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약교회사 분류

위대한 이단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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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6월호>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1452-1498)


사보나롤라는 이태리 훼라라에서 태어난 이태리의 개혁자이다. 그는 1474년 집을 떠나 도미니카 수도원회로 들어가서 성경과 어거스틴의 글들을 공부했다. 이 두 개의 상반되는 권위 속에서 자라났기에 사보나롤라는 그와 동시대의 복음적이고 성경적이었던 인물들의 수준(왈덴, 롤라드, 후스파 등)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크리소스톰(Chrysostom)처럼 위대한 의의 전도자가 되었고, 로마 카톨릭 사제들과 주교들의 죄악에 대항해서 담대하게 소리침으로써 이태리를 뒤흔들었다. 교황 알렉산더 6세(Alexander VI)가 그에게 추기경의 붉은 모자를 수여하겠다고 했을 때 사보나롤라는 대답하기를 차라리 피로 물든 붉은 모자를 쓰겠다고 했다.
사보나롤라를 통하여 우리는 카톨릭이 15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을 죽였던 이유와 그 교회를 지배하는 최고 권력자의 본질을 알 수가 있다. 위클리프와 후스와는 달리 사보나롤라는 카톨릭의 일곱 성사를 믿었었고 죽을 때까지 로마 카톨릭 신자로 남아 있었다. 사보나롤라는 브레시아의 아놀드와는 다르다. 반대로 그는 어거스틴과 아타나시우스 만큼이나 정통적이었다. 그런데 그는 세번에 걸쳐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
첫째, 그는 보헤미아 형제단을 동정하였다. 이들은 불가리안즈와 폴리시안즈의 후손이었다. 보헤미아는 개혁의 요람으로 불려 왔다. 이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보헤미아 군인 지즈카(Zizka) 때(A.D.402)에 그들 지위의 갑작스런 확장을 경험했었다. 왕을 따르는 사람들은 ‘타보라이트’(Taborites)라고 알려졌고, 타보라이트의 신학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거부했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과 다른 가르침에 대해서는 받아 들이지 않았다. 위클리프 성경이 나오기 50년 전에 보헤미아에는 보헤미아 성경의 네번째 판이 사용되었다. 1498년에 보헤미아 형제단은 자기들의 성경을 출판했었다.
둘째, 종교적 자유와 성경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사보나롤라는 ‘이단’으로 불리기를 자청했다. 왜냐하면 어떠한 교황도 그렇지가 못했기 때문이다.
셋째, 사보나롤라는 교황 보니페이스 8세(Boniface VIII)를 ‘여우처럼 시작해서 개처럼 끝난 사악한 인간’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한 번에 여러 개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중단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임재가 교황을 떠났다면 교황은 단지 고장나 쓸모없게 된 공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에 교황은 그를 두 달 동안 고문하고 나서 화형시켰다.
사보나롤라가 화형대 위에 묶였을 때 교황의 사제들은 그에게 말했다. “나는 너를 승리한 교회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는 자신이 이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요지부동의 전도자는 대답했다. “나는 승리한 교회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희들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은 “예수님, 예수님”이었다. 구경꾼들이 그의 죽음을 한 순교자의 죽음으로 오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들은 사보나롤라의 시체를 태워서 그 재를 아르노 강에 뿌렸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영적, 도덕적 질을 확인하는 데는 어렵지가 않았다. 그들은 종교재판소(도미니크)의 우두머리는 성인으로 섬기면서 사보나롤라는 화형시켰던 것이다.

로상느의 “헨리”
(Henry of Lausanne, 1090-1145)

이태리에서 태어난 헨리는 한때 베네딕트 수도승이었다. 그는 로마 카톨릭 성직자들의 타락에 대해 설교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후에 풀려나기는 했으나 자기 주교에 의해 추방당하고 말았다.
헨리는 ‘이단들’의 온상인 남부 프랑스로 가서 브루이의 피터(Peter of Bruys)를 따르는 노방 전도자들과 합세하게 되었다. 그 때 교황은 “헨리시안”(Henri- cian) 이단을 박멸하기 위해서 교회의 고위 관리들을 남부 프랑스로 보냈다. 결국 헨리는 다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았고, 후에 감옥에서 죽었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왈덴시안에게 흡수되었다. 브루이의 피터와 헨리 이 두 사람은 물세례, 미사, 우상의 사용을 반대하였다. 피터(1080-1126)는 교회 건물은 세우지 말아야 하며, 십자가는 경배할 가치가 없고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무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브루이의 피터는 상당히 위험한 ‘이단’이었기에 교황은 착하고 신실하고 경건하고 ‘거룩한’ 아버지로서 피터를 화형에 처했다.

