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마귀의 이름들 분류

벨리알, 공중 권세의 통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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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08월호>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어찌 조화를 이루며 또한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어떤 부분을 같이하겠느냐?』(고후 6:15)

◈ 벨리알 ◈

“벨리알”을 “바알”이나 “몰렉”처럼 어떤 이방 신의 이름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벨리알을 직접적으로 섬긴 이방인들이 존재했다는 기록은 적어도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벨리알은 원래 히브리어 단어이며, 그 어원을 따져 보면 “없다”는 뜻의 벨리(beli)와 “이익을 주거나 얻음”이라는 뜻의 야알(yaal)이 합쳐져서 생성된 단어라고 한다. 곧이곧대로 보면 “무익한,” “가치 없는” 정도의 뜻이 되는 셈이다. 이 히브리어 단어가 다른 언어의 성경들로 번역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들에서는 “벨리알”이란 단어가 “경건치 못하다, 나쁘다, 사악하다” 등의 뜻으로 옮겨지도록 하셨다(시 18:4; 41:8; 101:3, 잠 16:27 등에서 히브리어 “벨리알”이 이와 같이 번역되었다).

그러나 “벨리알”은 그러한 성품들이 “인격화”된 존재, 즉 사탄 자체를 지칭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제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하고 있을 때에, 보라, 그 성읍의 사람들인 어떤 벨리알의 아들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그 집 주인 노인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당신 집에 들어온 그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알고자 함이라.” 하니』(판 19:22). 본문에서 『벨리알』이 지칭하는 존재가 사탄이며, 그 사탄에게서 나온 벨리알의 아들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변개된 성경들은 “벨리알의 아들들”(삼하 23:6)이나 “벨리알의 자식들”(판 20:13)과 같은 표현들이 나타날 때면 『벨리알』을 어떤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고, “무익한, 쓸데없는” 정도의 표현으로만 번역하려는 병적인 강박증을 보인다. 변개된 개역개정판도 이 벨리알의 자식들을 “비류,” 곧 사람답지 않은 사람이라고만 칭하고 있는 것이다.

탈무드나 랍비들 또한 벨리알이란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 비유적 의인화”라고 해석한다. 성경을 다룬답시고 나섰으면서도 사탄이 어떠한 “인격체”이며, 그가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서 사람들을 미혹할 수 있다는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사탄에게는 ‘사탄 같은 것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만큼 쉬운 상대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아주 잘 이야기했듯이, 자신이 전장(戰場)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

성경에서 “벨리알”이라는 이 사탄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모세의 입을 통해서이다. 『“벨리알의 자식들인 어떤 사람들이 너희 가운데서 나가 그들의 성읍의 거민들을 끌어내서 말하기를 ‘우리가 가서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섬기자.’ 한다.” 하거든』(신 13:13). 우리는 이를 통해서 벨리알이라는 이름이 강조하는 사탄의 특성이 “주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서 돌이키게 함”이라는 조명을 얻을 수 있다. 본문의 맥락뿐만 아니라 “배반의 수”인 13이 두 번이나 들어 있는 구절 주소를 통해서도 그러하다. 다른 구절들과 상호 참조해서 살펴보면 이 벨리알이라는 이름은 주로 주님 안에 있는 기존의 체제나 질서, 미덕 등을 전복시키거나 무효화하려고 시도하는 무리를 일컫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삼상 2:12, 삼하 20:1, 대하 13:7).

신약성경에서는 벨리알이라는 이름이 딱 한 번 고린도후서 6:15에서 등장한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성별을 말씀하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성별이 어떠한 수준에 이르러야 하는지에 대한 영적 조명을 얻을 수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벨리알과 조화를 이루실 수 없듯이, 그리스도인들 또한 주님을 따르는 데서 돌이키게 하는 벨리알의 자식들, 혹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도) 벨리알의 사주를 받아 움직이는 사람들과는 조화를 이룰 수 없다. 그들이 가족이라 해도 말이다(눅 14:26).

