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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복음주의” 코미디언들의 로잔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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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11월호>

지난 9월에 인천 송도에서 제4차 로잔대회가 열렸다. 로잔운동은 WCC 등의 활동으로 인해 복음이 마치 인본주의와 동의어처럼 여겨지는 것에 대항하여 일어난 운동으로, 빌리 그래함, 존 스토트 등의 신복음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어 “세계복음화라는 공동의 과업을 위해 모든 복음주의자를 하나로 결집”하자는 슬로건을 내걺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들과 뜻을 모은 “기독교계의 리더”들이 최초로 모임을 개최한 것은 1974년에 스위스 로잔에서였고, 1989년에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2010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각각 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제3차 대회로부터 14년 만인 올해에 서울-인천에서 네 번째 로잔대회가 열렸던 것이다.


이번 대회의 정신이 집약되어 작성된 “서울선언문”의 내용 가운데는 특별히 귀추가 주목되었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동성애”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간의 로잔대회들에서는 “동성혼 합법화 흐름”이나 “교회 내의 동성애” 등에 대한 명확한 규탄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탓에 대회 전부터 이미 이에 대한 거센 비판 여론이 있었다. 교계의 많은 인사들은 “차별금지법” 등의 말을 직접적으로 넣어야 한다는 “훈수”를 두기도 했다.


여론을 잘 알고 있었던 이번 대회의 공동조직위원장인 이재훈 목사(온누리교회)는 기독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누구보다도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임을 밝히면서, “이번 대회에서 그 문제에 대한 명백한 입장이 나올 것”이니 지켜봐 달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막상 대회가 시작되자 판세는 이 목사가 공언한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듯했다. 안 그래도 컸던 우려의 목소리를 더욱 증폭시켰던 사고가 하나 있었는데, 실수로 아직 수정을 거치지 않은 선언문 초안이 공개되어 버린 일이었다.


초안의 내용 중 특히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이것이었다. “기독교인은 유혹에 저항하고 욕망과 행동 모두에서 성적 거룩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성경의 주장은 동성애적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성애적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나 우리는 동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기독교인들이 무지와 편견으로 인해 많은 지역 교회에서 도전에 직면하며, 그 결과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차별과 불의를 겪어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를 회개하며, 이로 인해 그리스도의 몸 된 형제자매들에게 끼친 해악을 애통해한다.” 이 선언문 초안은 동성애를 이성애와 같은 선상에 올려 둠으로써 “물타기”를 시도한 것도 모자라서 동성애자들을 “차별”한 교인들을 정죄하기까지 했으니 뭇매를 맞기에 충분했다.


하루 만에 수정을 거친 선언문에는 “무지와 편견,” “차별과 불의” 등의 표현이 빠졌으며, “(동성애자) 형제자매들에게 끼친 해악”을 회개한다는 내용이 “(동성애자) 형제자매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부족”을 회개한다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해당 조치에 박수를 보낸 이들도 있었지만, 교계 내의 보수와 진보 세력 양쪽으로부터의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다. 누구나 알 수 있다시피 어느 쪽도 만족할 수 없는 서술이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수정된 서울선언문에 만족하지 못한 양쪽 진영 모두가 이를 “복음의 왜곡”으로 보고 비판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반동성애기독시민연대 공동대표 주요셉 목사는 서울선언문이 그간 동성애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냈던 사람들을 사랑이 없는 사람들로 매도한 점에 대해 “이는 성경 말씀을 변개시킨 복음의 변질과 타락이기에 결코 용납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주 목사는 해당 부분이 “복음”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반면 교계의 진보 진영은 제1차 대회 때 결정되었던 로잔언약의 5항의 내용, 즉 “우리가 그동안 억압받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등한시 여긴 것과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 것을 회개한다.”를 언급하면서 원래의 초안 작성자들이 바로 그 정신을 담아 작성한 초안을 뭉개고 한국 교계가 자의적으로 선언문을 고친 것에 대한 유감을 표했다. 즉 한국 교계가 국제적인 “복음주의”의 기준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마치 로잔대회의 핵심인 양 논의되는 동성애에 관한 이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는 점을 누구나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진짜 문제”는 스스로를 “(신)복음주의자”로 칭하는 자들이 “복음화”를 위해 로잔대회를 개최했음에도, 또한 로잔대회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내놓는 사람들도 “복음”에 대해 논한다고 하는데도, 정작 “복음”이 뭔지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데 있다.


묶음 개체입니다.


