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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에 관여하는 할 일 없는 목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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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2년 04월호>
지난 월 9일, 5개 종단(기독교, 천주교, 불교, 천도교, 원불교) 소속의 300여 명의 “종교인들”이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의 사명과 역할』이란 주제로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 이 형식적인 종교인들이 한 목소리로 외친 헛된 구호들을 들어보면 참으로 진부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 사회를 올바르게 인도하기 위해 종교인들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불우이웃을 돌보고, 비폭력, 화해와 평화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등등.『만왕의 왕』(KING OF KINGS)이시고 『만주의 주』(LORD OF LORDS)이시며(계 19:16) 『유일하신 통치자』(only Potentate, 딤전 6:15)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없이 지상왕국을 건설해 보겠다고 나선 종교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외쳐왔던 진부한 구호들인가! 그런데 과연 이런 종교적인 구호들이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해 줄 수 있겠는가? 죽은 영을 살리고 지옥으로 향해 가고 있는 혼들을 구원해 줄 수 있겠는가? 죽을 몸을 변화시키고 썩을 몸을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있겠는가? 진정 이 땅을 새롭게 하고 의와 화평이 충만한 세상을 이룩할 수 있겠는가? 그런 구호들은 이미 부패한 지 오래되어 썩은 냄새만 풍기는, 허울 좋은 위선적인 구호들일 뿐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결코 영원한 생명을 줄 수도 없고 진정한 구원을 이룰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들 종교인들이 내놓은 주장들은 “종교인의 사명과 역할”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이 땅에 “화해와 평화”를 이룩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궁극적인 평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누구를 통해 임할 수 있는지 모르는 자들이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 화평을 이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 배운 적도 없다. 그들은 왜 모르는 것인가? 구원받지 않은 종교인들은 결코 하나님의 영의 일들을 받아들일 수도, 또한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고전 2:14). 성령께서는 그들에게서 성경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조명을 완전히 꺼버리셨다.
이날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종교인” 이영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는 “민족의 화해와 평화는 군사적인 힘이나 정치, 외교적 기획으로 이룰 수 없다. 이를 위해 교회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종교계와 산업계, 학계, 문화계 등 사회 전반에 걸친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오늘날 기독교를 믿는다고 말하는 종교인들은 교회가 해야 할 일조차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과 진리를 전하는 데 조금의 시간도 쓰지 않는 것이다. 정말이지 그의 주장대로 “종교계”가 나서서 사회 전반에 걸친 협력을 이룰 수만 있다면 이 땅에 화해와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God forbid). 사실 그것은 종교인들에게 “금지된”(forbidden) 일이다.
이는 성경에서 “종교”(religion)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곧 아버지 앞에서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종교 행위는 이것이니, 즉 고난 중에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아보는 것과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흠 없이 지키는 것이라』(약 1:27). 말하자면 종교라는 것은 첫째, “고난 중에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아보는 것”이고, 둘째,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흠 없이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번째 항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진정한 종교”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표방하고 있기에, 은혜의 복음을 통해 구원받아야 할 이 시대의 죄인들에게 결코 구원을 가져다 줄 수가 없다. 이는 구원이 “행위”에 의해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이루신 일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인”은 그가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오랫동안 직분을 가지고 섬겼어도 구원받은 성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가 “행위”를 표방하고 있다 보니까 그것이 세상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종교적인 행위”는 성경적 정의에 따르면 세상과 세상제도로부터 분리된 것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 목사를 비롯한 300여 명의 종교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속적으로 세상일에 욕심을 내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일에 관여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표는 세상과의 분리가 아니고, 세상과의 연합이다. 세상에서의 행복과 평화가 그들의 주된 관심사인 것이다. 사실 그들은 “종교인들”이라고 자처하지만 “종교인들”조차도 못되는 사람들인 셈이다.
하물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일에 관여해서야 되겠는가? 그럼에도 오늘날 배교한 기독교계는 “기독당” 운운하면서 세상 정치에 뛰어들려 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많은 “교인들”이 세상 정치계에 포진해 있다. 그런데 그런 교회들이 이렇게 세상 정치에 뛰어들어 다방면으로 협력을 모색했음에도 이 땅에는 여전히 화해와 평화가 이룩되지 않았다. 지난 2008년, 국회조찬기도회장을 맡았던 황우여 의원의 말에 따르면, 18대 국회의원 가운데 종교로서 기독교를 믿고 있는 의원들이 총 115명인데다가 그 중에는 장로직분(성경적인 장로직분은 아님)을 가진 의원들도 12명이 있어서, 이들을 연장자 순으로 르우벤부터 베냐민까지 이스라엘 12지파의 족장으로 삼고 각각 그 아래에 8,9명의 의원들을 배치시켜 매주 열심히 기도하는 정치인들이 될 것이라고 결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구호는 다 어디로 가 버린 것인가? 이 나라에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종교인들”이 국회의석을 (18대 국회의석 총 299석 가운데) 약 38%나 차지하고 있었는데, 왜 이 땅에는 화해와 평화가 임하지 않은 것인가? 그들이 염원하는 “지상낙원”은 어디로 간 것인가?
