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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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모르는 “2백만 명”의 연합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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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12월호>

지난 10월 27일, 교계 안팎에서 많은 관심을 모았던 “한국 교회 2백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이하 연합예배)가 “할렐루야!”라는 인사말을 건넨 오세훈 서울시장의 축사 영상을 시작으로 막을 올렸다. 경찰은 이날 현장에 모인 인원을 23만여 명으로 추산했으나, 주최측은 당일 광화문, 서울역, 여의도 일대에 약 110만 명이 모인 데 더해 온라인으로 100만 명 이상이 함께하여 참가자 수가 당초 목표치였던 200만 명을 상회했다고 밝혔다.

기독교계는 경찰과 언론들이 연합예배의 규모와 영향력을 축소하려 든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면서 이날의 해당 행사를 근래 한국 교회 최대 규모의 집회였다고 추켜세웠다. 연합예배의 공동대표였던 오정현 목사(사랑의 교회), 이를 제안하고 추진했던 손현보 목사(세계로교회) 등의 인사들은 대회가 끝난 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소회를 밝히면서, 공통적으로 “하나님께서 개입하셨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이날의 연합예배에는 총 세 사람의 설교가 있었다. 첫 번째 설교자로 나선 박한수 목사(제자광성교회)는 열왕기상 18:36을 본문으로 “대한민국의 하나님, 응답하소서!”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그는 세상에 만연한 동성애를 비롯한 성적 일탈 풍토와, 이를 지지하는 정계와 언론계를 비판하면서, 자신들이 “거대한 권력 집단 이세벨의 비호 아래에 있는 바알 선지자 850명과 싸우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서 설교한 “여자 목사” 김양재(우리들교회)는 악인들에게 그 길에서 돌이켜 살 것을 말씀하시는 에스겔 33:11의 말씀을 본문으로 “돌이켜 살아나라!”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그녀는 산부인과 의사로서 죄의식 없이 낙태 수술을 자행하던 자신의 남편이 회심한 간증을 하면서, 낙태란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점을 역설했다. 또한 낙태 허용론자들이 “여성의 인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자들임을 염두에 둔 듯, 여성의 인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중요하다면서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이런 질서에 순종하면, 도리어 남녀가 동등하고 건강한 가정으로 회복할 수 있다.”라고 했다.

마지막으로는 미국장로교회(PCA) 대표인 브라이언 채플 목사가 설교했는데, 그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라는 말씀을 본문으로 “기도의 능력”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채플 목사는 미국 사회에서 성경적 결혼관과 가정관이 파괴되었음을 지적하며 “우리는 음행과 부도덕이 얼마나 빠르게 퍼졌는지 겸허히 반성하게 됐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날의 기도를 통해 “성령의 불길”이 나타나 이 땅의 국민들이, 더 나아가 미국과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게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후엔 “오라 우리가 나라를 새롭게 하자”(삼상 11:14)라는, 이날 행사의 취지를 반영하는 듯한 본문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을 새롭게 하기 위한 1,000만 기독교인 1027 선언문”을 읽는 순서가 있었는데, 각 교단에서 참여했던 만큼 예장 백석, 예장 합동, 기침, 감리회, 기성 등에서 전현직 총장급 인사들이 이를 낭독했다. 그들은 이 나라와 기독교계가 다섯 가지 목표, 곧 “생명의 나라, 자유의 나라, 창조의 나라, 기적의 나라, 빛과 소금으로 섬기는 교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섬기겠노라고 선언하면서, 선언문의 말미에 “우리의 요구”를 표명했다. 요구의 골자는, 정부에게는 동성 동반자의 건강보험 피부양 자격에 대한 지침을 개정할 것을, 법원에게는 동성혼과 성별 정정 합법화로의 길을 여는 판결을 하지 말 것을, 국회에게는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같은 악법 제정을 하지 말 것을, 교육부에게는 교과서에 있는 성적 왜곡을 수정할 것이었다.

위의 연합예배 선언문은 그 모임을 주도한 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였다. 즉 그들은 예배와 기도회를 열겠다며 사람들을 모았다. 그것들은 모두 그 대상이 하나님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은 국가 권력 기관들을 향해 선언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행사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던 것이다. 그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운운하면서도 속으로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이 있는 자들이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그들의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으며 나를 향한 그들의 두려움도 사람들의 법규로 가르친 것이라』(사 29:13).

