준 사람은 단지 죽어야할 죄인인데도, 그는 왕관을 수여한 일로 인해 교회로부터 “하나님”이라 인정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국가 소위 “Kingdom of Heaven”(천국)과 교회 소위 “Kingdom of God”(하나님의 나라)이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함께 일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저주받은 결합이 시작될 때 그들 교회는 분명 승리자였다. 로마교회의 우두머리는 하나님이라 인정되는 반면, 국가의 통치자인 황제는 단지 하나님 아래서 정치적인 왕국의 우두머리로 가이사가 된 것이다. 이 일은 신약 성경에 따른다면(계13:1-10) 이 땅에서 적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정확한 모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샤를마뉴가 죽기까지는 로마 교황들은 자기들 계획을 모두 수행할 수 없었다. 아직 샤를마뉴는 실제적인 군대의 명령자였기 때문이었다. 샤를마뉴는 교황을 대신해서 794년 프랑크푸르트 공의회를 주재했고, 교황의 승인 없이도 자기의 주교와 수도원장들을 임명했다. 샤를마뉴의 생존시에 만약 교황 레오가 불만을 표했다면, 샤를마뉴는 자기의 주교들 가운데 한 명을 교황 자리에 앉혔을 것이다.
샤를마뉴 다음가는 반(Anti) 교회사의 인물은 교황 우르반 2세이다. 그는 1006-1097년까지 교황으로서 콘스탄틴의 이교도 권좌를 지배했다. 그는 프랑스인으로서, 수도승으로 있다가 대주교가 되며 클루니 수도원장을 지내고는 후에 그레고리 7세의 수석 비서가 된다. 그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 그는 또 다른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클레멘트 3세와 황제 헨리 4세를 파문시키어, 배후에 막강한 정치력이 있다면 또 다른 교황을 파문시키고 쫓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우르반 2세는 순례하는 기독교도를 돕기 위해 1095년 클레몽트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이슬람교도에게 해를 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의 순례자들을 돕겠다는 약속과 함께 이교도들로부터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키겠다고 콘스탄티노플 황제에게도 약속하였다. 자상하게도 그는 ‘해방’을 위한 전쟁에서 죽는다면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선물 받는다고 선언했다.
우르반은 클레몽트에서 A.D.800년 크리스마스날에 샤를마뉴의 대관식에 필적할만한 위대한 연설을 했다. 그에 의하면, 클레몽트에 모인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이고, 모든 투르크족들은 저주받은 종족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썩지않는 면류관”을 그들을 죽이는 자들에게 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르반 자신은 이미 그의 왕관을 갖고 있었기에, 그는 군대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선동적인 연설이 끝날 때에 미혹당한 카톨릭 신자들은 환호하며 외쳐댔다. “하나님이 뜻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첫 번째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다. 거지들, 농부들, 군인들, 탐험가들, 신부들, 귀족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격하기 시작했다. 약 3만의 병사들이 싸우러 나아가는 실제적인 군대를 구성했다. 프랑스, 노르만, 이태리의 최고의 군주들을 대표해서 많은 귀족들이 참여했다. 이 무장한 기사들은 1097년 니케아를 점령하고 일 년 뒤에 안티옥을 차지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기근, 전염병, 탈영으로 죽었고, 말고기와 낙타, 개, 쥐 등을 먹었다. 많은 수는 오줌을 마시고 죽기도 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계속 진격하여 1099년 7월 15일 드디어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투르크족과 함께 그들의 회당에서 불태워졌다(창12:1-4).
항복하면 살려주겠다고 약속받은 3백명의 투르크 포로들이 도살당하였고 사라센 여자들과 아이들은 목이 잘려지고 내장이 튀쳐 나온채로 성벽에 내동이 쳐졌다. 피가 말고삐까지 닿았다. “하나님이 뜻하신 것이다.” 라틴 왕국이 예루살렘에 세워졌다. 이 기간 십자군은 천국을 오게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 성을 건립하였고 카이사랴, 프톨레마이, 시돈, 베이루트, 페트라를 점령하였으며 다른 많은 군대들이 유럽에서 왔다.
그런데 전체 이슬람교도들과 연합한 살라딘(1138-1193)이 출현하여 이 외국 점령군대를 대항해서 싸움을 시작했다. 살라딘은 결정적으로 십자군을 공격했고 곧,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교도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때는 십자군과는 달리 예루살렘에서 아무런 살육이나 도살이 행해지지 않았다. 분명 “살라딘의 신이 카톨릭 교황들의 잔인한 신보다 더 자비로왔다.”
두 번째 십자군은 콘카드 3세와 루이스 7세의 두 프랑스 왕에 의해 결집되었다. 베르나드(Bernard)가 이 정치적 행위의 모병관으로 수천 명의 프랑스와 독일의 카톨릭 신자들을 선동했다. 그러나 이 군대는 자기들의 목표를 아무것도 완수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공격하러 가는 대신에 다마스커스와 에뎃사를 공격하기로 했으나 어느 곳도 점령하지 못했다. “하나님이 뜻하신 것이다.” 보병관 베르나드는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모세처럼 백성의 죄 때문에 이 여행이 중단되어서는 않된다고 하며 병사들을 나무랐다. 그러나 베르나드는 모세가 아니었고 이방 군대도 유대인이 아니었다. 또한 어느 누구도 교황이나 카톨릭 신자에게 땅을 약속하지는 않았다. 베르나드는 자신을 모세처럼 비유하면서도 자기의 성경을 잊었던 것이다. 모세는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세 번째 십자군은 살라딘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계획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실패였다. 이번의 지도자들은 프레드릭 바바로사, 필립 아우구스투스, 영국의 리차드 1세였다. 리차드는 27명의 죄수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면서 야파와 아스칼론은 점령했으나 예루살렘은 결국 점령하지 못했다. 대신 십자군은 살라딘과는 순례자들을 보호하겠다는 조약을 맺고는 귀국하였다.
소년 십자군(1212)은 비참한 악몽이었다. 프랑스 샤르트레(Chartres)근처에서 한 목동이 한 환상을 보았는데 그리스도가 유럽의 모든 어린이들을 자기에게 모으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그 어린이들은 하나님께서 마르게 하실 지중해로 내려가서 거룩한 십자가를 찾으라고 하셨다고 했다. 후에 이 소년 십자군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로 바뀌자 카톨릭 작가들은 그 목동이 ‘이단 알비겐시즈’에게서 그 명령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하여튼 전 유럽에서 온 8세에서 17세까지의 소년들 만삼천 명이 마르세이유로 행진해 나아갔으나 바다는 갈라지지 않았다.
불쌍한 어린이 군대가 알프스를 넘어서 이태리 제노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숫자는 7천명으로 줄었다. 결국 그들은 파렴치한 두 사람에게 속아서 배에 실려 카톨릭 교회의 고향인 북아프리카로 가게되었다. 이들이 탄 배 중 두척은 산 피에트로 섬에서 파선했고 다섯 척은 북아프리카에 도착했는데 그 소년들은 모하메드 교도들에게 노예로 팔리게 되었다. 교황 그리고리 9세는 ‘순교자들’을 위해 산 피에트로에 깨끗하고 작은 예배당을 세움으로 이 모든 일에 대한 침묵의 승인을 만회했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