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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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주의의 치유와 방언은 성경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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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10월호>

은사주의자들이 “광적으로” 추구하는 은사는 “치유”와 “방언”이다. 그들에게 “은사”가 둘밖에 없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두 은사를 열렬히 원하며 “실행”(?)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보다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그처럼 거짓 은사를 자랑하는 자들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정죄한다. 『거짓 은사를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누구나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잠언 25:14). 은사주의자들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것 같은 “집회의 구름”을 몰고 다니지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비”를 내림으로써 마지막 때의 교회들을 성경적으로 돌이키게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열매는 고사하고 “배교한 교회들”을 그들의 거짓 교리로 완전히 물들여 버렸다. 이것은 은사주의자들의 실행이 “열매 맺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고 땅을 적셔서 싹을 내어 뿌리는 자에게 씨를 주고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내 말도 그러하나니 그것은 내게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을 이루며, 내가 보내어 이루려 하는 일에서 번성할 것이니라』(사 55:10,11).

“치유”와 “방언”은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표적”이며, 표적은 “유대인들”이 “직접 확인하고 믿도록” 주님께서 주신 증거의 방편이다. 주님께서는 이 표적과 관련하여 출애굽 당시 모세에게 뱀으로 변한 막대기의 표적과 문둥병에 걸린 손의 표적을 주시면서 “표적의 소리”라는 독특한 표현을 쓰셨다.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고 처음 표적의 소리에 경청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나중 표적의 소리를 믿으리라』(출 4:8). 여기서 『표적의 소리』는 “표적” 그 자체가 하나님의 메시지로서의 기능이 있음을 뜻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믿어야 했다.

초림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종종 표적을 구했다(마 12:38; 16:1, 막 8:11, 눅 11:16). 이는 그들이 표적으로 시작된 민족으로서(출 4:1-8),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민족적 습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즉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지만』(고전 1:22)이란 말씀 그대로였던 것이다. 주님께서도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란 점을 인정하시어 『너희는 표적들과 이적들을 보지 아니하고는 전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8)라고 하셨다. 왕국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치유의 표적”을 행하신 것도 “유대인의 왕”으로서 자신의 백성인 “유대인들”이 주님을 그들의 메시아로 영접하게 하시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또 왕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가운데 모든 질병과 모든 허약함을 고쳐 주시더라』(마 4:23). 이와 같은 표적을 유대인도 아닌 이방인이 구하거나 실행한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봤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이 교회 시대에 은사주의자들이 행하는 “치유”와 “방언”은 성경적 근거가 전무한 마귀적 실행에 불과한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이 실행하는 “치유”의 문제점은 그들이 사도들의 시대를 끝으로 사라져 버린 “치유자”(healer)를 구하고 있다는 데 있다. “치유자”는 사도들의 시대에 주어진 은사들 가운데 하나로서, 하나님께서 그때 당시 교회 안에 특별히 세우신 사람들에 속해 있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들이요, 둘째는 선지자들이요, 셋째는 교사들이요, 그 다음은 기적들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들이며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여러 가지 방언들이라』(고전 12:28). 여기서 “병 고치는 은사”는 그것을 실행하는 “치유자”를 일컫는 것으로, 이 “치유의 은사”는 사도 바울과 함께 끝이 났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뒤에 여전히 “유대인들”을 다루던 시기에 자신들의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최종적인 거부가 분명해졌고,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전파되는(행 28:28) 교회 시대가 밝아 왔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주신 “최후의 표적”은 『선지자 요나의 표적』(마 12:39)이라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는데(마 12:40), 이로써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에 사도들의 증거는 문자 그대로 주님의 부활에 집중되었다(행 1:21,22; 2:31,32; 3:15; 4:10,33; 5:29-32; 10:39-41; 13:28-31; 17:1-4,31,32; 22:6-8; 26:19-23). 이 “최후의 표적”을 유대인들이 거부했기에,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보여 줄 표적이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

이처럼 유대인들의 거부로 사도들의 시대가 저물고 교회 시대가 펼쳐지기 시작할 때, 유대인들을 위해 주어졌던 “치유”와 “방언”의 표적 또한 중단되기 시작했으며, 이 점은 “성경”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증거를 보면 분명해진다. 1 『방언들이라도 그치게 될 것이며』(고전 13:8, A.D. 59년). 2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앓는 질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 A.D. 65-68년). 3 『트로피모는 몸이 아파서 밀레토에 남겨 두었느니라』(딤후 4:20, A.D. 68년).

