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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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vs. 극단적 칼빈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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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02월호>

이 나라의 장로교회에 다니는 교인들 중에 “칼빈주의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정확하게 답변할 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필자가 아는 한 지인은 무려 40년간을 칼빈주의 교회에 출석했지만 칼빈주의가 무언지도 모른 채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칼빈주의 5대 교리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자, 순간 그 교리가 틀렸다는 점을 “직감”하고 “당혹”해 했으면서도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다니는 교회는...”이라고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매 주일 예배를 드리고, 교인들과 기도 모임을 갖고, 개인적으로도 열심히 몇 시간씩 기도하니 다 된 것 아니냐는 식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대부분의 장로교인들이 그들의 교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 보이는 반응인 듯하다. 한마디로 “어정쩡한” 태도 그 자체다. 그들의 교리가 틀렸다는 점을 “상식적으로”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품어 온 그릇된 종교적 열성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열성”이 “지식”을 거부하는 안타까운 현실인데, 성경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형제들아, 내 마음의 소원과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그들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라. 내가 그들에 대해 증거하노니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열성은 있으나 지식을 따라 된 것은 아니니라』(롬 10:1,2). 이 말씀에 따르면 “열성”은 “구원”마저도 뿌리치게 한다. 아, 이 얼마나 개탄스러운 일인가! 교회는 다녀도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칼빈주의”(Calvinism)는 인류 역사에 등장한 수많은 “-ism”(이즘, 주의)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명사에 접미사 “-ism”을 붙이면 특정한 신념이나 주의, 행동, 상태 등을 나타내게 되는데, 예를 들면 “현대주의”(Modernism), “후기현대주의”(Post- modernism), “다다이즘”(Dadaism), “실존주의”(Exis- tentialism), “허무주의”(Nihilism), “구조주의”(Struc- turalism), “사회주의”(Socialism), “공산주의”(Com- munism), “자유주의”(Liberalism), “현실주의”(Real- ism), “개인주의”(Individualism), “영웅주의”(Hero- ism), “사디즘”(Sadism) 등 셀 수 없이 많이 있다. “-ism”​은 일종의 세력이자 독립된 영역이다. 각자의 목소리를 높이는 인류는 이 “-ism”의 덫에 매우 깊이 빠져 있는데, 인간의 신념과 행동, 상태 등을 “-ism”​으로 분류하는 일은 참으로 위험하다. 왜냐하면 “진리”마저도 “-ism”에 집어넣어 그 “절대성”을 없애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너는 그것을 따르라. 나는 이것을 따르겠다.”라는 식이며, 대표적으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올바른 진리인 “세대주의”(Dispensational- ism)가 그러하다. “세대주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기타 “-ism”들 가운데 하나로 치부함으로써 자신이 가진 지식의 창고에 처박아 두기 일쑤이다.

“-ism”의 덫은 기독교계도 예외가 아니어서, 예정론의 “칼빈주의”(Calvinism), 행위 구원론의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 카톨릭의 믿음과 실행, 질서를 따르는 “로마카톨릭주의”(Roman Catholicism) 등에 지배당하고 있다. 한마디로 특정 교파에 속한 사람들은 마귀가 쳐놓은 “-ism”의 덫에 걸려들어 그 독립된 영역에서 세력을 형성함으로 진리를 대적하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편 가르기”는 육신적인 일에 속하며, 성경의 한 육신적인 교회에서도 “편 가르기”가 성행했다. 『나의 형제들아, 클로에 집안의 사람들이 너희에 관하여 내게 전해 준 바로는 너희 가운데 다툼이 있다는 것이라.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 각자가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폴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께 속한다.”라고 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나뉘시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더냐? 아니면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더냐?』(고전 1:11-13)

오늘날로 치면 위의 육신적인 고린도 교회의 상태는 “나는 칼빈에게 속한다,” “나는 알미니우스에게 속한다,” “나는 카톨릭의 초대 교황(?) 베드로에게 속한다”라는 기독교계의 상황과 유사하다. 동일하게 “하나님”을 인정하고, “십자가”를 내세우며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성령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이들이 왜 그토록 그들만의 “주의”에 빠져든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한 까닭이다. 칼빈이 어거스틴의 이단 교리를 가져와서 성경을 잘못 해석했더니 “칼빈주의”가 생겨났고, 알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이 그의 사후에 성경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알미니안주의”가 생겨났으며, 고대 바빌론 종교가 기독교의 탈을 쓰고 사도 베드로와 마리아를 들먹이며 성경을 잘못 해석했더니 “로마카톨릭주의”가 생겨난 것이다. 이 셋이 각자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을 양산함으로써 세력을 형성하자 그들의 거짓 교리가 정당화되고, “다수”에 의한 존재적 당위성을 갖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다수”에 의한 “표면적 우세함”에 대해 그분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셨다. 『그때부터 제자들 중 많은 자들이 물러가고 더 이상 주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열둘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가려느냐?”고 하시니』(요 6:66,67).

