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학논단 분류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라!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2월호>

로댕의 작품 “생각하는 사람”은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켜서 무언가를 고민하는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 한 남자가 턱을 괴고앉아 있는 모습 속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사실성 있게 감돌고 있다. 이 근육질의 청동 조각상은 무엇을 표현한 것일까?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에 자신의 몸을 내던지기 전에 자신의 삶과 운명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그 청동 조각상에 담긴 핵심 사유는 “고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고민에 빠져 사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가 고민한다는 것은 갈등한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갈등은 두 가지 이상의 목표나 동기, 정서 등이 상충할 때 한 개인이나 집단 안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개나 고양이, 새, 물고기 같은 동물들은 생의 목표를 설정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살기에 목표의 충돌에 따른 갈등이 없다. 어떤 일을 하게 되는 모종의 동기가 있고 특정 상황에서 느끼는 정서가 있다 해도, 그것을 정의하고 판단하는 것은 그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인간의 몫이지 짐승들은 자신들을 평가할 수 없다. 그들은 단순히 본능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한편 인간에게 고민과 갈등이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이성과 양심이 있다는 증거이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 본성으로 율법에 있는 일들을 행할 때에는 율법이 없어도 이것들이 스스로에게 율법이 되나니 그들의 양심도 증거하고 그들의 이성이 송사하거나 서로 변명하여 그들의 마음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보여 주느니라.)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나의 복음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있으리라』(롬 2:14-16). 성경은 죄에 대한 이방인들의 고민을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시킨다. 이방인이 자기 마음에 기록된 율법에 근거해서 죄를 지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갈등한다는 것은, “심판”이 인간의 본성이 지니는 특징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즉 인간 자신의 양심이 증거하고 그의 이성이 송사하거나 서로 변명하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따른 결과에 대해 스스로 가치를 매기고, 더 나아가 그에 대해 심판이 뒤따를 것이라는 사실을 인간 스스로가 본능적으로 의식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물건에 책정된 값이 있듯이 인간의 행위에도 값이 매겨진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저울로 달아 보신다. 일례로 바빌론의 마지막 왕 벨사살이 하늘의 주를 거역하여 자신을 높이고 주의 전의 기명들에 술을 따라 마시며 우상들을 찬양하자, 하나님께서는 손가락을 보내시어 궁전 회벽에 글을 쓰게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메네 메네 테켈 우파르신』(단 5:25)이었다. 다니엘이 내린 해석에 따르면, 『메네는 하나님께서 왕의 왕국을 헤아려서 그것을 끝내셨다 함이요, 테켈은 왕을 저울에 달았더니 부족함이 나타났다 함이요, 페레스는 왕의 왕국이 나뉘어서 메데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게 주어진다』(단 5:26-28)는 뜻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가치를 저울에 달아보시는 분으로서 그 사람이 저지른 죄에 “죗값”을 매겨 그에 따른 심판을 집행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그날 밤 칼데아인들의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고 메디아인 다리오가 그 왕국을 취하니, 약 육십이 세였더라』(단 5:30,31).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 안에 심판의 본성이 있다는 사실은 인류가 제정한 형벌의 역사를 봐도 알 수 있다. 기원전 1750년경 바빌론의 함무라비 왕이 제정한 “함무라비 법전”은 문자로 표현되고 문서의 형식을 갖춘 일종의 성문법이었는데, 총 282개 조로 구성된 그 법전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칙이 담겨 있다. 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제1조 - 만약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워 놓고도 그것을 입증하지 못할 때는 모함한 사람을 사형에 처한다... 제6조 - 만약 사람이 사원이나 궁전의 재산을 훔치면 사형에 처한다. 또한 그렇게 훔친 물건을 받는 사람도 사형에 처한다. 제7조 - 만약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들이나 노예로부터 증인이나 계약서 없이 은이나 금, 남녀 노예, 소나 양, 나귀 등을 사거나 보관하기 위해 받으면 그 사람은 도둑으로 여겨져 사형에 처한다.」 함무라비의 법은 눈에도 사형, 이에도 사형이라 할 정도로 잔혹했다. 함무라비 때의 “사형”은 오늘날과 달리 “기본 형벌”에 속했는데, 당시에는 소위 “인권”이란 것이 전혀 없었던 셈이다. 또한 세계 각국에서 집행된 형벌은 그 종류가 다양했는데, 고대 중국의 경우 끓는 물이나 기름에 삶아 죽이는 “팽형,” 죄명을 얼굴이나 팔뚝에 문신으로 새기는 “묵형,” 죄인의 코를 베어 내는 “의형,” 죄인의 발뒤꿈치를 베어 내는 “월형,” 무릎 아래를 자르거나 무릎 연골을 잘라내는 “빈형” 등이 있었다. “참수형”과 “투석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슬람권에서 실행되고 있으며, “태형”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등에서 집행되고 있다. “가스형,” “교수형,” “약물 주사형,” “전기의자형,” “총살형” 등도 각 나라에서 사형의 한 방법으로 제정되어 있는데, 우리나라는 형법 제66조에 따라 “교수형”을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사형 제도 외에도 수형자를 교도소 내에 가두고 복무하게 하는 “징역”과 교도소에 구치하는 “금고,” 30일 미만 내에서 감금하는 “구류,” 일정한 자격을 상실시키는 “자격 상실,” 자격을 한동안 정지시키는 “자격 정지,” 돈을 내게 하는 “벌금” 등이 형법에 규정되어 있다. 인간은 죄에 대해 형벌을 집행하는 소위 “심판하는 만물의 영장”인 것이다.


