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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방언” 가르친 거짓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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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7월호>
성령운동을 복음주의 신학적 입장에서 평가해 교회에 나누고자 설립되었다는 국제성령신학연구원이 지난 5월 28일 서울 종로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관에서 ‘성경이 말하는 방언’을 주제로 제2회 학술세미나를 열고, 첨예한 논쟁을 거듭해온 방언에 대해 성경적인(?) 고찰을 했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언론에 따르면, 이날 발제자로는 방언 관련 여러 논문을 발표한 바 있고 오순절은사주의의 대표적인 신학자로 알려진 로버트 멘지즈 박사가 초청되었는데, 그는 신약을 중심으로 예수님과 방언을 연결 짓는 성경적(?) 근거를 제시했다고 한다. 멘지즈 박사는 특히 누가복음 10:21과 마가복음 16:17,18을 인용하며 본인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했는데, 그의 주장을 읽다 보면 그가 성경을 몰라도 너무도 모르며, 아무 구절이나 가져다가 억지로 꿰어 맞춘 “궤변”을 진리인 것처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음은 그가 누가복음 10:21을 설명한 방식이다.“누가복음 10:21에서 예수님을 묘사한 구절인 ‘성령 안에서 그가 기뻐하였다’는 베드로가 사도행전 2:26에서 인용한 시편 16:9의 표현 ‘내 혀가 기뻐하나이다’와 문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를 통해 누가와 그의 공동체가 예수님의 방언을 포함한 영적 찬양을 메시아 예언 중 한 단면이 성취된 것으로 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멘지즈 박사가 방언에 관한 근거 구절로 운을 뗀 누가복음 10:21은 다음과 같다. 『바로 그 시간에 예수께서는 영으로 기뻐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오 하늘과 땅의 주이신 아버지시여, 이런 일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기들에게는 나타내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그러하옵니다. 아버지시여, 이는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버지 보시기에 선함이니이다』(눅 10:21). 누가복음의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 때 “기뻐하신” 유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변개된 개역성경은 주님께서 『영으로 기뻐하시며』라고 하신 것을 “성령으로 기뻐하사”라고 변개시켰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영과 혼과 몸을 지니신 완벽한 인간이셨음을 무시하고 『영』을 “성령”으로 무작정 변개해 버린 경우이다. 누가복음 10:21은 주님께서 영으로 기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지상 사역 가운데 기뻐하신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된 진리가 거부당했을 때 아버지께서 그 진리를 거부한 자들에게 이후로는 의도적으로 진리를 “숨기신” 일이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침례인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거부했을 때, 아버지께서는 이후로 그들에게서 진리를 숨겨 버리시고, 반대로 세리들과 창녀들과 어부들에게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을 때 더 많은 것들을 보여 주셨는데, 예수님께는 이것이 그분의 지상 사역 동안 느끼셨던 유일한 기쁨이었다. 보다시피 누가복음의 이 구절은 방언과 전혀 상관이 없는데도 멘지즈 박사는 이 구절을 방언을 설명하기 위한 구절로 삼아 버린 것이다.
그리고 멘지즈 박사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뻐하셨다는 구절을 사도행전 2:26에 인용된 시편 16:9과 연결시켰다. 『25 이는 다윗이 그에 관하여 말하기를 ‘내가 주를 항상 내 앞에서 미리 뵈었으니 이는 그분께서 내 오른편에 계시어 나로 요동치 못하게 하심이라. 26 그러므로 내 마음이 즐거워하였고 내 혀가 기뻐하였으며 또한 나의 육체도 소망 속에 안식하리니 27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며 또 주의 거룩하신 분으로 썩어짐을 보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행 2:25-27). 『8 내가 주를 항상 내 앞에 모셨도다. 주께서 내 오른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9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이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소망 가운데 안식하리니 10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하신 분으로 썩어짐을 보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 16:8-10).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날 천하각국에서 모여 든 신앙심 깊은 유대인들에게 시편 16편을 인용하여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셨음을 알려 준 것이었다. 베드로는 다윗이 『미리 앞을 내다봄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말했다고 했다(행 2:31). 멘지즈가 인용한 사도행전 2:26은 문맥적으로 볼 때 그 어디에도 “방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사도행전 2:4에 “방언들”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메시아의 부활에 관한 시편의 예언을 방언에 연결시켜 버리는 어이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진리”를 듣기 위해 먼 타국에서 초청한 “고명하신 박사님”의 성경 실력이다.
멘지즈 박사는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0:21에서 영으로 기뻐하신 일을 사도행전 2:26에서 주님의 혀가 기뻐하신 것과 “문학적으로” 연결시킨 궤변을 참석자들에게 토해 내 버린 것인데, 성경을 가지고서 “문학” 운운한 그는 최소한 문학조차도 얘기할 능력이 없는 인물임이 분명하다. 영으로 기뻐하신 것이 혀가 기뻐한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주님께서 “혀”(tongue)로 기뻐하셨으니 그것이 주님께서 “방언”(tongue)을 하셨다는 증거라는 것이며, 그것이 사도행전 2장에서 “방언들”(tongues)이 말해진 상황과 맞아떨어진다는 것이 아닌가? 그곳에 참석한 자들은 멘지즈 “박사님”의 “현명하고” “총명한” 궤변을 듣고서 그것이 진리인 줄로 알고 “알아 가는 기쁨”에 고개를 끄덕여 가며 좋아했을 것 아닌가? 『자기 자신의 눈에 현명하다 하고 자기 자신이 보기에 총명하다 하는 자들에게 화로다!』(사 5:21)
멘지즈 박사는 그 뒤 “예수님의 방언”을 이야기하며 마가복음 16:17로 논의를 옮겨 갔다. “이 주장의 귀결(방언이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특징짓는다)은 만약 마가복음 16:17의 예수님의 말씀이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전승으로 증명된다면 한층 강화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은 예수가 방언을 특별히 언급한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에 이 본문은 방언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과 그분의 영성을 우리가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본문이 아닐 수 없다... 방언을 모든 제자에게 가능한 표적으로 말씀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라고 했다.
