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세대주의 분류

다니엘의 70주에 대한 세대적 조명(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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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2년 09월호>

성경 예언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가장 많이 혼돈 하는 것 중 하나는 ‘유대인의 위치를 항상 어디에 두느냐’는 것이다. 성경 속의 역사는 항상 유대인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의 시계는 유대인이며, 유대인을 통해서만이 역사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의 시대는 종결되었으며 이제는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체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요, 할례는 마음의 할례이니...(롬2:28-29)』” 라고 하면서 우리가 영적으로는 유대인이 되기 때문에 구약에 약속된 모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된 결과이다. 고린도전서 10:32을 보면 교회시대 이후에도 유대인과 하나님의 교회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나 아무도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에서 그런 자들에 대해 경고하시기를 『... 자칭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모독을 아노니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요, 오히려 사탄의 회당이니라... 보라,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아니요, 오히려 거짓말하는 자들을 내가 사탄의 회당에 속한 자들로 만들었으니...』(계2:9, 3:9)
역사를 통해 볼 때 각 민족들의 부흥과 지구상의 각 민족의 존재성은 참된 성경의 보존과 유대 민족이 보호되고 존속하는가에 달려 있다. 유대인들이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은 ‘역사적 기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프레드릭 대왕이 궁전 목사에게 “성경의 영감에 대해 한마디로 입증해 보이게.”라고 하자, 그는 한 마디로 “폐하, 유대인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유대인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본 다음에 이 유대인과 관계된 “다니엘의 칠십 주”를 공부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먼저 유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그 말씀을 기록하고 보존하였으며 우리에게 전수하였다(롬3:2). 그리고 『육신으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서 나셨으니”(롬9:5), 예수님께서도 『이는 구원이 그들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라.』(요4:22) 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단순히 ‘메시야가 유대인에게서 나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그 분이 유대인을 향해서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3-14)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이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 때에는 그리스도인이 한 명도 없었으며, 열두 제자도 택하기 이전이었다). 사도 바울도 이것에 관해 분명하게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스라엘)을 버리셨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들의 실족함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그들의 쇠퇴가 이방인들의 부요함이 되었다면,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은 어떠하겠느냐? ...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해가 된다면 그들을 받아들임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는 생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네가 본래의 돌올리브 나무에서 꺾여 본성을 거슬러 참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졌는데, 하물며 본래의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본래의 올리브 나무에 얼마나 더 잘 접붙여지겠느냐?... 복음에 관하여는 그들이 너희로 인하여 원수가 되었으나 선택에 있어서는 그들의 조상들로 인하여 사랑을 받는 자들이라. 이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심이니라』(롬11:1-36).
유대인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들이 특색있고 구분된 민족으로 드러난 것은 모세에 의해 출애굽을 하면서였다. 구약 성경의 대부분은 바로 이들 역사로 가득 메워져 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늘에 속한 백성인 반면에 유대인들은 지상에 속한 백성이다. 유대인이 아브라함에서 그 역사가 시작된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도 시작이 있다. 이 교회시대는 오순절에서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끝나게 될 것이다.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은 현 세대에서 역사의 측면으로 밀려나서 열방의 무덤 속에 흩어져 있으나 다시 그들은 열방의 무덤으로부터 부활하여 회복할 것이다(겔37장). 1948년 이스라엘의 국가적 탄생은 예언의 성취를 위한 하나의 예표는 될 수 있지만 구약에서 약속한 ‘이스라엘의 회복’은 아니다. 지금은 이방인들이 이 지상을 다스리고 있으며(단2장; 7장; 9:24-27), 이것을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21:24에서 “이방인의 때”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휴거되고 나면 유대인들은 7년 대환란을 겪은 후 그들 자신의 고토로 돌아와 모든 것을 회복할 것이며, 또한 열방의 머리가 될 것이다(신28:13).
유대인의 위치와 그에 대한 성경 예언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된 가장 심각한 성경적 오류는 다니엘서와 연관하여 나타난다. 다니엘서는 그 기록자와 그 기록 연대에 관하여 그 어느 성경보다도 성경을 믿지않는 ‘현대주의와 신정통주의’ 학자들에 의해 가장 공격을 많이 받는 책일 것이다. 이 다니엘서는 크게 각각 여섯 장씩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번째 나누어진 부분은 주로 ‘역사적’이며, 두 번째 나누어진 부분은 ‘예언적’이다. 더욱 특이한 점은 이 다니엘서는 ‘두 개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1장에서 2:3까지, 그리고 8장에서 12장까지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으나, 2:4부터 7장 끝절까지는 고대 시리아의 언어인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이방인 제국과 관련된 것’은 그들의 언어인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고(단2:4-7:28), ‘유대인과 관련된 것’은 유대인들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단1:1-2:3, 8-12장)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찰하고자 하는 다니엘서 9장의 “칠십 주”는 후천년주의와 무천년주의 그리고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교회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유대인과 관련이 있으며 “이방인의 때”의 기간과는 따로 구분되어야 한다.
최근에 서달석 목사는 지금까지 견지해 오던 전천년주의 입장을 저버리고 이제는 소위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성경의 4/5를 덮어버리는 무천년주의적 성경해석에 편승하고 있는 데, 서 목사의 정확한 신학적 기준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그는 『바이블 예언 뉴스, 92, 4』에서 “다니엘의 칠십 주”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만으로 일축시킴으로 말미암아 지금껏 그렇게 외쳐왔던 7년 대환란이나 적그리스도, 그리고 말세의 징조와 그리스도의 재림을 일순간에 변역시켜 버렸고, 뿐만 아니라 가장 구령을 많이 했으며 수많은 성경 학도들에게 신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성경대로 믿는 학자들과 학교들을 하루 아침에 카톨릭의 수하로 예속시켜버렸다(바이블 예언뉴스, 92. 4. p.30).
이는 영국의 시인 ‘바이런’을 연상케 한다! 목회자 한 사람의 사소한 변역이라도 얼마나 많은 양에게 영향을 끼치고 혼란에 빠지게 하며, 또 그러한 일관성도 없고 잘못된 신학노선으로의 변역이 그 양들을 소경의 길로 인도하게 되는지 서 목사는 분명하게 인지하고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사실 그의 저서나 월간지에는 바로 그런 위대한 저자들의 챠트나 내용 - 클레어렌스 라킨, 피터 락크만, 노아 허칭스, 그랜트 제프리, 잭 T. 치크 등 - 을 인용하여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누구도 따라 갈 수도 없는 이러한 신학자들을 일시에 걷어차 버리는 모순은 무엇인가? 서 목사가 배척한 클레어렌스 라킨은 제외하고라도 피터 락크만이나 노아 허칭스, 그랜트 제프리, 잭 T. 치크가 철저한 세대주의적 전천년 신학자라는 것을 그는 아는가? 그러면서 그들의 저서를 번역, 출간하는 저의는 무엇인가?
우리는 “다니엘의 칠십 주”를 철저히 성경 중심으로 고찰해 보면서 이 주제에 대하여 서달석 목사가 “바이블 예언뉴스 92년 4월호”에 게재한 “다니엘 70이레의 해설”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오류와 한글 개역성경의 심각할 정도의 번역상의 오류를 하나씩 비교, 분석해 볼 것이다. 이것은 올바른 기준 신학을 제시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분별하게 적용함으로써 서 목사를 따르던 양들과 그 월간지를 구독하는 많은 독자들과 그 외에 하나님의 말씀을 갈급해 하면서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바른 말씀 안으로 인도하고자 함이다.

