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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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를 망친 “칼빈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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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4월호>

지난 1월 20일 <한국 교회를 빛낸 칼빈주의자들>이란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한국 교회 제1세대 칼빈주의자들”의 생애와 신학을 집대성한 책으로서, 이 땅에 “칼빈주의 신학”을 깊이 뿌리내리게 한 59명의 국내 신학자들과 목사들, 곧 박형룡, 이종성, 박윤선, 주기철, 손양원, 김준곤, 옥한흠 등의 칼빈주의자들이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어느 기독교 신문에서는 이 책의 출간에 즈음해서 “한국 교회, 이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라고 보도했는데, 이보다 더 주관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힌 왜곡된 평가가 또 어디 있겠는가! 왜 그런 자들은 이 나라 교회들의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가? 아주 그럴 듯한 말로 그들의 생애와 신학을 미화한 이 책이 “속임수” 그 자체라는 사실도 모른단 말인가? 그것도 매우 비참하고 가증하며 비극적인 속임수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59명의 칼빈주의자들은 한국 교회를 “빛낸”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망친” 자들이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5대 강령”은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된 속죄”(Limited Atonement),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인데, 각 항목의 영어 단어 첫 번째 글자를 따서 간단하게 “TULIP”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교리인가”에 대해서는 지면상 자세히 논하지 않을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칼빈주의가 왜 형편없는 거짓 교리인가”를 바른 성경인 <킹제임스성경>으로 조목조목 반박하고 그 오류를 성경적으로 바로잡아 놓은 로렌스 M. 밴스의 저서 <극단적 칼빈주의의 이해>를 참고하기 바란다.

“칼빈주의 5대 강령”에 세뇌된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를 제대로 내다볼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를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선택되고 예정된 사람이라고 짐짓 여기면서도, 죽은 뒤에 어디로 가는지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한 맹신이 만들어 낸 미래는 비극적인 결말이며, 그들은 장밋빛 미래를 꿈꾸면서 죽게 되지만 결국 “영원한 불못”으로 들어가고 만다.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의 생애에서 단 한 번도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고 영접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요 1:12).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라』(롬 10:9,10).

이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면 지금 바로 구원받을 수 있는데(고전 15:1-5), 왜 많은 사람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것인가? “저항할 수 없는 은혜”에 따라 하나님의 강권적인 방법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러야 믿을 수 있다고 속이는 칼빈주의자들의 영향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라고 말씀한다. 죽은 뒤에 지옥에 가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믿으라. 그러면 구원받을 수 있다. “믿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영원히 구원받지 못한다. 바른 성경과 올바른 성경적 지식이 없이는, 사탄이 이 땅에 깊이 뿌리내리게 한 칼빈주의라는 미궁과 지옥의 영원한 불길 속에서 빠져나오는 “출구”를 절대로 발견할 수 없다.



칼빈주의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사는 것 자체가 “수치”임을 알아야 한다. 우선 종교개혁자 “존 칼빈”(1509-1564)은 혼들을 주 하나님께로 이겨온(잠 11:30) 신실한 구령자도, 눈물로 씨를 뿌리기 위해 밭으로 나간(시 126:5,6) 부지런한 농부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친(딤후 4:7) 충성스런 군인도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야전 군인”으로서 한 일이 거의 없었다. 거칠고 전투적이며 담대한 그리스도의 군사로 자라나 사탄과 마귀들과 싸우기 위해 수많은 자갈과 가시덤불로 뒤덮인 거친 숲을헤치며 다녔던 “마틴 루터”(1483-1546)와는 판이하게 다른 개혁자였던 것이다.

