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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세대주의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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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6월호>
성경은 오류없이 글자 하나하나가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기에 하나님의 절대 권위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글자 하나하나에 영감받은 그 말씀들이 의미하는 바를 “기록된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어야 하며, 이러한 해석을 “문자적 해석”(literal interpretation)이라고 한다.문자적 해석은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신 성경의 권위를 올바로 제시하는 성경적 해석이며, 변개되지 않은, 즉 삭제되거나 첨가되지 않은 직역성경이 있을 때 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성경해석은 ‘세대주의’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그동안 변개되지 않은 성경이 없었던 한국교계는 당연히 ‘세대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결여될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종말론에 잘못 오용되기도 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신학체계 자체가 규정되기 때문에 성경해석의 방법론은 신학이론이 체계화되기 전에 결정되어야 한다. 이제 성경과 ‘세대주의’의 관계를 설명함으로써 올바른 성경해석과 적용의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성경의 영감과 언어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는가? 어떻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오류없이 영감받았고 섭리로 보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주이시고, 또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는가? 이는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들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주시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서(시8:1, 19:1, 104:24, 119:130, 145:9, 사40:26; 행14:17; 롬1:19-20),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을 통해서(창37:5-11; 겔1:1; 단 7장), 천사를 통해서(창 19장, 단 12장, 계1:1), 양심을 통해서(롬2:14-15), 또한 그외의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서(히1:1-2),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기록하고 있는 성경을 통해서(롬15:4, 딤후3:16 -17)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하신다. 성경을 제외한 다른 방법들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리고 성경이 기록되기까지는 사용하셨으나 지금은 온전한 성경을 주셨기 때문에(고전13:10, 딤후3:16) 언어로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올바로 아는 것이 성경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은 인간의 언어에 대해 회의를 표시한다. 하나님은 무한하고 절대적이신데 반해 인간은 유한하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제한된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을 표현하기에는 부적당하다고 한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그 분의 메시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학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성경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에 관해 회의를 표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으며, 자신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그것을 기록했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만드셨고 그 언어로 인간이 알아야 할 것을 인간에게 계시하셨으며,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여 기록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영감받은 말씀을 보존하셔서 우리가 지금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통용되는 언어가 있었다. 최초의 사람 아담은 하나님과 대화했는데, 그 도구는 언어였으며 이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아담은 모든 생물의 이름을 지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창2:19). 아담과 이브는 서로 대화했으며(창2:23), 그들은 『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창3:8) 주 하나님의 면전에서 피하여 동산 나무들 사이에 숨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죄를 지은 것과 그에 대한 형벌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과 아담과 이브 사이에는 구체적인 대화가 있었고 서로에게 어떤 오해도 없이 그 판결은 종결되었다.
에덴에 있었던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나 말씀하신 것(창2:16 -17)을 이해하지 못해서,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정확한 의미와 뉘앙스를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면서 불순종한 것이다(롬5:19). 아담 이후에 하나님과 개별적으로 대화한 사람들(카인, 노아, 아브라함, 모세, 바울...)은 모두 그 분과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여기에는 전혀 오해가 발생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 가운데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서 범죄하지는 않았다. 성경 자체가 바로 그 증거이다.
어느 누구도 개인적인 경험으로 신학을 정립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시고 기록하신 성경을 통해서 근본적인 교리에서부터 구체적인 성경적 사실들을 알 수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이 문자 하나하나에 영감으로 오류없이 기록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는 것을 인간은 올바로 알 수 없으며, 성경을 해석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신정통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경이 개인에 따라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면 서로의 경험이 차이가 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것이 옳은가를 누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오직 “기록된” 성경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성경이 오류를 지니고 있고 인간적인 한계가 드러나는 것이라면(학자들이 주장하는 개념영감, 목적영감, 부분영감, 유기적 영감설에 따른 성경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믿음과 신학은 전혀 성립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한다는 것은 그 전제가 분명해야 한다. 바로 성경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 글자 하나하나에 영감을 주셔서 인간에게 주신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글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때 올바른 성경해석과 적용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세대주의’의 근본원칙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성경의 절대권위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그 성경에 대한 절대권위는 성경이 글자 하나하나에 영감을 받아 오류없이 기록되었다는 믿음이 없이는 무의미한 것이다.
2. 문자적 해석이란?
