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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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땅에 복음의 씨앗을 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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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07월호>

20여 년 전 필자는 필리핀 루손 섬 내륙 지방을 다섯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산속의 원주민들을 만나 구령하기 위해서였다. 세 번째 방문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한 마부 청년의 도움으로 10시간 이상의 산행과 도하 끝에 그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미 십수 년 전에 선교라는 명목으로 그들을 방문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은 복음이 아니라 몸에 걸칠 옷가지와 먹을 음식, 상처를 치료할 약품 몇 가지뿐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1885년 당시 인천 제물포에 도착한 두 명의 미국 선교사가 있었는데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였다. 그들 역시 근대식 학교와 병원, 고아원 등을 세우면서 구한말 조선인들을 위해 사회적인 공헌만 남기고 자선만 베풀었을 뿐 성경적인 복음과 진리에 따른 어떤 열매도 남기지 못했다. 이런 것들은 결코 성경이 말씀하는 선교가 아니다!

캄보디아에서 다년간 직장 생활을 했던 한 형제의 제안으로, 작년에 몇 명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캄보디아를 방문했었다. ‘그저 단순한 여행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보여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주님께서는 교회 사역에 대한 시야를 넓혀 주셨고 해외 선교에 대한 필요성도 절감하게 하셨다. 더 나아가 이 마지막 교회 시대에 복음과 진리를 위해 헌신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깊이 숙고해 봐야 할 보다 더 중요한 현실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성경적인 믿음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은, 이곳 지상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꾼보다 마귀가 사용하는 거짓 일꾼이 더 많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교회보다는 마귀에게 점령당한 거짓 교회가 비교가 안 될 만큼 더 많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특히 해외 선교에 관한 한, 약 2천 년의 교회사에서 교회들이 마귀에게 어떤 식으로 미혹되고 유린당해 왔는가를 반드시 알고 시작해야 한다.

첫 번째로 방문한 도시 시엠립은 앙코르와트로 가는 관문으로서 동양 최대의 호수 톤레삽과 메콩 강을 끼고 있는 고대 유적지다. 세계 여러 나라의 여행객들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한 옛 크메르 제국의 유적들과 자연 경관을 보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온다. 현재의 캄보디아는 한때 프랑스 식민지였던 관계로 로마카톨릭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고 불교의 전통 역시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가장 큰 복병은 따로 있었으니, 곧 “초교파적인 선교 사업”을 시행하는 한국의 교단 교회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시엠립 곳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마다 현지인들은 우리를 “사회 복음”을 전하러 다니는 선교사들로 오해하곤 했다. 어떤 수상가옥 마을에서는 쪽배를 타고 다니면서 라면과 생필품을 나눠 주는 선교사들도 있다고 했다.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얻거나 코리안 드림을 실현하기 위해서 한인 선교사가 사역하는 교회나 선교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캄보디아인들이 많다는 말도 들었다. 말하자면 이들 교회들은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현지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교회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시엠립 도심에서 설교를 하고 전도지를 나누어 주며 구령하는 모습을 처음 본 어떤 한국인 부부(남편은 모 교회 장로임)가 우리 일행을 그들의 가게로 초대했는데, 그들의 말에 따르면 한인 교회에 다니는 캄보디아인들 대부분이 입으로는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임종 때 가서는 부처를 끌어안고 죽는다고 했다. 그 말은 불교에 젖어 있는 캄보디아인들을 회심시키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현재 한국 교회들이 행하는 선교의 실상이 어떤지도 잘 보여 주고 있다. 한인 선교사들이 행하는 선교는 국내 사정과 크게 다를 바 없었는데, 그들 역시 과거에 사회 복음을 들고 들어온 구한말 서구 선교사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었던 것이다. 물질적인 필요가 절실한 현지인들에게는 한국 교회들이 펼치는 구제와 봉사, 문맹 퇴치를 위한 교육 사업이 크게 인기를 누릴지 몰라도, 그 혼들은 여전히 지옥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단순히 선교사가 들어가서 교회들을 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은혜의 복음을 통해 잃어버린 혼들을 구원시키지 못한다면, 선교는 그 본래 목적을 상실하고 만다.

교회 건물들이 쉽게 눈에 띄고 상당수의 선교사들이 들어가 있다 해도 캄보디아는 여전히 “복음의 불모지”다. 성경대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 “배교한 기독교”는 “이교도”나 다름없다. 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상당수의 캄보디아인들은 죽을 때 부처를 끌어안고 죽는 것인가? 복음의 능력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요 3:5). 평생 동안 교회에 다녔다 해도 거듭나지 못하면 여전히 마귀의 자녀라는 사실을 그들은 인지하지 못한다. 이 모든 책임은, 세례를 받고 교회 회원이 된 교인들을 구원받은 것으로 간주하고, 값없이 주어지는 영생을 종교적인 열성이나 행위로 얻을 수 있다고 거짓말하는 거짓 선교사와 목사들에게 있다. 『그러므로 사탄의 종들이 의의 종으로 가장한다 하더라도 큰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위대로 될 것이니라』(고후 11:15). 선교 역사를 보면 사탄의 종들이 성경대로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들보다 먼저 들어가서 그 나라를 영적으로 황폐화시킨 경우가 많았다. 특히 로마카톨릭이 그러했는데, 그들은 『한 사람의 개종자를 얻으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얻고 나면 그를... 두 배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마 23:15) 만들었던 것이다. 변개된 성경과 거짓 교리와 부패한 누룩이 “선교지”를 선점한 것이므로, 선교에 헌신한 하나님의 종들은 반드시 이런 현실을 유념해야 한다.

