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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시대의 두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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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2월호>
제수이트(the Jesuit)신학에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원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수호하는데 유용하게 적용되었다.즉 그들은 마태복음 16:16-18을 잘못 해석하여 교회를 유지하고 주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있어서 무력수 단을 동원하거나 상황에 따라서 교회의 입장을 바꾸어 타협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믿음이나 기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또한 그들은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심지어 영적 문제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연합”과 “권력”을 최대의 관심사로 두었다. 두아티라 기간(500-1000)에 국왕들과 결탁하여 전 유럽을 암흑시대로 몰아넣은 로마 카톨릭의 독단적인 권위에 맞서는 두 세력이 있었다. 두 세력 모두 모든 시대에 걸쳐 어떤 나라나 어떤 계층의 사람들에게나 가장 큰 관심사인 “무엇이 절대권위인가”라는 문제에 연관되어 있다.1. 모슬렘
한 세력은 코란을 들고 나온 모슬렘과 사라센인들로, 그들은 자기들의 경전을 믿음과 행위의 모든 일에 대해서 절대권위로 인정하였다. 코란은 마호멧(A.D.570
-632)이 만든 것으로 동방 세계의 성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코란은 영감이 담긴 책으로 볼 수 없는 네 가지의 취약점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코란은 구약성경에 계시되지 않은 내용에 대해서는 어떤 예언도 회피하고 있다. 즉 마호멧은 자신을 “선지자”로 칭했으며 “자신 외에 다른 선지자는 없다”고 하였으나, 그의 시대를 넘어서 다니엘이나 이사야 및 구약 선지자들이 언급하지 않은 역사적 사실들에 관하여 단 한 마디의 예언도 담지 못했다.
2. 코란이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서 약 30년에 걸쳐 완성된 반면, 성경은 스물 네 명의 기자가 2천 년에 걸쳐서 기록하여 완성되었다.
3. 코란에 따르면 구원의 조건은 전쟁에서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것이다.
4. 코란에 따르면 사람은 죄사함 받기 위해 그리스도의 희생이 필요하지 않은데 이는 그리스도가 흘린 피는 대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코란의 교리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지도 않았으며 로마 카톨릭이 숭배하는 마리아와 함께 휴거된 것으로 되어 있다.
모슬렘 교도들의 구원은 (모든 카톨릭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금식, 기도, 포시(布施) 등의 행위에 근거한다. 반면 일부다처제와 노예제도는 모슬렘 종교에서 묵인되었다. 그럼에도 20세기의 모든 로마 카톨릭 교황들은 모슬렘교도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요1:12)이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인간의 형제됨”(Fatherhood of God & Brotherhood of Man)을 믿는 사회주의자들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1980년대의 바티칸의 속임수는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런 “형제들”과 교제하도록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이러한 계략은 암흑시대의 교황들도 즐겨 사용하던 것으로, 그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거듭나지 않은 신자들과 이민족들, 바이킹들과의 “타협”을 모색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연합은 성경의 진리나 건전한 교리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념이었기 때문이다.
마호멧이 죽은 뒤(632) 그의 종교는 유혈을 빚으며 확립된다. 모슬렘 교도들은 그와 그의 계승자인 아부 바크르(Abu Bakr)의 영도 아래 15년 동안 시리아, 팔레스타인, 크레타, 싸이프러스, 로데, 아르메니아와 이집트를 정복한다. 697년에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인들을 개종시키며, 아프리카에서 스페인으로 진격하여 서고트족을 무찌른다. 모슬렘교도들은 스페인 전역을 정복해 가다가 732년 투르즈 전투(Battle of Tours)에서 교황 지지자인 카알 마르텔에게 격퇴당한다.
모슬렘 교도들은 시실리와 이태리를 정복하고 로마로 진격한다(846). 이들이 이태리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는 것은 915년으로, 안티옥이나 예루살렘, 두로, 시돈 등지의 로마 교황의 영향 아래 있는 “거룩한” 도시들, 유물들, 건물들은 모슬렘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리고 교황 어번 2세는 이 지역을 회복하기 위하여 유럽의 고귀한 500,000명의 젊은 목숨들을 앗아
간 전쟁, 즉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2. 콘스탄티노플 - 동방교회
로마교회의 권위에 맞선 두번째 세력은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다. 콘스탄티노플과 로마의 대주교들은 오랫동안의 세력다툼으로 앙숙지간이었다. 800년 경에 이 두 교회는 완전히 세속화되어 싸움은 정치적인 경향으로 흐르는데, 어느 쪽이 더 성경적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누가 더 많은 권력을 가졌는가가 이슈였던 것이다. 이렇게 두 교회는 성경적인 노선을 떠났으며 오히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이교도 의식을 수용하며 세상과 타협하였다. 물론 콘스탄티노플의 동방교회가 로마교회보다는 비교적 성경적인 면이 강하였는데, 그 이유는 콘스탄티노플이 위치상으로 시리아 안티옥과 가깝고 로마보다 더 잘 보존된 성경 사본들이 많았으며 크리소스톰과 같은 성경적인 설교자들도 많았고 로마 주교의 정치권력에 비할 때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는 그렇게 강력한 정치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두 교회는 아래 항목들에 동의하였다.
1. 우상숭배를 허용한다(787). 양쪽 교회의 위선자들은 우상숭배를 “예배를 위한 도구”나 “존경받는 사람들의 기념물”이라는 이름으로 가장하였다.
2. 성경과 교회 전통을 동등한 두 개의 절대 권위로 인정한다.
3. 죽은 성도들이나 그들의 초상을 숭배한다.
4. 구원은 믿음과 행위로 이루어진다.
5. 침례로써 거듭난다는 교리를 공식화하며, 성직자는 신성한 권위를 가지고 죄를 사해 준다.
결국 88년 경에 로마 카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는 신약성경에 계시된 모든 기준에서 봤을 때 첫째가는 이교도 우상 숭배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교회가 일치하지 않은 사항들도 있었다.
1. “성(聖) 변화의 교리”(밀주와 빵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속이는)가 동방교회에서는 로마처럼 그렇게 명백하지 않았다(800). 연옥에 대한 교리도 마찬가지이다.
2. 동방교회의 어떤 주교도 로마 주교의 무과실성이나 하나님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동방교회는 로마나 콘스탄티노플, 안티옥,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예루살렘의 대주교들이 모두 동등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3. 동방교회는 마리아가 죄없이 태어났다고 믿지 않았다. 즉 로마교회가 주장하는 마리아의 “무염시태”(無染始胎, Immaculate Conception)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동방교회와 로마교회는 계속해서 불편한 괸계로 역사 속에서 각축을 벌여 왔다. 로마교회는 2차 세게대전에서 카톨릭 합스부르크 왕가를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복귀시키려는 계획이 실패하자 동방 정교회 세력 하에 발칸지역의 동부유럽을 단념했다. 대신 공산국가에 접근하여[두 공산주의자 교황인 지우세삐 론칼리(Giuseppe Loncalli)와 지오반니 몬티니(Giuvanni Montini)의 공작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아 UN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또한 로마교회는 그들의 통합과 권력을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세력과도 서슴없이 타협했다. 그래서 교황 바오로 6세는 1977년 1월에 로마의 시스틴 예배당에서 동방 정교회 대주교의 발 밑에 엎드렸는데 그로 하여금 자기를 성인으로 인정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 둘 다 공산당의 세력 하에 있었던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