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마귀의 이름들 분류

간교한 뱀, 울부짖는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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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09월호>

손주영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강사



『나는 뱀이 그의 간계로 이브를 속인 것같이 너희의 마음도 어떤 방법으로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 이는 너희의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기 때문이니라』(벧전 5:8).

/ 뱀 /

사탄은 “뱀”으로서 인류 앞에 처음으로 나타났다(창 3:1). 이 뱀은 오늘날 우리가 산이나 들판에서 때로 마주치는 뱀들 중 하나(“a” serpent)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뱀(“the” serpent)이었다. 그 뱀은 마귀요 사탄이며 용이라고도 불리는 “옛 뱀”이었다(계 12:9; 20:2). 그것은 동물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필시 젊고 아름다운 남성의 모습으로, 즉 빛의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이다(고후 11:14). 그렇지 않다면 결코 그 뱀으로부터 “인간”이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고(요일 3:12), 그로부터 후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할 “씨”가 나올 수도 없을 것이다(창 3:15). 창세기 3장을 묘사했던 거의 대부분의 화가들은 그림 안에 자신들이 들이나 산에서 흔히 보았던 뱀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명백한 오류이다. 우선 뱀은 아직 땅을 기어다니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여왕”이었던 이브는 일개 “동물” 따위에게 속은 것이 아니었다.

뱀은 “흙”인 인간에게(창 3:19) “먹을 것”을 가지고 간교한 속임수를 썼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행위대로 갚으셨는데, 저주를 내리셔서 다리를 잃고 평생 “흙을 먹도록” 하셨던 것이다. 심지어는 성경을 믿지 않는 세상의 진화생물학자들조차 뱀이 원래 있던 다리를 “잃어버렸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과거에 살았던 여러 동물들의 뼈를 연구해 보니, 아마도 고생대나 중생대 즈음에 원시 도마뱀에게서 다리가 없어지면서 지금의 뱀으로 분화한 것 같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다리가 없어진 시점이 “고생대와 중생대”가 아니라 6,000년 전이라는 점, 다리는 “점진적으로” 퇴화한 것이 아니라 일순간에 없어진 것이라는 점, 그리고 다리를 잃은 원인이 “우연”이 아니라 “저주”이며, 뱀의 조상은 원시 도마뱀이 아니라는 점을 빼면 그들과 우리는 같은 믿음을 갖고 있는 셈이다.

뱀은 그 갈라진 혀를 쉬쉬거리는 것이 특징이다. 히브리어로 뱀을 뜻하는 단어인 “나하쉬”는 아예 “쉬쉬 소리를 내다”라는 뜻이기까지 하다. 뱀이 이브를 속이는 데 사용한 것 또한 이 “혀”였다. 뱀은 여자를 속여서 죽음에 이르게 할 속셈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녀를 위해 주는 양 말했다. 이처럼 사탄은 “표리부동”의 대가이다. 그래서 그 뱀이 세상의 신으로 군림하는 세상에는 “갈라진 혀”로 아첨하는 사람들이 넘쳐날 수밖에 없다(시 12:2,3). 사람들은 속으로는 별로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옷 너무 예쁘다”라는 둥, 마음에는 전혀 없으면서도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둥 말을 건넨다. 그런 말들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우상 숭배의 나라 일본 사람들은 아예 “혼네”(本音), 즉 진심을 드러내지 않고 말하는 것을 미덕으로까지 여긴다.

진심이 없는 사람의 말은 신뢰를 잃는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상대는 “진리”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 사람은 얼마든지 다른 곳에서는 딴말을 할 수 있고, 같은 혀로 단물과 쓴물을 다 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약 3:6-12). 그리스도인은 이러해서는 안 되며 그 혀를 순수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진리의 일꾼이 될 수 있다. 마음에도 없는 아첨의 말을 늘어놓기보다는 차라리 신실한 상처를 주거나 입을 다무는 편이 훨씬 낫다. 그 편이 더 “사랑이 넘치는” 모습이다(잠 27:6). 그리스도인은 필요하다면 웃으면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상대에게, 미소를 지으며 “네, 안녕하세요?”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굳은 얼굴로 “죄로 문제가 있는데 무슨 안녕이 있겠습니까?”라고 강단 있게 말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요람이 예후를 보고 말하기를 “예후야, 평안이냐?”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당신의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그녀의 마법이 이처럼 많은데 무슨 평안이 있겠나이까?” 하니』(왕하 9:22).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뱀을 무서워한다. 그래서 뱀이 나타나면 지레 겁을 먹고 피하기 마련인데, 하나님께서는 뱀을 그렇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 주셨다(출 4:3,4). 모세가 던진 막대기가 뱀으로 변했을 때, 모세는 도망을 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고 하셨다. 모세가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뱀 쪽으로 돌아섰을 때 오히려 뱀이 꽁무니를 뺐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탄을 상대할 때는 두려울지라도 도망쳐서는 안 된다. 죄를 상대할 때는 도망을 치는 것이 상책이고, 육신이나 세상을 상대할 때에는 무시하는 것이 상책일 수 있다. 그러나 마귀를 상대할 때만큼은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로부터 도망하리라』(약 4:7).

