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의 이름들 분류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아비, 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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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05월호>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와서 너희 아비의 정욕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으며 진리 가운데 거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자기 안에 진리가 없음이라. 그가 거짓말을 할 때는 자신에게서 우러나와 한 것이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또 거짓말의 아비이기 때문이라』(요 8:44).너희 아비
혹시 당신은 당신의 주변에서 진리에 대해서는 완전히 깜깜하면서도 습관적으로 감탄사처럼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교인들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럴 때면 과연 그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존재가 과연 누구인지 심히 의심스러워진다. 주 하나님께서도 “아버지”이시지만, 사탄도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자신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거하지 않으면서도, 그러니까 진리를 거부하면서도 하나님을 따른다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아비는 사탄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한패”나 “주인과 종”과 같은 관계로 그들과 마귀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지 않으시고, 하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그들의 관계를 묘사하신 것일까?
성경이 말씀하시는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진리는 다각도로 살펴봄직한데, 여기에서 살펴볼 주제는 “속성”에 관한 것이다.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하나님 바로 그분이신 것과도 맥을 같이하는 진리이다. 혹자는 삼위일체에 대해 의문을 품으면서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이 같을 수 있다는 말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이에 관해 어떤 설교자는 다음과 같이 재치 있게 답변했다. “원숭이의 아들은 무엇인가요? 원숭이겠죠? 인간의 아들은 무엇인가요?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분이실까요?” 답은 자명하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서 그 “속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존재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진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키시는 “신성모독자”를 만났을 때 그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요 10:33).
성경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속성의 공유”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세베대의 아들들에게 『보아네게』, 즉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이름을 주셨던 일을 떠올려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에게는 보아네게란 이름을 덧붙여 주셨으니, 이는 천둥의 아들들이라』(막 3:17). 사도 요한과 야고보는 세베대라는 인간 아버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들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심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천둥의 아들들이라고 부르셨다. 그들의 화를 참지 못하는 성격을(눅 9:52-56) 보시고 이런 별칭을 붙여 주신 것이다. 주님께서 사탄의 이름을 “아침의 아들” 루시퍼라고(사 14:12) 밝혀 주신 것 또한 이러한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사탄은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었기(겔 28:14) 때문에, 그 권위를 잃기 전에는 일종의 “메시아”였다. 참된 “메시아”께서 “태양처럼”(말 4:2) 오신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왜 주님께서 루시퍼를 “아침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타락하기 전의 사탄에게는 어두움을 뒤로하고 밝아오는 아침처럼, 주님의 “빛을 나르는”(루시퍼라는 이름의 뜻이기도 하다) 영광스러운 역할이 맡겨졌던 것이다.
위와 같은 진리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더 나아가서 모든 인간이 왜 구원받기 전에는 “마귀의 자식”(행 13:10)인지를 알 수 있다. 진리를 거부하고 반역한 “마귀의 속성”은 아담 부부가 그 마귀의 길을 답습함으로써 세상으로 들어왔고, 그 아담에게서 난 모든 사람들은 “죄성”을 유전받는다. 이런 까닭에 인류는 기본적으로 어머니 배 속에서 날 때부터 마귀의 속성을 지닌 마귀의 자식이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해하지만, 인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 아니다. “영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그러니까 영이 “거듭나지” 않는 이상(요 3:3-8), 하나님의 본성이(벧후 1:4) 없는 모든 사람의 아비는 마귀일 뿐이다.
살인자
우리 인간들의 법정에서는 어떤 사람이 모종의 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밝혀지면 그를 범죄자라고 판결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아니다.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범죄자인 것이 아니라, 범죄자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인과 관계가 반대인 것이다(cf. 잠 14:5).
살인이라는 범죄에 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관점으로 접근하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이 처음부터 살인자였다고 말씀하시는 것 또한 맥락이 같다. 이것은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의 배후가 사탄임을 뜻하는데, 사탄에게는 누군가를 “멸망케 할 마음”이 늘 있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루시퍼는 타락해서 사탄이 되었을 때 그 처음 순간부터 살인자였던 셈이다. 사탄은 자신을, 그리고 자신에게 동조한 하늘의 군상들을, 그리고 인간들을 둘째 사망으로 밀어 넣는 살인자이다(계 21:8). 그리고 이러한 정욕을 따라 행하는 자들도 같은 일을 자행한다. 즉 다른 사람도 자기와 함께 지옥에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눅 11:52). 초림 당시든 현대이든 종교 지도자라는 이들이야말로 일급 살인마이다. 사탄은 이런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는 자기 혼자만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 멸망한다는 사실을 보며 위로를 얻기 때문이다(겔 32:31).