선언문의 본문으로 선정되었던 사무엘상 11:14 말씀만 봐도 그들의 실체가 드러난다. 이 말씀은 불법적인 왕 사울이 세워지던 때를 배경으로 한다. 이어지는 12장에서는 하나님의 신정통치를 거부하고 다른 민족들과 같이 되려는 속셈으로 왕을 구했던(삼상 8:5) 백성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일의 심각성을 깨닫고 회개하는 장면까지 나온다(삼상 12:17-19).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로운 나라”를 추구했던 일은, 따지고 보면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었다는 말이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었으면 어떻게 이런 구절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라를 바로잡겠답시고 개최한 행사의 주제 구절로 삼을 수 있었다는 말인가! 앞뒤 문맥도 살펴보지 않고 그저 아전인수격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할 구절을 찾다 보니 그렇게 된 것 아니겠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이용해 먹는” 사람들인가? 한번 대답해 보라.

200만 명이 운집했다면서도 자신들이 “혈혈단신”으로 바알과 아세라들의 선지자들을 상대했던 엘리야와 같다고 여겼던 박한수 목사,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면서도 스스로가 현장에 있는 수많은 “남자들” 위에 올라서서 권위를 행사한 “여자 목사”라는 사실에는 어떤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던 김양재 목사의 모습은 실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세상 죄인들을 힐난하기에만 급급하여, 그곳에 있는 혼들의 영원한 멸망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점에서 목사 자격도 없는 자들이었다. 성경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대비하라.』(딤후 4:2)라고 명령하시건만, 그들은 그곳에 모인 교인들의 구원을 확인하기 위한 복음의 말씀을 준비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전파에 대한 열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오 독사들의 세대야, 악한 너희가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이 말하기 때문이라』(마 12:34).

온세상은 악함 속에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요일 5:19, 갈 1:4), 그 음행과 부도덕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브라이언 채플 목사 또한 성경에 대해 무지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세상이 이토록 타락한 원인을 교회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데서 찾는 것은 마치 밤이 어두운 까닭을 달이 밝지 못한 탓으로 돌리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논리이다. 밤이 어두운 이유는 달이 어두워서가 아니라 해가 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달이 휘영청 밝다고 해도(솔 6:10) 밤은 여전히 밤일 뿐이고, 따라서 어두울 수밖에 없다. 『의의 태양』이신 분이 다시 떠오르시기까지(말 4:2) 교회 시대의 밤(요 9:4,5, 롬 13:12)이 칠흑같이 어두우리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미래였다. 그런 운명을 인간이 무슨 수로 막는다는 말인가?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적 가치관이 무너졌을 때의 파국에 대해 설교할 수도 있고, 서구권에서 시행하는 차별금지법과 같은 악법이 제정되지 못하도록, 더 나아가 모든 경건과 청렴함 가운데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할 수도 있다(딤전 2:2). 그러나 시위대의 모양으로 선언문을 낭독하거나 세상의 정화를 위한 모임을 갖지는 않는다. 이는 “기독교”의 영역에서 아득히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다락방에서 조용히 기도했을 뿐 거리에 운집하여 그 숫자를 과시하지 않았다(행 1:13,14). 그들은 모든 권세 위에 계신 하나님께 자신들을 의탁하고 묵묵히 순교했을 뿐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바꿔 달라고 권세자들을 향해 소리치지 않았으며(벧전 2:13-15), 그 형체가 사라져가는 세상을 억지로 고쳐 보려고 애쓰지도 않았다(고전 7:31).

“예배”와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드려질 때 의미가 있다. 율법을 듣는 데서 귀를 돌이킨 자의 기도는 주님 앞에 가증한 것이며(잠 28:9), 주님의 명령에 입각하지 않은 예배(service)는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는커녕, 죽어 마땅한 중범죄이다(레 10:1,2). 강단에서 비진리가 울려 퍼지고 교인들이 성경에 약속되어 있지 않은 것을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무가치함을 넘어 역겨움이 되는 것이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였음에도 이번 연합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도 이루실 수 없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수 없는 방법으로 그분의 일을 하려 들면 버림받음(삼상 13:8-14)과 죽음(삼하 6:6,7)이 뒤따를 뿐이다. 설령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열성이 있다고 해도 사정은 변하지 않는다. 성경적 지식이 없는 열성은 아무것도 구원하지 못한다(롬 10:1-3). 구국(救國)의 기도를 올리려거든 바로 이 점을 명심하도록 하라. 『우리가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할 수 있느니라』(고후 13:8).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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