이 시대에 전파되는 복음이란 우리의 죄들로 인해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셋째 날에 살아나셨다는 기쁜 소식이다(고전 15:3,4). 이 짧은 문장이면 복음에 대한 정의가 끝난다. 이 단순한 진리를 믿기만 하면 죄인의 혼은 지옥행을 면하고 구원받는다. “동성애 반대”나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 따위는 여기에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런 것들을 억지로 끼워 넣으면 저주받을 다른 복음이 되며(고후 11:4, 갈 1:6-8), 은혜를 통한 구원을 부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롬 11:6). 이런 기본적인 진리에조차 무지한 자들이 “복음주의 대회”였던 로잔대회를 둘러싸고 한마디씩 떠들었던 것이다. 웃기지도 않는 코미디 같은 일이지 않은가?

위와 같은 문제의 뿌리는 로잔운동을 기획했던 빌리 그래함과 같은 신복음주의자들에게 있다. 그래함은 본래 근본주의적 색채를 띤 복음전도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복음전도집회에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과정에서 자유주의자들이나 로마카톨릭 등과의 악한 사귐을 이어갔고(고전 15:33), 결국 배교해 버리고 말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함이 이단 종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 위해 “허들을 낮췄을” 뿐이지 변질된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1984년 빌리 그래함은 벤쿠버에서 있었던 교황의 메시지를 듣고는 “내가 들었던 것 가운데 거의 으뜸으로 복음적인 연설 중 하나다.”라는 말을 한 바 있다. 그 일보다 앞선 1961년에 그가 이미 미국 루터교회 문서사역 담당자와의 인터뷰에서 “저는 이 아이들에게 기적이 일어나서 그 아이들이 중생할 수 있음을, 즉 유아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라고 이야기했던 것을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그래함은 “복음”의 범주 안에 로마카톨릭식 행위 구원 체계도 들어갈 수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함은 <킹제임스성경>과 함께 로마카톨릭 성경인 NIV와 리빙 바이블을 사용했기에 그와 같은 일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하나의 최종권위가 없었고, 따라서 난립된 권위들로부터의 혼란(고전 14:33)을 피할 길이 없었다. 가령 요한복음 3:36에서 <킹제임스성경>은 아들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지만, NIV와 리빙 바이블은 각각 “거부하는” 자들과 “믿고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 그렇다고 말한다. 상식적으로 “구원받는 방법”으로서 “믿음”과 “복종”이 양립할 수 있는가? 그러나 그래함은 그 모두를 받아들였다. 그가 어떤 때는 옳은 말을, 어떤 때는 헛소리를 하는 것 같았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복음,” “중생,” “구원” 등의 단어들을 말하더라도 그 말이 “실제로” 무슨 뜻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함의 후예들이 내놓은 이번 선언문 또한 마찬가지다. 심지어 선언문에 성경의 무오함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을지라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 성경이 실제로 어떤 성경인지, 그러니까 개역개정판인지, 제1차 대회 때 사용했던 RSV인지,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성경인지에 대해 그들은 밝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울선언문에 인용된 영문 구절들과 한글 구절들을 비교해 보기만 해도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니, 이런 질문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최종권위가 없는 자들이 모여 만드는 공론(公論)의 장은 그 옛날 로마 카톨릭의 에큐메니컬 공회마냥 공론(空論)의 장에 불과하다. 그들의 서울선언문에는 “우리는 니케아 신조에 의거하여 교회가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임을 고백한다.”라는 내용까지 있으니, 그런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다고 하겠다.


좌우를 막론하고 로잔대회에 대해서 평하는 교계의 논객들도 마찬가지다. “근본주의자”를 표방하는 정동수도 이 판에 뛰어들어서는 “킹제임스성경과 개역성경은 많은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한 가지로 볼 수 있다.”라고 망언을 남발하면서 서울선언문의 성경 해석론을 공격했는데, 이로써 그는 스스로 최종권위에 대한 혼미스럽기 그지없는 인식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들의 말은 어떤 시비도 가릴 수 없으며 모두 공허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로잔운동이 자신들의 “편”인지를 판단하는 것뿐이다. 마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대립하였던 것처럼 말이다(행 23:6-9). 그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까닭은 그들 자신에게 빛이 없기 때문이다(사 8:20). 하나님께서 한 가지 성경만을 쓰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목사입네 하고 나서는 자들은 그런 어둠 가운데서 헤매면서도 “우리는 본다.”라고 말함으로써 스스로 정죄를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요 9:41).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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