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팍스의 순교사 분류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바라보며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8월호>

디오클레티안(Diocletian) 통치 하에서의 열번째 박해(A.D.303)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로마 황제들의 통치 기간에도 그리스도인들의 수와 그들의 부는 얼마간 계속 증가하였다. 이로 인해 디오클레티안의 양자였던 갈레리우스(Galerius)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증오심으로 불타서 디오클레티안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도록 설득하였다.
그 피의 역사가 시작된 운명의 날은 A.D.303년 2월 23일로서 그 날은 테르미날리아(Terminalia)를 경축하는 날이었고, 짐승같은 이교도들은 그 날이 기독교를 종결시키는 날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그 날로부터 박해는 소아시아의 한 도시인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엄청난 수의 군인들과 행정 관료들이 교회의 문을 강제로 뜯고 들어가 그곳에 있는 책들을 모조리 불사르고, 그 도시를 온통 뒤엎어 놓았다. 이런 일들은 디오클레티안과 갈레리우스의 면전에서 일어났으며, 책을 태워버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 그들은 교회 건물을 흔적도 없이 헐어버리도록 칙령을 내렸다.
이 칙령이 공포됨과 동시에 분노한 한 그리스도인이 순교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그가 이 칙령이 붙어 있는 곳마다 그것을 찢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부당함을 부르짖으며 그를 비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행동은 황제를 자극하였고, 결국 그는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에 산채로 화형당하였다. 이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갈레리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을 더욱 박해하기 위한 그럴듯한 명분을 찾기 위하여 황제의 궁을 비밀리에 방화하고 그 죄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 씌우기도 하였다.
로마 치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던 일은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이었는데, 이 일로 인하여 많은 순교자들이 생겨 났다. 여기에는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박해가 가해졌는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이교 로마인들에게는 매우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은 수 많은 집들을 불태웠고 그리스도인들을 불길 속에 내던졌으며, 심지어는 사람들을 커다란 돌에 묶어 바다에 던지기까지 했다. 그 박해는 로마 전역으로 퍼져갔고, 특히 동쪽 지역에서 더욱 심하였다. 이 일은 10년간 지속되었으며, 그때 순교한 사람들의 숫자나 그들이 순교당한 방법들을 모두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고문대, 채직, 칼, 톱, 처형대, 독약 등이 그리스도인들을 다루는 데 사용되었으며, 더이상 고문하기 위한 방법들을 고안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으나 그들은 그것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프리기아(Phrygia)는 도시 전체가 그곳에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불태워졌다. 살륙하는 데 싫증난 지방의 몇몇 총독들은 황제식 법정을 열어 꼴사나운 판결을 내리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형집행을 연기하여 가능한한 그들이 단번에 처형되지 않게 하면서 서서히 그들의 삶을 비극적으로 만들곤 했던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귀를 베어버리고, 코를 자르거나, 오른쪽 눈을 뽑고, 손발을 꺾었으며, 벌겋게 달군 인두로 사람들의 몸을 지지곤 하였다.
이 박해 기간에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순교에 내어 던졌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은 세바스티안(Sebastian)이다. 그는 골 지방의 나르본네(Narbonne)에서 태어났으며, 밀라노에서 기독교 가르침을 받았고, 후에 로마에서 황제 수비대의 장교가 되었다. 그는 우상 숭배가 기승을 부리던 가운데서도 왕궁의 화려함에 유혹되지 않았고, 악에도 오염되지 않았으며, 승진할 욕심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참된 그리도인이었다. 기독교를 버리고 이교도가 되는 것을 거절한 그에게 황제는 캄푸스 마르티우스(Campus Martius)라는 도시 근교의 들로 끌고가 활을 쏘아 죽일 것을 명령하였다. 이 명령은 곧이어 집행되었다. 그의 시신을 가져다 장사지내기 위하여 그곳에 왔던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그를 안전한 장소로 옮겼으며, 얼마 후 세바스티안은 회복되었다. 그러나 두번째 순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걸을 수 있게 되자 그는 스스로 성전으로 가고 있던 황제 앞에 나타나 그의 잔인함과 기독교에 대한 비이성적인 행동의 부당함을 비난하였고,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고 놀란 디오클레티안은 그를 잡아 때려 죽이도록 하였으며, 장사지내지 못하도록 공중 하수구 속에 던져 버리게 하였다. 그러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루시나(Lucina)는 그의 시신을 카타콤으로 옮겨 장례를 치루었다.
빅토르(Victor)는 프랑스 마르세이유 지방의 명망있는 집안에서 자란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밤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찾아가 돌보아 주었으며, 약한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이런 경건한 일들은 신변을 위협하는 일이었으므로 낮에는 지속적으로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재산의 대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막시미안(Maximian) 황제의 칙령에 의하여 체포된 그는 결박된 채 거리에서 끌려다녔고 난폭한 성난 군중들에게 온갖 폭행을 당하였다. 고문대에 올라간 그는 하늘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인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하였고 놀라운 인내로 고문을 참아냈다. 고문 집행자들이 지쳐 그를 토굴로 옮겨 놓았을 때 그는 오히려 그곳의 간수였던 알렉산더(Alexander), 펠리시안(Felician), 롱기누스(Longinus) 등을 구령하였다. 이 일이 황제에게 알려지자 그는 즉시 빅토르를 사형시키도록 명령하였고, 그 구원받은 간수들도 참수당하였다.