멘지즈 박사는 예수님의 초림을 기록한 사복음서 어디에도 주님께서 방언을 하셨다는 기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방언이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특징짓는다고 했다. 성경 어디에도 주님께서 방언을 하셨다는 기록이 없다면 방언을 하시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그는 왜 방언이 예수님의 기도 생활을 특징짓는다고 주장한 것인가? 또한 그는 방언을 모든 제자에게 가능한 표적으로 말씀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말함으로써 오늘날에도 “자칭 제자들”이 방언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그의 책에서도 방언을 모든 신자가 받을 수 있다고 했다.1)
그렇다면 그가 방언의 근거로 삼은 마가복음 16장의 구절들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14 그후 열한 명이 앉아 식사할 때에, 주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믿음 없음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그들이 주께서 살아나신 후 주를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15 또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믿지 않는 자는 정죄함을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들이 따르리니, 즉 내 이름으로 그들이 마귀들을 쫓아내고 또 새 방언들로 말하리라. 18 그들은 뱀들을 집을 것이요, 어떤 독을 마실지라도 결코 해를 입지 않을 것이며, 병자에게 안수하면 그들이 회복되리라.”고 하시더라. 19 그리하여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후, 하늘로 들리움을 받아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더라. 20 그후 제자들이 나가서 곳곳마다 전파하니, 주께서 그들과 함께 역사하시고, 또 따르는 표적들로 말씀을 확고하게 하시더라. 아멘』(막 16:14-20).
17절에서 주님께서 『이러한 표적들』이 따르리라고 말씀하신 『믿는 자들』은 일차적으로는 14절의 “열한 명의 제자들”이다. 『그들』(15절)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밑줄 친 15절부터 18절까지의 내용이며, 주님께서는 분명히 『너희는』(곧 “너희 열한 명의 제자들은”)으로 그 말씀을 시작하셨다. 위의 마가복음 말씀에서 『이러한 표적들』은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고전 1:22)라는 분명한 말씀에 따라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다. 성경은 『방언들은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고전 14:22)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므로, 이 말씀을 고린도전서 1:22과 연결시켜 보면 방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뜻 없는 소리가 아닌 “외국어”였다(행 2:6). 위에 인용한 마가복음 16:20은 『그후 제자들이 나가서 곳곳마다 전파하니, 주께서 그들과 함께 역사하시고, 또 따르는 표적들로 말씀을 확고하게 하시더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제자들이 표적을 행하며 주님을 증거한 내용은 모두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증거들을 보면 『이러한 표적들』이 “사도들”은 물론, 그들의 “회심자들”에게도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이 임하였으며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들과 표적들이 행해지더라』(행 2:43). 『그때 시몬 자신도 믿고 침례를 받은 후에 빌립과 꾸준히 함께 지내며 기적들과 표적들이 행해짐을 보고 놀라더라』(행 8:13). 『그후 그들은 오랜 기간을 머물며 주 안에서 담대하게 말하니 주께서는 자신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고 또한 표적들과 이적들을 주셔서 그들[바울과 바나바]의 손으로 행하게 하시더라』(행 14:3).
말하자면 방언과 신유 같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들”은 모든 사도들이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그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에만 존재하며, 그 이후로는 사라지게 된다. 사도행전에서 마가복음 16장의 표적들이 마지막으로 나타난 것은 바울이 독사에게 물렸지만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은 사도행전 28:3-5이었으며(『그들은 뱀들을 집을 것이요, 어떤 독을 마실지라도 결코 해를 입지 않을 것이며』 - 막 16:18), 이때가 A.D. 63년경이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주 앓는 질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하고(딤전 5:23), 트로피모는 몸이 아파서 밀레토에 남겨 두어야 했던 것은(딤후 4:20) A.D. 65-68년경이었다. 따라서 최소한 사도행전 28장의 A.D. 63년경 이후로는 『사도의 표적들』(고후 12:12)이 사라져 갔음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8에 『방언들이라도 그치게 될 것이며』라고 기록했다. 방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이었는데,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사도행전 28장에서 바울의 설득을 최종적으로 거부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보내어졌을 때에(행 28:28) 유대인들을 위한 방언은 그치게 되었다.
표적이 아닌 “지혜를 찾는 헬라인들”로(고전 1:22) 대변되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현 교회 시대에는 이방인들에게 결코 방언의 표적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확증하지 않는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존하신 한 권의 바른 성경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 복음으로 온 세상에 전파된다. 오순절은사주의자들의 아무도 못 알아듣는 뜻 없는 소리가 아닌 매우 분명한 성경 말씀으로 그 “하나님의 말씀들”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는 것이다. BB
주석)-------------------------
1) 윌리엄 W. 멘지즈, 로버트 P. 멘지즈 공저, <오순절 해석학의 관점에서 본 성령과 능력>
(군포: 한세대학교출판부, 2005), p.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