주목할 부분은 칼빈이 직접 쓴 글이나 논문, 그에 관해 쓴 학자들의 글들을 보면, 칼빈이 언제 어떻게 회심하고 구원받았는지에 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구원에 관한 한 분명한 간증을 지니고 살았던 마틴 루터와 대조된다. 카톨릭 사제였던 루터는 행위 구원으로 고민하다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라는 말씀 앞에 부복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확실한 구원 간증이 있었고, 죽은 뒤에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분명히 알고 살았으며, 또한 그런 확신 속에서 “복음의 진리”(갈 2:5)로 많은 죄인들을 구령했다. 하지만 칼빈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도 없었다. 그의 “예정론” 자체가 하늘나라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창세전에 미리 정해졌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기에, 칼빈은 물론 그를 따르는 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이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 교회를 빛냈다고 하는 59명의 칼빈주의자들은 그들의 생애에서 몇 명이나 구령했는가? 과연 그들은 『현명한 자들은 창공의 광명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의로 돌이키는 자들은 별들처럼 영원무궁토록 빛나리라.』(단 12:3)라는 말씀대로 저 영원에서 빛을 낼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 큰 빚을 졌다고 하는 이 나라 교회들은 도대체 1년에 몇 명이나 구령하고 있는가? 전도지 하나 제대로 못 만들어서 미국에서 가져온 “사영리 전도지”만 수십 년 이상 우려먹고 있는 자들도 있는데, 그들은 그것이 죄에 대한 심판과 지옥의 형벌을 경고하고 있지 않은 소위 “반쪽짜리 복음전도지”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들은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에 대해서도 극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그런 확신을 갖는 것 자체를 “오만한 태도”라고 여기면서 “어떻게 연약한 인간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며 인간으로서는 죽어 봐야 아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 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못하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들이라』(고후 13:5).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거니와』(롬 8:16).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식들에게 “자신의 자녀”라고 알려 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믿은 “온건한 칼빈주의자” 찰스 스펄전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설교했다.



한국 교회가 좀처럼 복음을 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 교회가 된 것은 순전히 59명의 칼빈주의자들의 책임이 크다. 이는 그들이 추종했던 칼빈이 재림을 소망하지 않는 “후(무)천년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재림하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실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천년왕국,” 곧 의와 화평으로 통치하실 위대하고 영원한 왕국(사 9:6,7, 단 2:44)을 거부했다. 그 대신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 자기만의 “신정 국가”를 세웠고, “개신교의 교황” 노릇을 하면서 로마카톨릭의 “교회 국가”처럼 교회와 국가를 하나로 만들었다. 이것은 교회는 국가와 분리되어야 한다는(마 22:21) 성경적인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또한 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왜 그렇게 “정치”에 참여하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는가를 잘 설명해 준다. 그들은 지독한 “칼빈의 후예들”인 것이다.

이처럼 칼빈은 로마카톨릭의 거짓 교리의 체계를 세운 “어거스틴”(354-430)과 경쟁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 방식의 “하나님의 도성”을 세우려 했는데, 이를 위하여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신정 통치 국가를 모델로 삼을 수밖에 없었고, 또한 구약의 성도들을 신약의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영에 의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대단한 “상상력”은 오늘날 무지한 언약 신학자들의 거짓 교리를 낳고 말았는데, 즉 구약 성도들은 앞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구원받았고 신약 성도들은 뒤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구원받았다고 하는 “망상”에 빠지게 만든 것이다. 구약에서 직접 계시되지도 않았고 실제 일어나지도 않은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며 구원받았다고 가르친 “59명의 칼빈주의자들”이 과연 제정신을 가진 목사들과 신학자들이었겠는가?

또한 칼빈은 로마카톨릭의 잔인한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는데, 자기와 믿음이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였던 것이다. 그렇게 희생된 사람들 중 하나가 그의 친구였던 “세르베투스”(1511-1553)였다. 세르베투스는 비록 “삼위일체”에 관해서는 비성경적인 입장을 취하긴 했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분의 왕국을 기다리는 “전천년주의자”였고, 칼빈의 비성경적인 “예정론”을 반대하던 사람이었다. 물론 로마카톨릭의 강력한 반대자이기도 했는데, 그는 “교황”을 가리켜 “모든 짐승 중에서 가장 잔악한 짐승이요, 모든 창녀 중에서 가장 부끄럼이 없는 창녀”라고 비난했으며, “미사”에 대해서도 “사탄의 기괴한 의식이자 마귀들이 창안한 제도”라고 혹평했다.

