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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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교제가 강성한 교회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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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02월호>

바울이 선한 싸움을 잘 싸우고 달려갈 길을 온전히 마치고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동역자들과의 "좋은 교제"였다. 그에게는 적들이 많았던 만큼 "친구들"도 많았다. 로마서 16장에는 페베, 프리스킬라, 아퀼라, 에파네토, 안드로니코, 암플리아, 스타쿠, 아리스토불로, 날킷소, 트루페나, 펄시, 필롤로고, 율리아, 야손, 터티오, 에라스토 등 그 이름이 언급된 친구들만 해도 30명이 넘는다.

바울이 생애 마지막에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영적 아들이자 친구인 디모데의 "방문"이었다(딤후 4:9). 한마디로 "교제"였던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그가 되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고전 15:10), 그 은혜의 중심에는 동역자들과의 교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나바 없는 바울, 디모데 없는 바울, 누가 없는 바울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성도 간의 교제"였다. 『그들이 사도들이 가르친 교리와 교제, 빵을 떼는 것과 기도하는 데 전념하더라』(행 2:42). 이들 모두는 교제를 통해 한마음과 한 혼이 되었다(행 4:32). 성경적 지역 교회는 반드시 성도 간의 교제가 있어야 한다. 모든 집회가 성경적 지역 교회가 아닌 것처럼(행 19:39), 모임이라 해서 모두 성경적인 교제를 하는 것은 아니다. 동기와 목표에 있어서 하나님과 무관한 모임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악한 사귐도(고전 15:33) 있을 뿐 아니라 차라리 모이지 않는 편이 더 나은 모임도 있다. 『이는 너희가 함께 모이는 것이 유익하기보다는 해로움이라』(고전 11:17). 그저 편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함께 먹고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하는 것이 전부라면, 그런 모임은 교회를 약화시키고 있기에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교제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무엇인가?

① 성경적 교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로부터 시작된다.

『참으로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라』(요일 1:3). 주님과 함께하는 개인적인 교제의 친밀함이 성도 간의 "교제의 깊이"를 결정한다. 한 주 동안 영적으로 무미건조한 삶을 살면서, 말씀과 기도를 통한 기쁨도 만족도 없이 세상에 파묻혀 사느라 주님과 전혀 교제를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교제라는 명목으로 교회에서 만났다 한들 그런 모임은 사교 모임에 불과하다. 인간적으로는 아무리 친해도 주님과의 교제가 선행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성경적인 교제가 불가능하다. 함께 모여 서로 얘기를 나누면서도 "이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이 각자의 마음 안에 풍성히 거하면 감사와 기쁨의 간증을 나눌 수 있고,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는 등 말이나 행실에 있어서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되기에 서로를 격려하고 세워 주는 풍성한 모임이 될 수 있다(골 3:16,17). 예수님께서 중심이 되셔야 성경적인 교제를 시작할 수 있다. 따라서 우선은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친교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② 성경적 교제를 위해서는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기도에 전념했을 뿐 아니라 교제에 있어서도 최선을 다했다. 개인적으로 주님과 풍성한 교제를 가졌다면 그것을 다른 성도들과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자기 자신은 홀로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를 소홀하거나 무시하고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착각하는 것만큼이나 성숙하지도 영적이지도 못한 모습이다.

당뇨 합병증 중에 "당뇨발"이라는 것이 있는데, 혈관이 막혀서 전달되어야 하는 양분과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피부 조직이 괴사되고 결국은 엄지발가락이나 발뒤꿈치 등을 절단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걷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몸의 모든 조직이 순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각 조직이 "받은 것들"을 반드시 다른 조직에게 전달하여 순환시켜야 한다. 받기만 하고 주지 않으면 괴사하고 만다.

