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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이단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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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5월호>
신약 교회사는 “이단들”이라고 불리는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이다.필립 샤프(Philip Schaff)같은 개혁주의적인 교회사가들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이단 집단”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교회의 역사, 가르침, 활동, 그것들의 열매에 대한 성경적인 해석의 실패는 두 가지 원인에서 나오는데 무지와 비겁함이다. 가치있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최종적이고, 절대무오한 권위를 버릴 때, 남는 것은 단지 “상대적인 진리”, “상대적인 견해”, “믿을 만한 번역본”, “믿을 만한 역본”, “상대적인 선택” 뿐인 것이다.
교회사의 척도로서 성경을 거부할 때 반(Anti)교회사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로마 카톨릭과 배도한 개신교의 정치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노력의 역사이다. 어느 누구도 로마 카톨릭의 역사를 ‘교회의 역사’나 ‘기독교의 확장’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신약 성경을 버리지 않고서는 그것을 ‘교회사’라고 말할 수 없다. 15세기 동안 4천만 명을 살해한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전일 수는 없다. 이같은 교회가 결코 그리스도의 신부일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과 언약의 백성인 유대인들을 사악하고 잔인하게 다룬 스페인을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쓸모없는 고물딱지처럼 만들어 버리셨다. 스페인은 무적함대의 침몰 이후 3류 수준의 세계 권력도 지니질 못했고, 1800년 이후는 5류 수준에도 미치질 못했다. 또르께마다(Torquemada)가 1490년 세비야에서 히브리어 구약 성경의 복사본 6000권을 불태워 버렸을 때, 그는 콜럼부스(Columbus), 마젤란(Magellan), 코르테스(Cortez), 꼬로나도(Coronado)와 함께 떠오르고 있던 해양 제국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 것이다.
스페인, 프랑스, 이태리에서 “이단들”에 대한 보복이 이루어질 때, 주님도 자신의 복수를 하고 계셨다.
1. 마귀의 어머니 교회를 분열시켰다. “거룩하고 사도적인 하나의 교회”를 항상 떠들어대던 카톨릭 거짓말장이의 입을 영원히 닫을 수 있게 프랑스 아비뇽과 로마에 적그리스도를 각각 한 명씩 두었다.
2. 영국에 위클리프(Wycliffe)라는 “이단”을 일으켜서 로마와 런던 사이를 끊게 만들므로 다시는 교황이 성 바울(St. Paul) 교회를 회복하지 못하게 했다.
3. 주님은 유럽에 흑사병을 보내서 5백만 명을 쓸어 버렸다. 이중 70%는 거룩한 어머니 교회의 회원들이었다.
이제 사데기간 중의 위대한 “이단”들에 대해서 살펴 보겠다.
브레시아의 아놀드
(Arnold of Brescia, 1110-1155)
아놀드는 북부 이태리(롬바르디) 출신이다. 그곳은 왈덴시안즈(Waldensians)와 폴리시안즈(Paulicians) 땅의 핵심 지역이었다. 아놀드는 라테랄 장로회(1139)와 센스 공의회(1140)에서 분리주의자로 낙인찍혔다. 그는 이태리와 프랑스에서 추방당하여 보헤미아로 갔다. 그곳은 아이오나(Iona)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아놀드는 불가리안즈(Bulgarians)와 폴리시안즈를 만났다. 로마로 돌아가도록 허락받고는 로마에서 폭동을 주동했을 때 “이단”으로 다시 추방당하게 되었다. 교황 아드리안 4세는 마침내 프래드릭 1세에게 아놀드를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아놀드는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죽은 후에 그의 시체는 화장되고 재는 티베르강에 뿌려졌다.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 of Christ)가 자기 교회의 회원 중에 한 사람을 왜 이런식으로 대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아놀드는 성사와 유아침례에 대해 불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성 베르나르드는 아놀드의 성경적인 신념을 독이라고 말했다. 바르니우스는 그를 “정치적 이단의 아버지”로 불렀다. 아놀드의 정치적 이설은 맑은 수정과 같았다. 그는 교회가 세상의 어떠한 정부와도 연관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며, 성직자는 국가나 정치와는 어떠한 얽힘도 있어서는 않된다고 생각했다. 즉, 아놀드는 물침례와 교회와 국가의 분리에 있어서는 침례교도의 입장이었다(Anti-Catholic). 이에 반해 현대의 모든 교황에 따른다면 교회와 국가의 분리는 이단으로 단정된다.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카톨릭 교회는 분명한 입장을 제시한다. 아놀드는 알비겐시즈(Albigenses)와 왈덴교도들이 유아침례와 성만찬(Eucharist)에 대해 갖고 있던 견해대로 믿었기 때문에 그가 당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존 위클리프
