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의 이름들 분류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붉은 용
컨텐츠 정보
- 525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1월호>
손주영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강사만화, 영화, 드라마 등에서는 사탄의 모습이 다양하게 나타나곤 한다. 그중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라면 아마 온몸이 시커멓고, 뿔이 달려 있는 인간의 모습일 텐데, 이는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사탄은 인간은커녕, “포유류”조차 아니다. 성경은 사탄을 “용,” 즉 “파충류”의 모습으로 제시한다.
혹시 독자는 요한계시록 4장의 그룹들이 각각 “사자,” “송아지(황소),” “사람,” “독수리”의 네 가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본 적이 있는가?(cf. 겔 1,10장) 왜 하필 이 “넷”일까? 이는 재창조의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땅”에 번성하도록 창조하신 피조물들과 관련이 있다. “사자”와 “송아지(황소)”는 각각 여섯째 날 창조된 『땅의 짐승』과 『가축』에 대응한다(창 1:25). “사람”은 자명하게도 『사람』에 대응한다(창 1:26-28). 그리고 “독수리”는 다른 것들보다 하루 전에 창조된 『새들』에 대응한다(창 1:20-22). 그런데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 땅에 번성하도록 창조된 피조물들의 종류 중에, 유독 하늘의 그룹들과 짝이 되지 못하고 남는 부류가 하나 있다. 바로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창 1:25)이다. 왜 땅 위를 기어다니는 생물들, 즉 뱀, 도마뱀, 도롱뇽 등의 파충류나 양서류에 대응하는 그룹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그 까닭은 그것들에 대응하는 그룹이 더 이상 하늘에 있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것, 즉 파충류와 양서류를 대표하는 다섯 번째 “그룹”은 바로 타락하기 전의 사탄, 곧 루시퍼였던 것이다(겔 28:14,16, 사 14:12).
사탄은 본래 하나님의 보좌를 덮는 영예로운 위치에 있었던 그룹이었으나, 하나님의 보좌보다 자신의 보좌를 높이려 한 까닭에 심판을 받고 말았다(사 14:12-15). 그 심판은 지난날의 모든 창조 세계를 뒤덮는 규모의 물(깊음)로써 이루어졌다(창 1:2). 그 결과 사탄은 셋째 하늘 하나님의 보좌 곁에서 추락해 물(깊음) 속의 용으로 전락해 버렸다. 용을 뜻하는 히브리어 “타닌” 혹은 “타님”은 성경에서 “고래”(창 1:21), “바다 괴물”(애 4:3), “뱀”(출 7:9), “용”(신 32:33)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데, 모두 물과의 연관성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도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이 있거니와, 용은 물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장차 이 용은 이스라엘을 박해하려고 자기 입에서 “물”을 쏟아 홍수를 일으킬 것이다(계 12:15,16). 돼지떼 안으로 들어갔던 “마귀들”은 “바다” 속으로 우르르 뛰어들었다(막 5:9-13).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던 물들(깊음)을 둘째 날에 나누셔서 각각 창공 아래와 위에 두셨다. 이때에 용은 창공 위에 있는 물, 그러니까 이제는 저 태양계 너머 셋째 하늘과 둘째 하늘의 경계에 있게 된 물층인 깊음으로 그 위치를 옮겼다(cf. 시 74:13,14). 성경은 이 깊음 속의 존재를 “리비야단”이라고도 부른다. 『네가 갈고리로 리비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또한 끈으로 그의 혀를 맬 수 있겠느냐?... 그는 깊음을 솥같이 끓이며 그는 바다를 향기름 솥같이 만드는도다』(욥 41:1,31).
어떤 사람들은 욥기 41장의 이 “리비야단”을 “악어”라고 주장한다(변개된 성서인 한글개역성경도 그들의 생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상식선에서도 어불성설이다. 도구나 장비를 잘 갖춘다면 갈고리로 “악어”를 끌어내는 일이야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원문에 더 가까운 번역”을 운운하면서 성경을 뜯어고치는 “학자”들의 수준이란 참으로 기가 막힐 정도이다. 리비야단은 “악어” 따위가 아니다. 리비야단은 “용”인 사탄이다. 제아무리 인간이 “호모파베르”(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라고 해도 상대할 수 없는 우주적인 규모의 무시무시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용을 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를 제시하시는데, 곧 『성령의 칼』(엡 6:17)이요, “양날이 있는 어떤 칼보다도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히 4:12)이다. 『그 날에 주께서 그의 격심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쌘 뱀 리비야단을 벌하시리니, 즉 꼬부라진 뱀 리비야단이라. 또 주께서는 바다에 있는 그 용을 살해하시리라』(사 27:1). 마귀의 밥이 되고 싶지 않거든 “학자”들처럼 하루 종일 자신의 육신으로 “지성인”이 되려고 애쓰기보다는, 차라리 주일학교 학생들처럼 말씀 한 구절이라도 진지하게 암송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 육신을 자신의 무기로 삼는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게 되어 있기 때문이요(렘 17:5), 영적인 견지에서는 “지성인”이란 말은 “멍청이”와 거의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고전 1:19-21).