그리스도인이라면 『쉽게 에워싸는 죄』뿐만 아니라 『모든 무거운 것』으로부터도 성별해야만 한다(히 12:1). 성경에 죄라고 기록된 것으로부터만 성별할 것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충심과 그분을 따르려고 하는 마음으로부터 돌이키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야 한다. 설령 객관적인 기준에서 “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본지에서 소개된 바 있는 필라델피아 시대의 복음 전파자인 윌버 채프먼은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라도 그리스도를 향한 내 시야를 어둡게 하거나, 성경 공부에 대한 입맛을 앗아가거나, 기도 생활을 제한하거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일을 어렵게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며 반드시 그것으로부터 돌이켜야만 한다.”

◈ 공중 권세의 통치자 ◈

사도 바울은 현 세상을 다스리는 사탄의 존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전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행하였으니 그들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이전에는 우리 육신의 정욕들 가운데서 행하였으며 육신과 마음의 욕망들을 이루어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본래 진노의 자녀였느니라』(엡 2:2,3). 대한민국의 애국가에 보면 “하느님”이 등장하는데, 이는 “하늘”과 “님”이 합성되면서 “ㄹ”이 탈락되어 생성된 단어이다. 원래 애국가의 가사는 “하나님”으로 기록되었고 또 그렇게 불렸는데, 후일 “하느님”으로 고쳐졌다. 어떤 이들은 이 “하느님”이라는 단어만이 원형을 보존했기에 표준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맞춤법이 정비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에 “하ᄂᆞ님,” “한울님,” “하누님” 등의 표현과 함께 사용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어차피 기독교인들도 “하늘에 있는 님”을 숭배하는데,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이유가 있느냐는 이해에서 비롯된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하늘에 있는 어떤 초자연적 존재”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섬기는 분은 『유일하시고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이다(요 17:3). 그래서 거듭난 사람들은 그분을 단순히 하늘에 있는 분이라고 부르지 않고, 유일하신 분, 즉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미 눈치챘겠지만, 앞서 언급한 “하느님”은 공중 권세의 통치자, 곧 사탄이다. 사실 애국가의 가사가 고쳐진 배경에는 대한민국은 국교(國敎)가 없으니 특정 종교에 편향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가 보편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신이 바로 “하느님”이었다는 것만 보아도, 마귀가 성경대로 믿는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공중에서 숭배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천상에는 『정사들』과 『권세들』 같은 어떤 영적 세력이 존재한다(엡 3:10). 다니엘 10장에는 성육신하시기 이전의 예수님께서 땅으로 오셔서 다니엘을 만나시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때에 『페르시아 왕국의 통치자』(단 10:13)가 셋째 하늘에서부터 오시는 주님을 21일 동안 막았다. 주님을 막았던 그 존재가 당시 지상에 있던 실제 페르시아 왕국의 통치자일 리는 없다.

성경을 읽다 보면 어느 지역 또는 국가의 통치자를 언급하시는가 싶다가도 앞뒤가 안 맞는 말씀을 하시는 경우가 있다(겔 28:2,12, 단 10:20). 이런 경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대상은 그 땅의 인간 통치자 배후에 있는 영적 존재나 그 지역을 관장하는 악의 세력이다. 바울이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악』(엡 6:12)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 존재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 높은 곳들에 있는 정사들과 권세들을 주관하는 왕이 바로 공중 권세의 통치자인 사탄이다. 그는 그 높은 곳에서 우리들을 내려다보면서, 어떤 충동을 일으키면 우리를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을지를 궁리하고 있을 터이다.

물리적으로 보자면, 공중 권세의 통치자는 문자 그대로 우리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기 때문에 연약한 인간으로서는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그로부터 승리할 재간이 없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을 구주로 믿는 순간, 우리를 공중 권세의 통치자보다도 훨씬 더 높이, 셋째 하늘에 그분과 함께 앉혀 주셨다(엡 2:6). 우리가 때로 잊을지라도, 이는 우리의 영에 있어 분명한 진리이다. 우리가 죄를 지으려는 충동을 느낄 때에 스스로의 힘으로 저항해 보려고 하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 하지만 천상에 있는 우리의 영으로 대항한다면, 즉 쉬지 않고 꿇는 무릎으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주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유지한다면, 오히려 우리가 반대로 사탄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그의 계략을 간파하고(고후 2:11) 그것을 부수어 낼 수 있을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