일반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며,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은 언어의 통상적이고 관습적인 용법들에 따라 필자가 원래 의미한 바를 설명하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성경의 문자적 해석은 단지 성경언어의 통상적이며 관습적인 용법들에 따라 성경의 원래 의미를 기록된 그대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자적 해석은 글이나 말, 생각 등이 어떤 면으로 사용되었든지 모든 단어가 통상적인 용례에서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즉, 성경에서 “유리”라고 했으면 그것을 거울이라는 다른 의미로 생각하지 않고 기록된 그대로 유리라고 이해하는 것이며, “피”라고 했으면 그것을 희생이나 사랑이라는 다른 의미로 바꾸지 않고 실제적인 피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자적 해석은 때때로 문법적-역사적 해석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각 단어의 의미가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사실과 연관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자적 해석은 문법과 문맥과 역사적 상황의 전후관계를 무시한 기계적인 문자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상징법이나 여러가지 수사법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상징, 비유, 예표 등은 모두 문자적 해석에서 통상적이고 평이하게 해석되며, 그것들은 문자적인 해석과 상치되지 않는다. 결국 비유나 상징에 있어 어떤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러한 표현에 문자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문자적인 해석에서 비유와 상징은 그 의미가 분명하게 나타나며, 그것이 독자에게 전해 주는 의미는 통상적이고 평이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이다.
이와 같이 문자적 해석은 ‘비유적’ 언어, 즉 ‘상징들’이 성경에서, 특히 예언서들에서 사용된다는 것을 부인하거나 ‘영적인’ 교훈들이 그 안에 진술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성경은 “통상적으로”, 즉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언어의 법칙에 따라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글자 하나하나에 영감받았다고 믿지 않는 학자들과 그렇게 믿는다 할지라도 성경에 대해 자연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학자들은 문자적 해석을 배제하고 풍유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을 한다. 풍유적 해석은 성경 본문의 문자적 의미와는 관계없이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며, 성경이 말하려는 바는 무시되고 해석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은 부차적이고 해석자의 의도가 일차적으로 되어 버린다. 펜테코스트(J.D. Pentecost)는 풍유적 해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올바로 평가했다 : “풍유적 해석방법은 성경을 연구하려는 것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고 그리스 철학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합하려는 요구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막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정통적인 성경해석의 자녀’가 아니라 ‘비정통적인 이단적 성경해석의 자녀’이다.”
이러한 풍유적 해석은 이교도들의 산물로서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B.C.20- A.D.54)는 대표적인 풍유적 해석자이다. 그는 성경의 각 부분에서 “표현이 이중적일 일때, 이미 알려진 사실이 반복될 때, 단어들에 약간의 변화가 있을 때...” 등의 경우에 다른 뜻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창세기 22:11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내세에서 살 것이다.”라는 의미라고 해석했으며, 창세기 2:21에서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든 것은 신화적인 설명이라고 해석했고, 출애굽기 33:1,3의 “약속받은 카나안 땅”은 “육신으로 나타난 그리스도”라고 했다. 결국 그에게는 문자적으로 “우유”였던 것이 풍유적으로 “고기”를 의미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대로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필로 이후에 판태누스(Panteanus, A.D.180),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A.D.155- 215), 오리겐(Origen, A.D.184-254),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등에게 이 방법이 전수되었는데, 이들 모두는 초기 성경변개의 절정을 이룬 사람들었다.
오리겐은 “Mr. Allegorism”이라고 불릴 만큼 풍유적 해석을 했다. 그는 신약과 구약에는 모호하고 비이성적인 부분들은 물론 우화들과 실제로 발생하지 않은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한 예로 창조에 대한 창세기의 기록이 실재했던 것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신화라고 했으며, 창세기 18장에서 천사들이 아브라함을 찾아간 기록 역시 실제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출애굽기 1:18 -22에서(이집트에서 산파들에게 사내아이들을 강에 버리라는 문맥에서) “남자와 여자 아이들”을 “혼의 자연적이고 이성적인 기능들”로, “산파들”을 “구약과 신약 성경”으로, “남자의 씨”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하늘에 가려고 노력하는 영적인 지식으로 각각 해석했다. 이는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하기 위해 아무런 성경적 근거도 없이 적당하게 의미를 부과한 것이다.
초기에 풍유적 해석을 했던 사람들은 오늘날 계약신학자들이 “구속”, 즉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모든 초점을 그리스도에 맞추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비스러운 사실들이 모여있는 것이 구약이라고 했다. 이러한 생각에 따라 318명의 할례받은 아브라함의 종들의 숫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했다 : 318을 헬라어 알파벳으로 표시하면 Τ Ι Η 인데, 여기서 Τ는 십자가의 모양이고, Ι Η 는 헬라어의 예수(ΙΗΣΥΣ)의 처음 두 글자라고 해석함으로써 318이 그리스도의십자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어떤 하나에 자신이 부과하고자 하는 의미를 자의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풍유적 해석이다. 이러한 예는 해석하는 사람 만큼이나 많기 때문에 오늘날 행해지는 이러한 풍유적 해석의 예는 거명할 수조차 없이 많다.