빅르는 또 다시 고문대 위에 올려졌고 몽둥이로 맞고 투옥되었다. 그의 종교와 관련하여 세번째 심문을 받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수하였고, 그들이 작은 제단을 가져와 그에게 향을 피울 것을 명령한 때에도 그는 즉시 거절하며 그 제단을 발로 차버렸다. 이 일로 빅토르는 맷돌에 갈려져 산산조각나 순교하였다. 이 때가 A.D.313년이었다.
디오클레티안 황실의 고위 의전단이었던 드로테우스(Drotheus)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들을 구령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후에 고르고니우스(Gorgonius)라는 그리스도인과 함께 순교하였다. 황실에서 살았던 내시 피터(Peter)도 매우 겸손하고 온유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석쇠에 눕혀져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서서히 불에 태워지는 형을 받았다. 마술사로 알려졌던 씨프리안(Cyprian)은 안티옥 출신으로서 칼타고의 감독이었던 씨프리안과는 동명이인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자유주의 학문으로 교육받았고 특히 점성술에 심취하였다. 그는 점성술을 더욱 익히기 위하여 그리스와 이집트와 인도 등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그가 안티옥의 젊은 여인 져스티나(Justina)와 교류하게 되면서부터 회심하였고, 자신의 점성술과 마술책들을 모조리 불태웠으며, 침례를 받았다. 씨프리안의 회심은 한 이교도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고, 짧은 시간에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안의 박해로 씨프리안과 져스티나는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참수당하였다.
A.D.303년에 박해가 스페인까지 미쳤을 때 테라고나(Terragona)의 총독이었던 다시안(Dacian)은 감독 발레리우스(Valerius)와 집사인 빈센트(Vincent)를 체포하여 인두로 지지고 투옥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신앙은 너무나 견고하였으므로 그들은 발레리우스를 추방하고 빈센트는 고문대에서 고문하고 갈고리로 몸을 찢은 후 석쇠 위에 올려놓고 석쇠 밑에서는 불을 피웠으며, 위에서는 대못으로 그의 몸을 관통하여 찔렀다. 그러나 이러한 고문도 그를 믿음으로부터 돌이키게 하거나 죽게 하지 못하였다. 그는 어두운 토굴 속에 던져졌는데 그곳에는 날카로운 돌과 깨진 유리들이 바닥에 깔려 있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A.D.304년 1월 22일 순교하였으며, 그의 시신은 강물에 던져졌다.
디오클레티안 박해는 A.D.304년 경에 특히 그 위세를 떨쳤고 이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잔인한 고문과 혹독한 죽음에 처해졌다. 이때 순교한 사트리니우스(Satrinius)는 아프리카 알비티나(Albitina)의 한 사제였다. 그는 고문끝에 투옥되었으며, 거기서 굶어 죽었다. 그의 네 명의 자녀도 갖가지 고문을 받은 후 그들의 아버지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였다. 한편 아그라페(Agrape), 치오니아(Chionia), 이레데(Irene), 이 세 자매는 박해가 그리스에까지 다달았을 때 데살로니가에서 체포되었고, A.D.304년 3월 25일 화염 속에서 순교의 면류관을 받았다.
로마의 감독이었던 마르셀리누스(Marcellinus)는 가이우스(Gaius)의 뒤를 이은 인물로서 디오클레티안 황제에게 존경을 표시할 것을 강력히 반대하다가 순교하였다. 그때는 A.D.324년이었는데, 그는 숱한 고문 가운데서도 자신이 받을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바라보며 숨을 거둘 때까지 소망을 지니고 있었다. 빅토리우스(Victorius), 카르포포루스(Carpophorus), 세베루스(Severus), 세베리아누스(Severianus)는 친형제들로서 모두 로마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다. 이방신을 경배하는 것을 비난하다가 그들 모두는 체포되었고, 채찍으로 맞았으며, 납으로 만든 종에 묶이는 고문을 받았다. 이 형벌은 잔인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이 고문으로 신실한 네 명의 형제들은 순교하였다.
마우리타니아(Mauritania)의 집사였던 디모데(Timothy)와 그의 아내 마우라(Maura)는 결혼한 지 3주일도 안되어서 박해로 인하여 헤어지게 되었다. 테바이스(Thevais)의 총독 아리아누스(Arrianus)는 디모데가 성경책을 보관하고 있음을 알고 그것을 불사르기 위하여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그가 대답하기를 “만약 내게 자식이 있다면 나는 그들을 희생시킬 지언정 성경책은 불태울 수 없다”고 하였다. 이 대답에 화가 난 총독은 벌겋게 달군 인두로 그의 눈을 빼라고 명령하면서 “이제 그 책은 더 이상 네게 쓸모가 없게 되었다. 너는 그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단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고문에도 놀랍게 인내하는 그를 보고 총독은 그의 발목을 붙들어 거꾸로 매달고 입에 자갈을 물게 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 마우라는 그에게 신앙을 포기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며 그의 고집을 비난하였다. 그들이 디모데에게 대답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자갈을 꺼내 주었을 때 그는 그 아내의 간언에 동의하지 않고 그녀의 잘못된 사랑을 통렬히 비난하였고, 신앙을 위하여 죽겠노라고 하였다. 결국 마우라는 남편의 용기에 감동하였으며, 자신도 그의 영광스러움에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총독은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했으나 결국에는 그를 혹독한 고문에 처하였고 디모데와 마우라는 A.D.304년에 십자가형을 받아 처형되었다... BB

전체 97 / 4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