“많은 자들,” 즉 “다수”가 주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떠났을 때 순간 주님께서 틀리고 그들이 맞는 것처럼 보였지만 상황은 정반대였다. 주님께서 그 중간에 놓인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시자, “다수” 뒤에 남겨진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주여,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주님께는 영생의 말씀들이 있나이다. 우리는 주께서 그 그리스도,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며 또 확신하나이다』(요 6:68,69).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주님을 떠난 “다수”가 틀렸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생명의 빵으로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주님께서 옳으시다는 것을 믿고 주님께 붙어 있었다. 진리는 “소수”가 실행하는 것이지 “다수”에 의해 실행될 수 없는 것이다.

“칼빈주의” 자체는 이단 교리지만, “칼빈주의”라는 용어가 갖는 이미지는 그와 별개로 취급될 수 있다. 흔히 “칼빈주의자”라고 하면 한 번 받은 구원은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 믿음은 성경적이다. 소위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관해 말하면 자기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고 아는 척들을 하는데, 그들이 다니는 교회를 알고 보면 어이없게도 감리교, 성결교 같은 행위 구원의 “알미니안주의” 교회들이다. 그와 같은 교회들은 죄인이 구원을 받았어도 끝까지 견디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점을 교리로 삼고 있음에도 그들의 교인들 가운데는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대해 “얼떨결에” 맞장구를 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사실 “칼빈주의”를 깊이 들여다보면 이단 교리이지만,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신약의 구원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이 있다. 우선 “칼빈주의”가 왜 이단인가 하면, 첫째, “칼빈주의”는 인간의 타락이 그의 의지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의지가 무능력해졌고, 따라서 복음을 들어도 스스로 회개하고 믿을 수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수 없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전적 타락”). 둘째, “칼빈주의”는 구원받을 사람을 하나님께서 임의로 창세전에 택해 놓고 그들을 구원으로 예정해 놓았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이단이다(“무조건적인 선택”). 셋째, “칼빈주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함받은 사람들을 위해서만 갈보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이단이다(“제한적 속죄”). 넷째, “칼빈주의”는 성령님께서 창세전에 택함받은 사람들에게 가셔서 그들을 꼼짝 못하게 압도하여 강제적인 은혜로 거듭나게 하시면 그때서야 그 죄인의 의지가 살아나서 복음을 믿게 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이단이다(“저항할 수 없는 은혜”). 다섯째, “칼빈주의”는 창세전에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은 그의 구원을 입증하는 “거룩한 행위”를 끝까지 인내하며 유지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애초에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이 아니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이단이다(“성도의 견인”).

흔히 “칼빈주의 5대 교리”로 알려진 위의 다섯 가지 사항은 그 어디를 보아도 “구원의 영원한 보장”과 관계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성도라면 그의 구원이 유지될 것이다.”라고 믿기 때문에 “칼빈주의자”는 곧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믿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위와 같은 다섯 가지 이단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며 가르치는 것은 “극단적 칼빈주의”이고, 그것을 신봉하는 자들을 가리켜서 “극단적 칼빈주의자”라고 부른다. 위의 다섯 가지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는 “칼빈주의”는 “온건한 칼빈주의”라고 하는데, 이 “온건한 칼빈주의”를 따랐던 “칼빈주의자들”은 복음 전파의 필요성과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믿었기에 그들 가운데 신약교회사에서 부흥 운동과 해외 선교를 주도하며 하나님께 쓰임받은 인물들이 많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지 휫필드, 찰스 스펄전, 윌리엄 캐리, 아도니람 저드슨, 앤드류 풀러 등이 모두 칼빈주의자들이었다. 이 칼빈주의자들은 예정론 같은 것에 치중하지 않고 모든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데 그들의 생애를 바쳤다. 반면 아더 핑크, 벤자민 와필드, 루이스 벌콥 같은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은 창세전에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과 “지옥으로 예정된 사람”을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파해야 할 필요성을 없애 버렸다. 죄인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므로 인간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함으로써 복음 전파의 열정을 꺼뜨려 버렸고, 교회의 핵심적인 사역을 와해시키는 이단으로 자리잡았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현재의 일들이나 다가올 일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어떤 다른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그리스도인은 한 번 받은 구원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은 칼빈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필자에게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중 어떤 편에 서겠느냐고 묻는다면, 두 가지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면 당연히 “칼빈주의” 편에 설 것이다. “칼빈주의”와 “극단적 칼빈주의” 사이에 어느 편에 서겠느냐고 물어도 역시나 “칼빈주의”를 택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저 “칼빈주의” 복음 전파자들처럼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고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가르쳐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딤전 2:4). 이 진리를 반대한다면 바로 그 사람이 “극단적 칼빈주의자”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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