지역 교회는 국내 사역뿐 아니라 해외 선교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현대 선교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과거 18,19세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해외”라는 개념이 완전히 바뀌었다. 조지 휫필드나 요한 웨슬리는 영국과 북아메리카를 오가며 복음을 전파했는데, 당시의 복음전파자들은 대서양을 건너는 데만도 수개월이 소요되었다. 그때만 해도 선교사들이 해외 선교지로 이동하는 것 자체가 쉬운 여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주일 사이에도 여러 국가를 방문할 수 있다. 동남아시아, 특히 인도차이나반도의 국가들은 결코 먼 나라들이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어떤 성도에게 해외에 있는 어떤 민족이나 국가에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 주셨음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리상의 문제가 아니라 선교에 대한 무관심이나 선교의 사명에 대한 회피 또는 마귀가 주는 두려움 때문이다.

1863년에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기 시작했던 캄보디아가 완전히 독립한 것은 1953년이었다. 1970년에는 친미 정권이 들어서면서 오랜 내전에 시달렸고, 1975년에는 친미 정권이 붕괴되면서 폴 포트(Pol Pot)를 중심으로 한 크메르루즈 공산 정권이 들어섰다. 이로써 1975년 4월부터 1979년 1월까지 “킬링필드”(Killing Fields)로 알려진 대규모 학살이 벌어져 200만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3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고 현지인들은 증언한다. 캄보디아는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 국토 면적의 약 1.8배이지만, 인구는 우리나라보다 약 3,500만 명이 적은 1,640만 명 남짓하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400달러(우리나라는 약 32,000달러임)에도 못 미칠 만큼 아시아의 최빈국 중 하나이다. 캄보디아는 여전히 사회주의 독재 국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일행에게 공개적으로 거리설교하고 전도지를 나눠 주며 구령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다. 우리는 도심지와 시장, 학교, 마을 등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캄보디아 역시 유럽인, 특히 프랑스인이 선호하는 여행지이기에 영어 교육 열풍이 한국보다 더 뜨거웠다. 중학생 수준이면 대개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고, 설령 소통이 힘든 상황일지라도 미리 준비해 간 “크메르어(캄보디아어) 앱”이 있어서 복음을 전파하는 데는 문제가 안 되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단 한 번의 방해나 저지도 없었으며, 현지 경찰관들조차 우리를 보고서도 그냥 지나쳐 버렸다. 도심지에서는 유럽 여러 나라의 많은 여행객들이 우리 설교에 귀를 기울이면서 놀라워했다. 한 인도 여행객은 설교 도중에 다가와서 자신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소개하며 반가워했고, 인도에도 와 달라면서 주소와 연락처를 남기고 가기도 했다. 시장 상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는데, 진지하게 영접기도를 따라 하는 광경은 우리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우리를 태워 준 승합차 기사는 우리가 전한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잠시 영접기도 하는 것을 주저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구원받기가 이렇게 쉬운지 몰랐다는 것 때문이었다. 어느 한인 교포는 십수 년간 캄보디아에 살면서 이렇게 성경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면서, 한국에 있는 친지들에게 우리 교회를 소개하고 싶다기에 우리는 전도지와 책자를 건네주었다.

C.T. 스터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선교의 영이다!”라고 말했다. 복음은 항상 동에서 서로 전파되어 왔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극동 아시아에 위치한 우리나라에 하나님께서 바른 성경을 주시고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을 일으켜 주신 목적 속에는 캄보디아와 같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선교의 책임도 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물론 우리는 국내에서의 사역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 땅에도 성경대로 믿는 교회들이 더 많이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국내 사역의 기반을 견고히 다져 나가고, 그와 동시에 해외 선교를 위해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행 16:9,10)을 보고 유럽 선교의 첫발을 내딛었고, 스코틀랜드 출신의 올림픽 육상 금메달리스트인 에릭 리델(Eric Liddell)은 어린 시절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중국 농부들의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그의 남은 생애를 중국 선교사로 헌신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무엇을 보여 주고 계신가?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어떤 “환상”을 갖고 있는가? 우리는 이 마지막 교회 시대에 그 지역이 국내든 해외든, 복음을 전파해야 할 막중한 사명을 지닌 마지막 믿음의 주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는 이 어둡고 우울한 절망의 땅 캄보디아에서 소망 없이 죽어 가는 죄인들에게 크메르어 전도지 2천 장과 영어 전도지 1천 장을 나눠 주면서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그 결과 40명의 혼들을 하나님께로 이겨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 씨앗은 자라고 자라서 언젠가는 반드시 캄보디아를 복음과 진리로 뒤흔들 만한 위대한 역사를 이룰 것이다. 저 옛날 아도니람 저드슨이 버마(미얀마)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먼저 너희 모두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해짐이라』(롬 1:8).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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