(John Wycliffe, 1320-1384)
위클리프는 “개혁의 샛별”이라 불린다. 그는 영국에서 색슨 혈통으로 태어났다. 존은 1366년에 사제가 되었고 1374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곧 로마 카톨릭에 대한 비난을 거침없이 하기 시작하여, 성 바울에 있는 런던 주교 앞에 소환당했다. 이 때 교황은 위클리프의 모든 글들을 몰수했으며 영어로 된 최초의 성경에 대해서 금지령을 내렸다. 위클리프는 라틴어에서 영어로 성경을 번역했었다. 비록 그가 단지 제롬의 벌게이트를 사용했다는 비난을 받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존 프베이(John Purvey)라는 사람이 제롬의 성경과 맞추기 위해 위클리프의 성경을 약간 개정했었다. 위클리프는 구 라틴 성경(Old Latin)과 제롬의 벌게이트와 일치하지 않는 곳의 번역을 위해 구 라틴 필사본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위클리프는 살아 있는 동안 영국의 귀족들과 일반 백성들의 보호를 받았다.
존은 영국 전역에 성경을 전파했던 “가난한 성직자”의 한 지체인 옥스포드의 졸업생들에게 지원를 받았다. 그들은 “롤라드”(Lollards)라고 알려지기 시작했다. 롤라드의 기원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후밀리타이”(Humilitai)와 “후라트리셀리”(Huratricelli)라 불리는 프랑스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이 롤라드가 했던 것처럼 자원해서 거리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레이(D. B. Ray)에 따르면 왈더 롤라드(Walder Lollard)라는 피드몽 출신의 왈덴시안 목사가 그 이름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위클리프는 1384년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 죽었다. 그의 글들은 강력하게 금지 되었고, 1415년에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그의 책들은 불태우도록 지시가 내려졌다. 후에 그의 시체는 무덤에서 파내어 그의 책들과 함께 불태워졌다. 이것은 1413년에 랑테랑 공의회 때 결정된 것이었다.
존 후스(John Huss)는 “위클리프파”라고 고소되었다. 위클리프의 시체가 왜 그토록 잔인하게 다루어졌는지는 추측이 필요없다. 위클리프가 “아리안”(Arian)이나 “매니키안”(Manichaean)의 경향을 지녔기 때문에는 아니었다. 위클리프의 시체가 무덤에서 파내져서 불태워진 것은 그가 아리안, 매니키안즈, 도나티스트(Donati- sts), 폴리시안즈, 파테린즈(Paterines), 보도이스(Vaudois), 불가리안즈, 알비겐시즈, 왈덴시즈, 까따리(Cathari)들 처럼 교황이 적그리스도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또 교황의 세속적인 주교들을 악마의 종이라고 하며 자기는 교회가 필요없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위클리프는 “성화채”(Transubtantration)의 아프리카 흑마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티옥 그리스도인들처럼 위클리프도 믿음과 행위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권위로서 성경을 믿었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부해야만 하는 완전한 진리였다. 성경과 일치하는 것은 진리이고, 성경과 맞지않다면 그 어떤 것일지라도 거짓이었다. 위클리프는 평신도가 자기들 언어로 성경을 가질 특권을 부인하는 로마 카톨릭을 이단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그는 유아세례, 마리아 숭배, 연옥,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묵주, 유품 숭배, 미사, 외경 등을 거부했다. 위클리프는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도 였으며 그보다 더 악한 “이단”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니콜라스 히어폰드(Nicolas Herefond)는 외경을 번역하여 위클리프의 성경에 끼워놓으므로, 위클리프가 북아프리카에서 나온 로마 카톨릭의 공식 성경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존 푸베이는 나중에 제롬의 성경과 비슷하게 하기 위해 이것을 개정했다. 푸베이는 롤라드였었지만 감옥에 갇힌 후에 그의 믿음을 취소했다. 그는 마리아에게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카톨릭 대주교에 의해 히드의 주교로 승진되었다. 대주교 아룬델(Arundel)이 위클리프와 그의 영어성경에 대해 “천벌받을 만한 전염성이 있는 더러운 것... 적그리스도의 제자이고 선두주자”라고 말했다.