이렇게 초기 성경변개자들에게서 유래한 풍유적 해석은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대 바실(Basil the Great),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 암브로스(Ambrose), 어거스틴(Augustine) 등에게 전수되어 이들 모두가 예외 없이 풍유적 해석을 했다. 특히 오리겐과 어거스틴 이후로 교계에 풍유적 해석이 넓게 유포되었으며 어거스틴은 이러한 해석으로 천년왕국이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영적으로 이미 성취되었다는 무천년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시기에는 루터나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풍유적 해석을 배격하고 문자적 해석을 했으며, 그들은 한 본문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한 가지 의미밖에 없음을 올바로 주장했다. 이와 같이 성경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지닌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즉 성경 변개자들과 성경의 옹호자들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도 차이를 보이게 된다.
3. 문자적 해석을 해야 하는 이유
이미 성경의 기록과 연관해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즉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 하는 당위성을 제시했지만 이 시점에서 문자적 해석을 해야 하는 보다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문자적 해석은 언어 그 자체의 목적과 관습에 맞는 해석이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만드신 주된 목적은 인간과 교제하고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언어는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통할 목적으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을 인간에게 전하기에 충분한 언어를 만드셨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하며,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대화와 성경 기록 자체가 이를 증명한다. 언어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즉 하나님께서 언어를 만드신 그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충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적 해석을 떠나서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를 알 수 없다.
한 단어는 분명히 여러 의미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 단어가 하나의 특정 상황 속에서 사용될 때는 통상적으로 하나의 의도된 의미만을 지닌다. 이것이 지각있는 사람들 사이에 상식적인 의사소통의 원칙이다. 화자나 필자가 말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화자나 필자가 단어들을 주관적으로, 또는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통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이것이 곧 성경해석에서 전제되는 문자적 해석의 근거이다. 이러한 근거가 올바른 것은 성경이 수수께끼가 아니라 계시의 책이기 때문에, 즉 열려진 책이기 때문에 타당한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글을 읽든지 읽는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인간이 지닌 언어의 관습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만든신 언어의 기능이기도 하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 이외의 상징이나 비유나 은유, 또는 다른 형태의 표현은 늘 이차적인 것이다. 누군가 “나는 학교에 간다.”고 말하거나 글을 쓰면, 사람들은 그가 선생님과 학생들, 교실과 책상과 칠판이 있는 실제적인 장소에, 곧 학교에 갔다고 이해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여기서 “학교”란 “배움과 학문과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실제적인 학교에 간 것이 아니라 지식을 얻기 위한 순례를 떠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그는 화자나 필자가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자기가 의도한 바를 말하기 위해서 단지 “나는 학교에 간다”는 말을 인용했을 뿐이다. 성경을 이와 같이 풍유적으로 해석한면 무지한 사람들은 “야! 깊이 있고 영적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와는 다르게 해석한 것이며, 해석자의 사사로운 견해를 영적 양식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문자적인 해석이 요구되는 것이다.
둘째, 문자적 해석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에 맞는 해석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은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록된 언어에 관한 동일한 약속”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기록된 단어가 통상적인 뜻을 지니고 그 문맥에서 분명한 뜻을 지닌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에 부합하는 문자적인 해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셋째, 문자적 해석은 그 해석의 타당성을 보증받을 수 있는 해석이다. 만일 평이하고 통상적인 문자적 해석을 하지 않는다면 해석한 것의 타당성은 상실되고 만다. 만일 기록된 글자 그대로의 성경 본문이 없고, 또한 그에 대한 문자적 해석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그러므로 통상적이고 평이한 문자화된 기준이 없으면, 인간의 상상력이 초래할 수 있는 우화적 해석의 다양성은 상대적 진리를 낳게 된다. 성경에서 통상적인 의미 이외의 다른 의미를 찾으려고 시도하는 해석은 성경의 기록된 의도와는 관계없이 해석자가 그 의미를 마음대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며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해석을 낳게 된다.