/ 사자 /


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지만(창 49:9, 계 5:5), 사탄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구약에서는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에 속은 하나님의 사람이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고(왕상 13:24), 하나님의 명령에 경청하지 않은 사람이 사자에게 죽임을 당한 일도 있었다(왕상 20:35,36). 하나님께서 그분의 법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자를 보내신 일도 있었다(왕하 17:26). 이와 같은 사건의 희생자들은 마귀의 공격에 희생당한 성도들을 예표한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이 땅에서의 심판을 위해 악한 짐승을 사용하시곤 한다는 점(겔 14:21)과, 심판을 이행하는 도구로 “멸망시키는 자”(출 12:23)인 사탄을 사용하시곤 한다는 점을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이런 진리는 더욱 또렷해진다.


성경은 사자와도 같은 마귀의 공격을 경고하면서, 그를 “울부짖는” 존재로 묘사한다. 실제로 사자는 그 포효가 매우 특징적인데, 최대 8km 바깥에서까지 그 소리가 들린다고 하며, 이는 천둥소리와 거의 맞먹는 정도의 크기이다. 사자가 그토록 크게 울부짖는 까닭은 영역을 선포하기 위함이다. 사자는 행동반경을 정해 놓고 움직인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에게 경계를 정해 주시는 분이시며(욥 38:11), 사탄 또한 이러한 점에 있어 예외가 아니다. 제아무리 사탄이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역을 벗어나서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것이다(욥 1:12; 2:6). 사자가 제 발로 그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먹잇감만을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즉 하나님의 “안전지대”를 떠나지 않으면 사탄은 우리를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탄에게 먹잇감이 되고 싶지 않다면, 정신을 차리고 깨어서 자신이 혹 하 나님께서 보호해 주시지 않는 영역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지는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 『네 발이 가는 길을 잘 살펴 네 모든 길을 굳게 세우라. 오른편이나 왼편으로 돌이키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 4:26,27).

사자는 “짐승 중에서 가장 강하여 어떤 것에게서도 물러서지 아니하는”(잠 30:30) 동물이지만, 그런 사자에게도 고충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냥에 실패하면 굶어 죽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자는 최대 250kg에 육박하는 거구의 몸을 최고 약 60km/h의 속력으로 움직이면서 사냥하기 때문에 한 번의 사냥에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자의 사냥 성공률은 채 30%가 되질 않는다고 한다. 전성기가 지나 늙으면 자연스럽게 사냥에 실패하는 일이 더 잦아질 수밖에 없고, 이는 에너지의 고갈로 이어져 또다시 사냥의 실패를 부르는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한다. 결국 그렇게 해서 굶어 죽는 사자들도 많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사자는 사냥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우선 사자는 사냥하고자 하는 무리 중에서 약한 개체가 떨어질 때까지 그 무리 주위를 탐색한다. 그러다가 목표물을 포착하면 최대한 눈치 채지 못하게 다가가거나 잠복했다가 목표물을 갑자기 덮친다. 특히 큰 동물들을 잡을 때는 숨통을 공격하여 질식을 유도한다. 사냥감이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다. 사탄 또한 이렇게 무리에서 떨어진 연약한 성도를 기습한다(신 25:17,18). 오랜 시간 기회를 엿보면서도 자신을 노출하지 않았던 사탄에게 완전히 기만당해 모든 일이 “평화롭게” 흘러가는 줄만 알았던 그 성도는,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한다(사 47:11). 그러다 “숨통”을 공격당하면, 즉 성도의 호흡인 기도가 막히면 결국 영적 생명력을 잃어 죽고 만다. 구원을 잃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죽은 셈이 되고 마는 것이다(딤전 5:6).



성도가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모이는 것”이다(히 10:25). 혹시 경험 없는 사자가 버팔로 무리를 잘못 공격했다가 여러 버팔로에게 둘러싸여 맥도 못 추고 당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제아무리 백수의 왕이라 해도 초식동물 떼를 정면에서 덮쳤다가 큰 상처라도 입는 날엔, 사냥을 할 수 없게 되어 결국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그래서 경험 많은 사자는 그런 무리를 함부로 공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성령 안에서 굳게 연합하여 연약한 틈이 없는 성도들의 무리에게는 사탄이 쉽사리 달려들지 못한다. 그러나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모이지 않고 “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면, 언젠가 “다음”에는 반드시 “내”가 목표물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