노방전도자들인 롤라드들은 위클리프의 ‘천벌받을 만한 것’을 가지고 영국과 유럽을 가득 채웠다. 그들 중 많은 수가 화형당했다. 윌리암 소트리(William Sawtre ), 존 베드리(John Badly), 리차드 터밍(Richard Turming), 윌리암 테일러(Will- iam Taylor), 윌리암 화이트(William Wh- ite), 리차드 호브던(Richard Hovden), 리차드 위쳐(Richard Wyche), 토마스 방글레이(Thomas Bangley), 존 올드케슬경(Sir John Oldcastle) 등이다.
영국에서 화형당한 최초의 여자는 롤라드였다. 1494년 스미스필드에서 조안는 브루톤은 그녀의 딸과 함께 화형당했다. 존 브르스러, 윌리암 스지틴은 스미스필드에서 산채로 화형당했다. 제임스 레스비는 1407년 스코트랜드에서 화형당했다. 악마의 창녀 교회는 교회사가들이 “기독교의 확장”이라고 부르는 일을 바쁘게 실행하고 있었다.
보헤미아의 존 후스
(John Huss of Bohemia, 1369-1415)
후스는 보헤미아 호시네쯔에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398년 프라하 대학에서 신학교수가 되었다. 1401년에는 성직자에 임명되었다. 그가 존 위클리프의 글들을 자기 언어로 번역하자 곧, 악마같은 창녀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을 ‘후스파’(Hussite)라 하는데 한 때는 나라 전체가 그를 따랐다. 후스는 교황에 의해 출교 당했으나 설교와 글을 쓰는 것을 계속해서 했다. 1414년에 콘스탄스 공의회에 소환당해 그곳에서 행동의 안전을 약속받았었으나 체포되어서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는 화형당했다.
그를 처형한 무자비한 카톨릭 살인자들은 후스가 아리안, 보고마일이나 파테린드 였다거나 알비겐시즈나 매니키안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후스가 보헤미안에 있는 이러한 그룹에게서 그의 성경적 진리에 대한 관점을 취한 것은 확실하였다. 보헤미아는 왈덴교도들의 주요한 거점 중의 하나였다. 후스의 이단설은 그가 아프리카 미사의 흑마술을 거부한 것이다. 또한 그는 단지 성당이나 교회 건물에서만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믿었다. 교황의 무오설을 부인하고 교황, 대주교, 추기경이 없이도 진실되고 거룩한 하나의 교회가 존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후스의 신성모독적인 발언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그는 교회가 베드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존 후스는 교회와 그 머리에 대한 완전한 교황권에 대한 이론에 강력하게 대항했다.
그래서 악마의 창녀 교회는 후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했다. 그들은 그를 화형시켰다. 공의회에서 안전을 약속하겠다고 했던 거짓말에 대한 교황의 변명은 놀랍게 간단했다. “아무도 이단(즉, 교황이 믿는 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약속을 지킬 필요는 없다.” 이 거짓말에 대한 변명은 훗날 예수회에 의해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링컨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밀 때의 적용은 간단했다. 착한 카톨릭 신자는 카톨릭 교회에 영광(일치와 권력)을 가져온다고 생각될 때는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