넷째, 문자적 해석은 성경예언의 성취를 올바로 증거하는 해석이다.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구약성경의 예언들 - 탄생, 성장, 사역, 죽음, 부활 등에 관한 예언들 - 이 모두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신약성경에는 이러한 예언들이 비문자적으로 성취된 예는 전혀 없다. 이것은 문자적 해석을 강력히 지지해 주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대한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재림에 관해서도 문자적 해석을 하는 것은 물론 성경 전체에 걸쳐 문자적 해석을 해야 하는 근거가 된다.
4. 문자적 해석과 올바른 적용
사람들은 해석하는 것과 적용하는 것을 혼동한다. 이는 영감과 감동을 혼동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영감과 감동의 구분이 중요한 것처럼 해석하는 것과 적용하는 것에 대한 바른 이해는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이제 문자적 해석과 올바른 적용을 위한 방법을 간단히 소개하려 한다.
첫째, 각 단어의 의미를 연구해야 한다. 둘째, 단어 상호 간의 문법과 관련성을 분석해야 한다. 세째, 가까이 있는 문맥과 멀리 떨어져 있는 문맥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작게는 앞뒤 몇 절의 문맥에서, 크게는 한 장 전체나 그 성경 전체와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은 직접적인 문맥의 연구뿐만 아니라 성경대 성경의 비교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문법적으로”, “문맥에 따라”,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함으로써 위의 세 가지에 근거한 “문자적 해석”을 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나 적용은 “교리적 적용”, “역사적 적용”, “영적 적용”을 나누어서 해야 한다. 첫째, 교리적 적용은 성경의 모든 구절이 특정한 사람들(유대인, 이방인, 교회)에게, 특정한 이유로, 특정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적용하는 것이다. 둘째, 역사적 적용은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 역사의 어느 때에, 어디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 역사적 상황에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 영적 적용은 모든 성경의 가르침이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구절은 사람을 바르게 하거나 가르치기 위한 영적 교훈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이는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소망을 지니게 하려 함이니라』(롬15:4).
이와 같이 성경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기본적으로는 교리적 적용을 하지만 영적인 적용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런데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것은 영적인 진리가 담긴 말씀을 그리스도인의 교리로 가르치거나 그 반대의 일을 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다 그리스도인의 교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세 가지로 나누어 적용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과 목사들은 영적 적용을 목적으로 풍유적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말씀하는 그대로 성경을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5. 문자적인 해석의 열매
그러나 문자적인 성경해석은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메시지를 인간에게 전할 목적으로 언어를 창조하시고 인간이 그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의도하셨다는 사실을 기초로 하여 그 메시지를 분명하게 해석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다.
문자적인 해석을 일관되게 적용하지 않는 학자들은 성경의 일부는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일부는 그렇지 않게 풍유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풀러는 “구약의 예언들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이 얼마만큼 적용되어야 하느냐는 문제가 나에게는 여전히 매우 당혹스런 문제이다”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일관되게 문자적 해석을 하는 것이 그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만 성경에서 “예언된 대로”, 또 “기록된 그대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무천년주의자인 해밀턴(Ha- milton)은 이러한 고백을 했다 : “우리는 구약성경 예언에 대한 문자적 해석이 메시야의 지상왕국에 대해 전천년주의자가 그리는 바로 그러한 그림을 제시해 준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것이 구약의 약속들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에 기초하여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바로 그 메시야 왕국이었다.” 이와 같이 헤밀턴은 만일 자신이 문자적 해석을 따랐다면 자신은 전천년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인정했다. 이런 이유로 파인버그(Feinberg)는 예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무천년주의자들의 주장은 철회되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문자적인 해석은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게 함으로써 성경에서 구분해야 할 것들을 구분하게 한다. 즉 이 땅에는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고전10:32)과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 서로 다른 경륜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일정한 시기가 나뉜다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 그러므로 세대주의의 문자적 해석은 단어, 개념, 사람, 경륜들 사이의 분명한 구별을 나타내지만, 구분하는 것과 통일하는 것은 모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대주의’는 성경을 올바로 나누고, 그것을 근거로 다시 성경 전체를 통괄하여 올바로 해석하게 한다.
일관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해석의 원칙이며, 성경에 부합하는 해석이기 때문에 성경의 지지를 받는다. 다시 말해서 문자적 해석을 하는 것은 ‘세대주의’에 있어 근간을 이루며, 문자적 해석이 논리적이고 명백한 해석의 원리이기 때문에 ‘세대주의’는 그 정당성을 보장받는다. 그러므로 ‘세대주의’는 단지 신학의 한 분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올바로 읽고 해석하는 유일한 “성경적 해석방법”이며,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