한편 성경은 위와 같은 용이 “붉다”고 말씀한다. 성경에서 용이 최초로 언급되는 장면에서도 “붉은 술”(잠 23:31, 사 27:2)인 “포도주”가 함께 등장했다. 『그들의 포도주는 용의 독이요, 독사들의 지독한 독이라』(신 32:33). 이러한 적포도주의 붉은 빛깔은 “피”를 상징하기도 하고(신 32:14), “왕권”을 상징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로마 황제의 색은 “보라색”이었으며, 로마 병사들이 주님의 왕 되심을 조롱할 때 입힌 옷도 자주색 옷이었다(막 15:17-20). 순교자들의 피에 취한 요한계시록 17장의 “여왕”이 입은 옷도 자주색과 주홍색이다. 또 장차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도 피에 적신, 붉은색 옷을 입으실 것이다(계 19:13, 사 63:1-6).
성경은 “붉은” 용인 사탄을 “왕들”에 빗대어 묘사하곤 하는데(사 14:4-23, 겔 28:11-19),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일러 말하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이집트 왕 파라오야, 내가 너를 대적하노니 너는 자기 강들 가운데 누운 큰 용이라. 말하기를 “내 강은 내 자신의 것이요, 내가 그것을 나를 위해 만들었다.” 하는도다』(겔 29:3).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붉은” 용이 “왕”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상기해 봄직하다. 『그가 모든 높은 것들을 바라보니 그는 모든 교만의 자식들을 다스리는 왕이니라』(욥 41:34). 아닌 게 아니라 요한계시록 12:3에서 이 붉은 용은 머리에 “왕관”까지 쓰고 있지 않은가! “용”과 “왕”의 이러한 연관성에 대해 지난날의 사람들은 어렴풋하게라도 감을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역사 속의 왕들이 자신의 왕권을 상징하는 동물로 “용”을 사용하곤 했던 것을 보면 말이다.
용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드라콘”(δράκων)은 “보는 것”을 뜻하는 “데르코마이”(δέρκομαι)라는 단어에서 왔다. 이러한 어원으로부터도 우리는 사탄이 모든 높은 것을 바라보는, 그리고 세상의 배후에서 인류를 내려다보는 왕이라는 것을 파악해 볼 수가 있다. 사탄이 주님을 높은 산으로 데려가 세상을 내려다보며 모든 나라들(“king”doms)의 권세와 영광이 자신에게 넘겨졌다고 주장했던 것은 결코 허풍이 아니었다(눅 4:5-7). 그는 세상의 모든 권세 뒤의 진정한 “흑막”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벧전 5:8). 비록 “무대 앞”에는 동화같이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할지라도, “무대 뒤”에서는 언제나 기회를 노리는 용의 눈동자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은 하나의 머리를 가진 일반적인 생물이 아니다. 『주께서는 리비야단의 머리들을 산산조각내셔서 그를 광야에 거하는 백성들에게 식물로 주셨나이다』(시 74:14). 요한계시록 12:3에 따르면 용은 왕관을 일곱 개나 쓴, 머리가 일곱 개 달린 존재이다. 이는 그가 세상을 통치하는 데 사용했던 일곱 왕국, 혹은 그 왕들을 의미한다. 그 각각은 바빌론(님롯), 이집트(파라오), 앗시리아(산헤립), 바빌론(느부캇넷살), 메데-페르시아(다리오), 그리스(알렉산더), 로마(카이사)이다.
용의 일곱 머리는 요한계시록 17:7의 일곱 머리를 가진 짐승, 즉 적그리스도의 모습과도 연결되는데, 적그리스도가 사탄이 육화된 존재임을 감안한다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닌 것이다. 용과 적그리스도 모두에게는 뿔이 열 개 있는데, 그 열 뿔은 장차 적그리스도가 세상을 지배할 때 함께할 열 왕을 의미한다(계 17:12). 세상의 왕국들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는 느부캇넷살의 꿈에 나왔던 “열 발가락”에 해당하는 존재들인 것이다(단 2:41-44).
이처럼 용은 인류 역사를 좌지우지할만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추락”한다. 셋째 하늘바깥으로 추락한 뒤로, 누가복음 10:18 에서도 첫째 하늘로 번개처럼 추락하고, 또 요한계시록 12:7-9에서도 미카엘과의 싸움에서 진 뒤에 땅으로 추락한다. 그리고 또한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계 20:1-3), 종국에는 “불못”으로(계 20:10) 추락한다. 그 까닭은 역설적이게도 “높아지려고 하는 열망,” 곧 “교만”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 누구라도 주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은 마음을 품는다면 동일한 결말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