하지만 짐승과 곤충의 세계에는 심판이 없다. 바다나 민물에 사는 물고기들에게서 형벌이 집행되는 것을 보았는가? 전혀 없을 것이다. 왜 그런 것인가? 그것들에게는 이성과 양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 볼 때 사형과 태형, 사지 절단, 징역, 자격 정지, 벌금 등과 같은 형벌은 어떤 나라, 어떤 문명에서도 존속해 왔다. 따라서 “인간이 왜 동료 인간을 심판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은 오직 인간이라는 피조물에게서만 일어나는 유의미한 사색인 것이다.


간혹 자신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필자는 그것이 그들만의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에 조금만 눈길을 돌려 봐도 법 없이 살 수 있는 인간이 단 한 명도 없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보행자법”과 “도로 교통법”을 보라. 두 다리를 가진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의 길과 도로는 이 두 법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 도로를 무단 횡단하는 시민에게는 벌금이 부과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단 횡단을 할 때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경찰이 있나 없나를 살핀다. 남들 앞에서는 떳떳하지 못하여 눈을 내리깔고 부끄러운 얼굴로 그 일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법을 어기고 있음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신호 위반이나 중앙선 침범, 주정차 위반 등을 하는 차량 운전자들도 마찬가지다. 평소 즐겨 다니는 길 위에서 무형의 법을 알게 모르게 의식한다는 사실은, 비록 그 법이 형체가 없다 해도 그 법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인간은 법의 감시 아래서 살아간다. 『그러나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서 감시를 받았으며 나중에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갇혀 있었느니라』(갈 3:23).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율법 아래서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고 고백한다. 법의 기본 기능은 “감시”이며, 그것을 범했을 때는 정죄와 심판으로 이어진다. 이 점을 의식하든 안 하든 인간이 법의 영향하에 있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법이 지닌 감시와 정죄의 기능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생을 영위하려 한다면, 어느 나라의 영토에도 속하지 않는 남극이나 북극에 가서 나 홀로 자급자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면, 그가 서 있는 그 땅의 법 아래서 살아야 한다. 법과 형벌은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이며, 그 둘이 없다면 사회와 국가는 존립할 수 없다. 법과 형벌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범죄하는 존재이기 때문인데(전 7:20, 롬 5:12 등), 무엇이 범죄인가는 기본적으로 그의 마음에 기록된 율법이 알려 주고 있으며(롬 2:15), 또한 국법에 따라 처벌받는 것이 인류 역사의 흐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지으셨을 때 그를 법 없이 내버려 두지 않으셨는데,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첫 사람에게 주신 법은 창세기 2:16,17에 기록되어 있다. 『주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명령하여 말씀하시기를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을 네가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나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네가 거기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범죄로 인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이 법을 지켜야만 했던 것이 당시 첫 사람 아담의 생존 방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형을 선포하셨는데, 금지된 열매 하나를 따먹었다고 죽음을 선고하시는 분이 바로 인류의 창조주이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과연 세상이 원하겠는가? 세상은 사형을 선언하신 하나님을 증오한다. 그러나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원칙은 처음부터 규정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만일 아담이 하나님을 벗어나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려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결코 그런 적이 없었지만,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은 그런 무모함이 낳은 결과가 무엇인지 잘 보여 준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좌시하시지 않고 인간의 일에 “직접 개입하셔서” 그들을 멀리 흩어 버리신 것이다! 인간이 창조주를 벗어나서 마치 그분이 존재하시지 않는 것처럼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불가능한 일인가! 『어찌하여 이방이 분노하며, 백성들이 헛된 일을 꾀하는가? 땅의 왕들이 나서고 치리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주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이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그들의 결박을 끊고 그들의 멍에를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늘들에 앉으신 분이 웃으실 것이요, 주께서 그들을 조롱하시리로다. 그때 그가 진노 가운데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심히 불쾌하여 그들에게 화내시기를 “내가 나의 거룩한 산 시온 위에 내 왕을 세웠도다.” 하시리라』(시 2:1-6). 인간이 하나님의 결박과 멍에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신다. 오히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시온 산 위에 왕으로 세우심으로써 인간을 더욱 옥죄실 것이다. 미래의 재림 때 펼쳐질 이 “철권통치”(시 2:9)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창조주와 소통하도록 지어진 인간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은 마귀에게서 나온 거짓말이다. 온 우주는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고 있다(히 1:3). 마귀들은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떨면서도(약 2:19) 인간에게 엉뚱한 생각을 불어넣어 멸망하게 만든다. 그러나 “마귀들이 믿는다면 인간도 믿을 수 있다!” 마귀들이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떤다면 인간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불신은 고의적인 불신이고, 심판에 대한 부정 또한 고의적인 부정이다. 『그들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들이 마땅히 죽음에 처해져야 한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면서도 이 같은 일을 행할 뿐만 아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좋게 여기느니라』(롬 1:32).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심판자이시다(히 12:23). 온 땅의 심판자로도 불리시며(창 18:25), 온 우주의 유일한 입법자로서 인간을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다(약 4:12).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은 낮추시고 다른 사람은 세우시는 재판장이시다(시 75:7). 모든 일이 바로 그 “살아 계신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죄성을 지닌 인간은 그 심판의 하나님을 고의로 잊으려 하는데(벧후 3:3-7), 이러한 현실은 교회들과 신학교들도 마찬가지여서 지옥의 심판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학자들과 목사들이 그 저주받은 혀들을 강단에서 놀리고 있다(약 3:1-8).