주님께서 이 살인자라는 칭호를 마귀에게 사용하시는 맥락을 살펴보면, 진리를 거부하려는 마음이 결국 살인하려는 마음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초림 당시의 유대인들, 로마카톨릭, 레닌과 스탈린, 마오쩌둥 등을 보면 알게 된다. 이들은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을 잠잠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었다. 그것이 설령 살인, 나아가서는 대량 학살일지라도 말이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같은 이유였다고 할 수 있다(요일 3:12). 따라서 진리에 직면하기를 싫어하며 빛 가운데서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하고, 자꾸만 감추고 싶은 일들이 생긴다면, 우리 또한 “살인자”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특별히 그런 자신을 책망해 주는 형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미워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인자라고 부르시는 데에 전혀 주저함이 없으실 것이다(요일 3:15).
거짓말쟁이, 거짓말의 아비
사탄은 인류의 아비일 뿐만 아니라 거짓말의 아비이기도 하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요 8:44). 이 표현은 사뭇 의미심장한데, 거짓말이라는 속성이 사탄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뜻이며, 사탄이 없었다면 거짓말도 없었으리라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죄란 당연히 사탄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인데 무슨 당연한 소리를 그렇게 하느냐?”라고 반문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으나, 죄란 항상 사탄으로부터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가령 “시기” 혹은 “교만”이라는 죄는 사탄이 “타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담도 무죄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 죄를 짓지 않았던가? 따라서 이러한 죄들은 사탄으로부터 “비롯된” 죄라기보다는 자유 의지를 가진 피조물이 자신의 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을 대적할 때 누구에게나 생기는 것이라고 해야 옳다. 사탄은 우주에 죄를 들여온 장본인이었고(겔 28:16), 아담은 재창조된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한 장본인이었다(롬 5:12).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다른 죄라면 몰라도 모든 거짓말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마귀가 그 시작점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떠한 형태의 거짓말이라도 피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매사에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 즉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히 13:18). 이 선한 양심을 저버리는 사람은 “파선”하게 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딤전 1:19).
그러나 심지어 죄를 지었다고 해도, 그 죄를 거짓말로 덮으려고 하지 않고 정직하게 인정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주어진다. 『가서, 이 말들을 북쪽을 향하여 선포하여 말하라. 너 타락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분노를 너희에게 내리게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나는 자비하며 분노를 영원히 간직하지 아니할 것임이라. 주가 말하노라. 주 너의 하나님을 거슬러 범죄한 것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타국인들에게로 네 길을 흩어 버린 것과 너희가 내 음성에 복종하지 않았던 네 죄악을 인정하기만 하라. 주가 말하노라』(렘 3:12,13).
이러한 진리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를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야곱의 아들들 중에 넷째였던 유다에게는 엘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야곱은 그 며느리로 타말이라는 여인을 들였다. 엘은 아들이 없이 죽었는데, 따라서 동생 오난이 타말과 결합하여 형의 씨를 세워 주어야 했다. 오난은 이 일을 고의로 회피했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오난도 죽이셨다. 유다는 두려워졌다. 유다에게는 아직 셀라라는 아들이 남아 있었지만, 타말에게 셀라를 주었다가는 막내아들마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다는 “셀라가 크면 오라.”라고 이야기하면서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냈다. 그러나 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자 며느리 타말은 창녀의 행색을 하고서 시아버지 유다가 지나가는 길가에 앉아 그를 유혹했다. 유다는 그 창녀가 자기 며느리인지도 모르고 그녀에게 들어갔고, 타말은 임신해 버렸다. 타말의 임신 소식, 그러니까 며느리의 간음 소식을 전해 들은 유다는 “그녀를 끌어내어 불사르라.”라고 이야기했다. 그때까지도 자신과 결합했던 그 창녀가 자기 며느리였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타말이 유다의 인장과 팔찌와 지팡이를 보여 주며 배 속 아이의 아버지가 바로 이 물건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밝혔을 때, 유다는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변명하지 않았다. 유다는 “그녀가 나보다 더 의로웠으니, 이는 내가 그녀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않았음이라.”라고 시인한 것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여인에게서 나온 쌍둥이 아이 중 하나가 파레스라는 점이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등장하는 그 파레스 말이다(마 1:3).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유다를 내치지 않으시고 구주의 계보를 형성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유다는 분명 죄를 지었지만, 거짓으로 자신의 죄를 덮으려 하지 않고 인정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죄를 미워하시고 그에 대해 징계도 하시지만, 죄를 인정할 줄 아는 이런 “남자다운” 사람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시 51편). 영미권의 격언 중에도 “정직이야말로 최상의 방책이다.”(Honesty is the best policy.)라는 말이 있다. 성도는 자기 생애의 순간순간마다 이러한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그러면 최소한 거짓말의 아비를 따랐다는 치욕스런 오명은 남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