1. 다니엘서 9:24
『칠십 주가 네(다니엘의) 백성(이스라엘)과 네(다니엘의) 거룩한 도성(예루살렘)에 정해졌나니』
칠십 주에 해당하는 대상이 명백히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읍에 한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이 곳에는 없고 또 나타나지 않으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될 수 없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교회는 구약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92. 7. p.14 참조). 다니엘서 가운데 특히 예언에 있어 중요한 2, 7, 8, 9, 11, 12장에서조차도 현 시대인 ‘교회의 기간’을 언급하는 어떠한 구절도 나타나지 않는다. 다니엘 9:24-27에서도 다니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히심, 예루살렘의 멸망’(26절)과 ‘적그리스도와 더불어 한 주간(70째 주)의 언약을 확정하는 것’(27절)에 관한 사실만 제시하고 이 시대를 총망라하는 교회시대(세대)는 뛰어넘어 버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서 목사도 4월호 9페이지에서 9:24의 대상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 대한 것이라고 명확히 쓰고 있으나 15페이지부터는 갑자기 그 대상을 ‘온 세상과 그리스도인’에게로 바꾸어 다니엘서에서는 나타나지도 않는 ‘하나님의 교회’인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 그 근거로써 오직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구절들인 에베소서 2:1, 로마서 8:1, 3:21-22, 5:1 등의 구절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9페이지에서 “그 대상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 해당된다”고 한 그 자신의 논증을 역행하는 모순된 저술을 하고 있다.
지금부터 24절의 구체적인 여섯 개의 항목을 통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읍을 향한 다니엘의 70주의 목적이 무엇인지 성경적으로 조명해 보도록 하자. <다음 호에 계속>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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