말하자면 “방언의 표적”은 “A.D. 56년”(행 19:6)에서 “A.D. 57-59년”(고전 14장)까지는 성경에 나타나나, “A.D. 57-59년”(고린도전서) 이후에 기록된 기타 신약 서신서들에는 방언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사도 바울이 독사에게 물렸지만 “사도”이기에 보호받았던 “A.D. 62년”(행 28장)을 끝으로 성경에 표적들과 이적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 “A.D. 65-68년”경에 기록된 “디모데전후서”를 통해서 바울의 “치유 은사”가 중단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딤전 5:23, 딤후 4:20), 즉 사도로서의 사역이 말년에 접어든 바울은 디모데도 트로피모도 치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적어도 “A.D. 65-68년”에는 표적이 거의 사라졌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들이 되라.』(고전 4:16),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전 11:1)라고 했다. “바울의 증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본이다. “성경”에 기록된 그의 증거를 통해 명확히 알 수 있는데도 은사주의자들은 여전히 “치유자”를 추구하고 있다. 은사주의자들이 “사도들”과 다른 점은 사도들은 환자의 믿음과 관계없이 치유할 수 있었던 반면, 은사주의자들은 “불발된 치유”의 원인을 “환자의 믿음 없음”에 돌린다는 데 있다. 이 점은 은사주의자들이 성령님께서 세우신 “치유자”가 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증거 중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치유하실 수 있으며, 예수님과 사도들은 단 한 번도 치유에 실패한 적이 없다. “병든 자가 믿음이 없어서, 믿음이 부족해서”라는 “변명”은 결코 하지 않았다. 성경에 나오는 환자들은 믿음이 없어도 치유를 받았고(막 6:5,6),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도 치유 받았으며(막 2:5), “치유자”를 만질 수 있는 거리에만 있으면(행 5:16) 그 “치유자”가 환자를 위해 기도했건 안 했건 모두 치유를 받았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치유를 의심하지 않는다. 의인의 효과적이고 열렬한 기도에 역사하는 힘이 많은 것을 알기에 치유를 위해서 서로 기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약 5:16). 하지만 사도 바울과 같이 “치유의 은사”를 가진 “치유자”가 여전히 교회 안에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치유”는 성경적이지만, 치유를 행한다는 “치유자”는 지금 이 교회 시대에는 비성경적인 것이다.

“방언”은 “외국어를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 일시적으로 그 외국어를 초자연적으로 이해하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를 확증해 주던 사도 시대의 표적”이었다. 헬라어로는 “글로싸”(γλῶσσα, 혀, 언어)라 하고, 영어로는 “텅”(tongue, 혀, 언어)이라 하며, 우리말로는 “방언”(方言, 특정 지방의 말)이라 하는 그것은 “인간의 혀로 말하는 특정 지방의 언어”를 말할 줄 아는 은사였다. 이 점과 관련하여 사도행전 2:8에서는 『각 사람이... 태어난 곳의 고유 언어』라고 설명한다. 성경적인 방언은 특정 지방의 고유 언어로서 인간의 언어이지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지껄이는 것과 같은 혼란스러운 소리가 아니다.

은사로서의 “방언”은 “치유”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이었으며, 방언의 기원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을 위해 인용한 “이사야 28:11,12”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그가 더듬는 입술과 다른 언어로 이 백성[유대인!]에게 말씀하실 것임이라.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것이 너희가 피곤한 자로 쉬게 하는 쉼이며, 이것이 기운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 하셨으나, 그들이 들으려 하지 아니하였도다.』 바울은 이사야서의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방언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임을 분명히 했다. 『율법에 기록되기를 “주가 말하노라. 내가 이 백성[유대인!]에게 다른 방언들과 다른 입술들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말할 것이지만 그들은 그 모든 것으로도 내게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방언들은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이지만』(고전 14:21,22). 이처럼 “방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사도행전에는 “방언”이 주어진 동일한 목적이 다음과 같이 실제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1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아이셨음을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행 2:5)에게 증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사도행전 2장의 그 유대인들은 『각 사람이... 태어난 곳의 고유 언어로 말하는 것을』(행 2:8) 듣고 놀라워하며 선포된 메시지를 믿게 되었다. 2 “사도행전 10장의 방언”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던 코넬료를 위시한 이방인들이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심으로써 하게 되었는데, 이 방언은 그 자리에 있던 베드로를 포함한 “유대인들”에게 이제부터는 이방인들도 그들과 동일한 『성령의 선물』(행 2:38)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한 표적으로 사용되었다. 3 “사도행전 19장의 방언”은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던 아폴로가 사역한 에베소(행 18:24,25)에 도착한 바울이 요한의 침례만 알고 성령에 대해서는 듣지도 못한 어떤 “유대인” 제자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 제자들 위에 임하시어 그들이 방언들로 말했던 때의 일이다. 이때의 방언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바울의 복음이 아폴로의 것을 폐지시킴을 그 자리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증명하기 위해 행해졌다.

고린도전서 14장은 『알지 못하는 방언[an unknown tongue]』(고전 14:2)을 언급하는데, 문자 그대로 교회 회중에게 “알려지지 않았기에”(unknown) 알지 못하는 방언이다. 방언을 말하는 당사자는 물론, 회중에 속한 어떤 사람도 모르나 뜻을 지닌 “인간의 언어”이기에 “통역”이 필요했다(고전 14:13,27). 방언은 뜻 없는 소리가 아니다!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이 성령 침례의 대표적인 외적 증거라고 말하지만, 성령 침례는 그들의 주장처럼 죄인이 “거듭난 뒤” 성령을 또 받는 일이 아니라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날 때(!)” 『한 성령에 의하여... 한 몸[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침례를』(고전 12:13) 받는 일을 뜻한다. 성령 침례는 방언이 아닌 “거듭남”과 관련이 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 무지한 은사주의자들에게서 성령의 은사에 관해서 배울 점은 아무것도 없다. 마귀가 준 거짓 은사로 가장한 그들은 신약교회사에 등장한 『기만하는 일꾼들』(고후 11:13)에 불과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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