교회들의 강단에서 지옥이 사라졌지만, 예수님께서는 초림 때 지옥에 관한 설교를 매우 자주 하셨다(마 5:22,29,30; 10:28; 11:23; 16:18; 18:9; 23:15,33, 막 9:43-48, 눅 10:15; 12:5; 16:23). 지옥이 없다면 왜 설교하셨겠는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지옥을 친히 마련하신(마 25:41) 하나님께서는 실로 “불가항력적인” 분이시다. 사탄은 결박할 수 있어도(계 20:1,2) 하나님은 결박할 수 없다. 그분께서 “심판자”라는 사실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들은 사랑의 하나님만을 노래하고 공의의 하나님은 외면한다. 그런 교회들이 세상에 왜 존재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어겼다는(출 31:15) 이유로 그분의 백성을 돌로 쳐서 죽게 하신 분이다(민 15:32-41). 이런 하나님을 세상은 물론, 교회라는 곳들까지도 원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알라나 마리아 같은 물러 터진 우상만을 원할 뿐, 그분의 말씀이 격심하고 크고 강한 칼이며(사 27:1) 그 말씀이 불 같고 바위를 부수어 조각내는 큰 망치 같은(렘 23:29) 심판자는 원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원하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께서도 관망만 하고 계시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심판받으심으로써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해 놓으셨다. 재림 때도 세상은 그분을 원하지 않겠지만 주님께서는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나니, 이는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존경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들을 존경하게 하려 함이라』(요 5:22,23). 심판의 여부에 관한 고민은 창조주께서 살아 계시는 한 부질없는 짓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모든 심판”을 맡으신 아들이시며, 반드시 다시 오시겠다고 신약성경의 맨 끝에 세 번이나 약속해 놓으셨기 때문이다(계 22:7,12,20).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르겠다고 하는 자들까지도 지옥 불에서 태우실 것이다(살후 1:8). 왜냐하면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롬 1:19).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격”까지도 피조 세계 안에 계시되어 있으므로 아무도 변명할 수 없다고 경고하시면서(롬 1:20) 그 죄인들의 입을 틀어막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마귀들도 이 점을 알기에 인간을 속이면서도 그들 자신은 떨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고민하지 말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지옥의 심판을 피하도록 하라. BB

전체 927 / 12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