심지어 “유아 세례”는 “교황이 만들어 낸 마귀의 교리이자, 교회들을 완전히 전복시키려는 수작”이라고 말하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면서 유아에게 물을 뿌리면 구원받는다고 믿은 칼빈에게 “믿고 구원받은 성인에게만 침례를 줄 것”에 관하여 두 통의 편지를 써 보냈는데, 결국 참다못한 칼빈이 그를 화형시키고 말았다. 언젠가 “사랑의교회” 예배당에서 100여 명의 부모들이 자기의 아기들에게 유아 세례를 받게 하려고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의식을 집행하던 칼빈주의자 오정현 목사가 물을 뿌려서 싫다고 우는 아기를 애써 웃으며 달래는 모습이 정말로 한심해보였다. 유아 세례를 주는 거짓 목사나, 그 의식을 받게 하겠다고 줄 서 있는 무지한 부모들이나 모두 마귀의 수중에서 놀아나는 “칼빈의 후예들”로서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거기에 서 있었던 것이다. 마귀는 그런 의식에 참여해야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선택된 자들이 될 수 있다고 속인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이 만드는(갈 2:21) 행위 구원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유아 세례를 받았는지의 여부에 따라 창세전의 “선택”이 결정된다면, 그것은 “무조건적인 선택”이라는 그들의 교리와도 모순되는 것 아니겠는가?

칼빈은 요한계시록 20:1-7에서 여섯 번이나 강조한 “천 년”이란 기간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요한계시록 주석서를 쓸 엄두조차 못 냈다. 그 의미를 올바르게 알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재림에 대한 관심이나 소망이 없었던 이유가 훨씬 더 컸다. 그의 설교에서는 재림을 사모하는 마음과 자세를 찾아볼 수 없다. 재림보다 “현실 개혁”에 더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거나 성경을 가르치는 가장 소중한 일은 내팽개치고 쓸데없는 일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다. 결국 칼빈은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빛나는 빛에 주의하듯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하는 것이잘하는 것이니라.』(벧후 1:19)라는 말씀도 소홀히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영국의 신학자 “리처드 후커”(1554-1600)는 “칼빈은 성경의 예언에 관한 한 모든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하위’에 속한다.”라고 말했다.

결코 한국 교회를 망치는 “칼빈주의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칼빈주의자로 남겠다고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필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런 사람을 내버려 둘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무지하다면 무지하게 내버려 두라』(고전 14:38). 하지만 다음의 내용들을 반드시 숙고해 보기 바란다.

① 성경적인 “전적 타락”은 “전적 무능력”과 다르다. 인간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의지”까지 타락하지 않았다. “의지”는 타락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행 16:31)라고 명령한다. 구원받고 싶다면 지금 믿으면 되는 것이다. “믿기 싫은 것”을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로 변명하지 말라!

② 개인의 구원에 관한 한 성경 어디에도 “무조건적인 선택”을 말하지 않는다. 선택은 항상 “조건적”이라는 것을 명심하라!(엡 1:4, 벧전 1:2, 롬 8:29)

③ 예수님의 피가 어떤 사람에게는 적용이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적용이 안 된다고 하는 “제한적인 속죄”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이다! 성경은 『그[예수님]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몸값으로 내어주셨으니』(딤전 2:6)라고 분명히 말씀한다.

④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뒷받침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이 저항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마 23:37).

⑤ 칼빈주의자들의 “성도의 견인”과는 달리 성경은 『또한 그분께서 너희를 끝까지 확고하게 지키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게 하시리라.』(고전 1:8)라고 말씀한다(cf. 롬 8:38,39, 요 10:29).

칼빈주의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라! 한국 교회를 망친 59명의 칼빈주의자들의 비성경적인 가르침은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도 좋다. 백만 명이 넘는 죄인들을 주님께로 이겨온 위대한 구령자 빌리 선데이는 “학자들과 성경이 하는 말이 서로 다를 때는 그 학자들이 마귀의 편에 서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믿음의 경주에 관한 한, 존 칼빈은 결코 빌리 선데이를 따라오지 못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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