말하자면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구호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 땅의 평화를 이룩하는 것은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종교인”들이 해야 할 역할도, 사명도 아니었던 것이다. 진정한 화평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것이다(요 14:1; 20:19,21). 주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지 않는 한 그 어떤 평화도 이 땅에서 기대할 수 없다. 이는 진정한 종교란 참된 하나님을 숭앙하고 섬기는 신념이자, 주께서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종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종교의 핵심”에도 근접조차 하지 못한 이영훈 목사는 여전히 성경적 믿음에서 벗어난 주장을 하고 있었다. 즉 “개신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사는 것이며 따라서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힘쓰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마땅한 사명이요 역할”이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과연 예수님께서 종교인들에게조차 금하신 일들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명과 역할로 주셨겠는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라 여긴다면, “왕”을 거부한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 그들을 저주하시기까지 했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화 있으리라!” “눈먼 안내자들아... 화 있으리라!” “너희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야!”(마 23장).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기 원한다면, 세상일에 관여하려는 그런 구원받지 않은 종교인들로부터 먼저 분리되어 나와야 할 것이다. 그들과 한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협력하고 모색하는 것 자체가 악하고 가증스런 일이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목사들이 “종교인”이 아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일찍이 그 자리에 함께하지 말았어야 했다. 예수님을 온전히 따랐던 사도 바울은 어떤가? 그는 그가 구원받기 이전에 몸담고 있었던 “종교”인 유대교를 “배설물”로 여겼다(빌 3:7,8). 평화와 화해를 운운하면서 세상일에 뛰어드는 종교인들로 행세하는 것은 배설물을 뒤집어쓰는 것과 매한가지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살전 1:6, 엡 5:1,2) 신실한 바울을 따르라(고전 4:16, 빌 3:17)는 “개신교 신앙의 핵심”을 실천하기 원한다면, 여타의 종교인들과 모여 앉아 화해와 평화를 위해 힘쓰는 일을 중단해야 할 것이다.
이날 발표에 앞서 열린 기도회에서 방지일 목사(영등포교회)는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우애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동거할 때 초장문제로 그 목자들이 다투는 것을 보고, ‘우리는 골육이라 서로 다투지 말자.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고백한 것처럼 상대방을 존중하고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자.”고 역설했다. 하지만 이것은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핵심을 간과한 주장이다. 그는 아브라함이 성숙한 모습으로 롯과 다투지 않은 것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서 롯(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예표)을 분리시키셨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즉 “성경적인 성별”과 “온전한 순종”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떠나올 때, “고향과 친족과 아비의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행 7:3)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었다. 그 명령에 부분적으로만 순종했던 것이다. 카나안 땅에 들어와서까지도 여전히 그 명령에는 부분적으로만 순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과 롯의 가축의 목자들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비로소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때서야 비로소 온전한 성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창 13:11).
성경적 성별이 배제된 상태에서 우애를 논하고, 행복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옳지 않은 일이다. 성별이 없이는 종교놀이만 하게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국을 세우실 때,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을 심판하신 이후에 세우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땅에서 악인들을 완전히 분리시키지 않은 상황에서 평화와 사랑과 화해를 이루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헛된 종교를 붙들며 구원받지 않은 채 살아가는 종교인들과 세상으로부터 성별하지 않고서는 결코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로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계속되는 “기독교” 종교인들의 어리석은 주장들을 보라. 손인웅 목사(덕수교회)는 “종교와 종파를 초월해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나눔을 실천한다면 행복한 나라와 민족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정익 목사(신촌성결교회)는 “민족이 위기에 빠지면 일어서는 사람들이 바로 종교인들이다... 앞으로도 여러 종파의 종교인들을 초청하는 이런 자리를 자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그렇다! 사실 이들은 “진정한 종교인”도 아니고, 더군다나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실행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스스로 종교적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자들이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헛된 종교인들이었다(약 1:26). 결코 하나님께서는 그런 쭉정이들을 심판 없이 내버려 두지는 않으실 것이다(시 1:4-6, 마 3:12).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