눈에 보이는 지체에게 관심을 거의 두지 않는 성도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요일 4:20).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눈에 보이는 성도와의 관계를 통해 입증되기 때문이다. 성도와의 적극적인 교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성도는 교만한 사람이다. 아무리 개인적으로는 많이 기도하고 성경을 많이 읽는다 하더라도 다른 성도와의 교제가 건강하지 못하면 영적 성장에 한계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 교제도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배워야 하고 훈련되어야 한다. 소극적이고 이기적인 자세를 탈피하여 적극적으로 경배와 기도, 구령, 성경공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수련회 등의 모임들에 부지런히 참여할 때만이 성경적인 교제를 제대로 배울 수 있다. 『또 서로 생각하여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 자신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저버리지 말고 서로 권면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③ 성도들 간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았을 때 마귀의 가족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옮겨진 사람들이다. 한 분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형제들인 것이다. 또한 동일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동역자들이며(고전 3:9), 그리스도와 연합된 지체들로서(고전 12:27)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다(빌 2:2). 믿고 실행하는 성경적인 교리가 일치하고 동일한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성경적인 교제는, 주님과 함께하는 진실한 사귐을 통해 영적으로 친교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며 서로에게 덕을 끼치는 일이다. 그러한 교제를 하면, 그 결과 서로 기도로 협력하게 되고(고후 1:11), 서로의 믿음을 통해 위로를 받으며(롬 1:12),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고(고후 8:4), 그리스도의 고난에도 동참하게 된다(벧전 4: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에 있어서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선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가 다르다(롬 12:6). 몸은 하나지만 서로 다른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듯이, 모두가 한 성령 안에 있지만 성령의 은사는 서로 같지 않다. 그렇게 다양한 은사를 주신 목적은 서로 협력하여 몸을 세우기 위함이지 서로를 비교하면서 우열을 가리기 위함이 아니다.

은사뿐만 아니라 믿음의 분량도 다르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용납의 대상이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아들이되 의심스러운 쟁점을 피하라... 먹는 자는 먹지 못하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또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음이라』(롬 14;1,3). 성숙한 성도일수록 믿음이 강하지 못한 지체에 대해 세심한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서 그들 앞에 거치는 것이나 방해물을 놓지 말아야 한다.

살아온 배경과 기질이 서로 다르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모두 헌신되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었지만 "인간적인 성격"이 사뭇 달랐다. 그러나 바나바는 바울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기에 바울을 동역자로 삼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오히려 적극 추천했다(행 11:25). 이후의 사역에 있어서도 성령으로 충만한 두 형제들 간의 "성격 문제"로 심한 의견 대립이 있긴 했지만(행 15:39), 나중 결말은 바울이 마가를 받아들임으로써 아름답게 끝이 났다(딤후 4:11). 이는 야고보, 베드로, 요한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들은 교회를 박해한 바울의 이전 행적이나 배경에 대해 마냥 묵과할 수만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바울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적극적으로 친교의 악수를 했던 것이다(갈 2:9).

이처럼 성경적 교제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되, 그 중심에서 예수님이 발견된다면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체 의식"이다.

④ 육신적인 상태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교제의 목적은 격려와 세움인데, 육신적인 상태에서는 시기, 다툼, 분열만 양산될 뿐(고전 3:3) 온전한 섬김을 할 수 없다(빌 2:3,4). 육신적인 교회는 온통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많은데, 정작 상처를 준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원인이 있기에 문제도 발생했을 텐데, 원인 제공자가 없는 것이다. 육신적인 상태에서는 아무리 옳은 말을 해 줘도 권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성경적 교제 안에 머물러 있는 성도는, 바울에게 책망받은 베드로처럼 진리를 따라 올바로 바로잡힐 뿐 아니라(갈 2:14) 그렇게 직접적으로 꾸짖은 동료에 대해 사랑과 고마운 마음을 간직한다(벧후 3:15,16).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그리고 다정다감하게 대하며 존중한다.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권면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세워 준다(살전 5:11). 동시에 무질서한 자를 훈계하고 낙담한 자를 위로하며 약한 자를 붙들어 주고 모든 이들에게 오래 참는다(살전 5:14). 필요에 따라서는 단호한 책망도 서슴지 않는다. 그 결과 서로가 예수님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이런 교제의 유익을 육신적인 사람은 결코 누리지 못한다. 오늘날의 우상은 탐심과 자기 자신이다. 무엇이든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으레 거부하는, 그런 세상 풍조에 휩쓸린 육신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성경적인 교제를 지속함으로써 성장해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지역 교회에 속해야 할 뿐 아니라, 섭리 가운데 인도해 주신 지역 교회를 세우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진리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우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같이 지체들을 사랑하는 가운데 잃어버린 죄인들을 부지런히 주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성경적 교제"는 이러한 지역 교회와 그 사역들을 강성하게 만들어 준다.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 주셔서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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