“류타드”와 플란데르의 “탄첼”
(Leuthard and Tanchelm of Flanders)

이 두 사람은 전 유럽의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등장한다. 루타드는 로상느의 헨리와 같은 카타리였고, 탄첼은 플란데르에서 복음을 전하며 성직자들의 악행에 대해 공공연한 비난을 가했다. 그는 공언하기를 카톨릭의 부패한 신부들이 수행하는 성사는 무가치한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 주장이 노바티안의 입장과 일치한다는 것은 아마 그 자신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투루스 공의회(Council of Toulouse, 1119)에서는 성사를 거부하는 이단들에 대해 해당지역의 지배자들이 처벌할 수 있도록 결의되었다.
탄첼은 소위 ‘급진적’이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다.
카톨릭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이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을 그들에게 행했다. 한 카톨릭 신부에게 그들을 살해하도록 시켰다.
세그리의 “브루노”(Bruno of Segri, 1049)는 카타리였고 여러 교황의 자문관이었다. 그는 바티칸에서 오리겐, 클레멘트, 유세비우스, 어거스틴이 전 생애 동안 이단으로 여겼던 전천년주의를 전파했다. 이것은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 교황의 사령부에 출현했던 첫번째의 이단이었다.

루마니아의 “버톨드”
(Berthold of Rumania, 1210-1272)

버톨드는 순회하며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였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다. 버톨드는 영원한 지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높였다. 그는 사기꾼, 탁발승, 춤꾼, 게으름뱅이들을 비웃었다. 그는 독일어, 슬라브어, 라틴어 등 세 개의 언어로 설교했다. 비록 그가 그 시대의 배도를 뒤엎을 수 있을 정도로 성경적이지는 않았으나, 그는 계속해서 면죄부에 반대하는 설교를 해 나갔다.

“마이스터 엑카트”
(Meister Eckhart, 1260-1327)

엑카트는 신비주의자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모임의 회원이었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성도의 내면적이고 헌신된 삶이었다. 엑카트는 독일의 신학자로 1325년 콜록네(Cologne)의 대주교로부터 이단이라고 비난받았다. 1329년 교황 요한 22세는 엑카트의 가르침 중에서 15가지는 이단적이고 11가지는 이단에 가깝다고 발표했다. 물론 카톨릭에게 이단이라는 것은 성경에 근거한 반카톨릭(Anti-Catholic)적인 것이었다. 엑카트의 ‘이단설’은 성사와 교회의 권위가 함께 거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선행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거룩하게 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이렇듯 엑카트의 가르침은 교회의 전체 성사 체계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트렌트 공의회에 따른다면 엑카트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된다. 그러나 엑카트가 가르친 것은 사람들에게 카톨릭 성직자와 성사의 형식적인 권위로부터 벗어나 성경 자체의 권위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단’이 된 것이다.

이 사데기간 동안 왈덴교도들은 주로 남동 독일로 해서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된다. 교황의 강력한 권력도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왈덴교도들은 ‘복음 전도자’들이었고 그들이 가는 곳곳마다 성경이 전해졌다. 그들의 사역은 강력하여 강단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라틴어가 아니라 각국의 모국어가 사용되었다. 로마의 종교적인 간계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전 유럽에서 계속해서 전파되었다. 이렇게 해서 로마 교회의 운명의 한계가 결정된 것이다.
이 때의 성경대로 믿는 복음전도자들은 계시록을 설교하였고, 노상설교의 주된 주제는 ‘적그리스도’였다. 왈덴교도들은 처음부터 로마교회에 복종하는 모든 죄인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가르쳤다.
1200년에서 1500년까지의 기간에 화형에 처해져야만 했던 이단들의 지속적인 출현은 로마 카톨릭의 역사나 친카톨릭 교회사와 관계없는 지하에서 벌어진 위대한 운동들이었다. 로마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카타리, 왈덴교도, 알비겐시즈, 보헤미안 형제단들의 계속적인 복음 전파로 성경과 더불어 성경구절을 담은 전도지가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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