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의 이름들 분류
시험하는 자 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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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1년 08월호>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주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 왔더라. 주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디서 왔느냐?” 하시니 사탄이 주께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땅에서 여기저기, 위아래로 두루 다니다 왔나이다.” 하니』(욥 1:6,7).성경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분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다음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존재는 모세도, 다윗도, 사도들도 아닌 “사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의 존재에 관해 올바른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는데, 특히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하나는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사탄을 모르면 그와 연관된 성경의 다른 많은 부분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지피지기 백전불태”라는 말도 있거니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이 엄청난 대적을 모른 채 싸우는 전투는 언제나 위태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전사”(출 15:3)이신 하나님께서는 대적인 “사탄”에 대해 그분의 책에 다양한 각도로 묘사해 놓으셔서 성도들이 사탄의 정체를 올바로 깨닫게 하셨는데, 특히 여러 가지 이름들을 사탄에게 부여하시는 방법을 통해 그렇게 하셨다. 그중 몇 가지 이름들과 그의 특징을 묘사해 주는 표현들을 열거하자면, “사탄”(대상 21:1), “마귀”(요 8:44), “루시퍼”(사 14:12), “붉은 용”(계 12:3), “리비야단”(욥 41:1), “날쌘 뱀”(사 27:1), “꼬부라진 뱀”(사 27:1), “옛 뱀”(계 12:9), “이 세상의 통치자”(요 12:31), “공중 권세의 통치자”(엡 2:2), “이 세상의 신”(고후 4:4), “고소자”(계 12:10), “모든 교만의 자식들을 다스리는 왕”(욥 41:34), “울부짖는 사자”(벧전 5:8), “빛의 천사”(고후 11:14) 등이 있다. 우리가 이런 이름들과 표현들 안에 담긴 사탄에 관한 특징과 진리를 올바로 알면, 영적 전쟁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의 “경각심”과 “임전 태세”를 확고히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사탄”(Satan)이란 이름이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곳은 “역대기상”이다. 『사탄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일어나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대상 21:1). 그는 이스라엘을 “대적”했는데, “사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에도 “대적”이라는 뜻이 있다(민수기 22:22, 사무엘상 29:4 등에서 “대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사탄”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사탄은 하나님의 대적이자, 성도들의 대적이다. 『이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정사들과 권세들과 이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악에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엡 6:12). 궁극적으로 이 모든 악한 영적 존재들을 통솔하여 성도들을 대적하고 공격하는 사탄은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기도 한데, 그런 이유로 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한 사탄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성도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영”에 속한 일들인가에 대해 경계하지 않고(살전 5:21) 자신의 무장을 느슨하게 한다면, 사탄은 언제든지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손쉽게 정복하고 파괴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또한 사탄은 “마귀”(Devil)로도 불리는데, 구약성경에서는 사탄을 지칭하는 표현으로서의 “마귀”(the devil)라는 이름이 쓰인 적이 없다. 다만 복수 형태로 “마귀들”(devils), 곧 “마귀의 수하들”에 대한 언급만 나올 뿐이다. 사탄 그 자체인 “마귀”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에서 밝혀 주고 있으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가 바로 “디아볼로스”(διάβολος)이다. 때로는 이 단어가 “마귀”라는 고유명사로서의 의미 외에 “중상하는 자”(slanderer, 딤전 3:11), “고소자”(accuser) 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우리말로 “모함하는 사람”(딤후 3:3, 딛 2:3)은 “거짓 고소자”(false accuser)를 가리킨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아예 『고소자』(계 12:10)라는 표현을 마귀의 이름으로 제시하고 있다.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의 온갖 죄들을 열거하면서 “이 사람은 지옥행이 마땅한 자입니다!”라고 밤낮 고소하고 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마귀가 얻는 실질적인 이득은 없다. 이는 그의 최종 운명이 “불못행”으로 이미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다(계 20:10). 그러나 마귀는 자신과 함께 불 속에서 고통받게 될 무리가 얼마나 많은지를 보면서 위로 아닌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cf. 겔 32:31). 그래서 마귀가 사람들을 고소하여 지옥으로 던져 넣는 일에 열성을 내는 것이다.
또한 마귀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고소를 시도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한 변호인』(요일 2:1)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 성도의 죄에 대해서는 제가 대신 그 형벌을 모두 받았으므로 마귀의 고소는 무효입니다.”라고 방어하시면서 변호해 주시고, 결국 마귀가 그리스도인들을 고소한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무죄” 판결이 떨어지게 된다.
신약에서 사탄이 처음으로 전면에 등장하는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에서다. 이때 성경은 사탄을 『시험하는 자』(마 4:3)로 묘사하는데, 그가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고전 15:45), 둘 모두에게 “시험”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물론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을 직접 맞닥뜨린 것은 “미시즈(Mrs.) 아담”인 여자였지만, 결과적으로 사탄은 그 여자를 시험하여 넘어트림으로써 “미스터(Mr.) 아담”까지도 죄에 굴복하게 했다. 두 시험 모두에서 사탄은 세 가지 요소를 사용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요일 2:16)이었다. 이것은 인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루는 누가복음 4장에서 제시된 “시험의 순서”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사탄은 “첫 번째 시험”으로 예수님께 “돌로 빵을 만들어 보라.”라고 말했다. 이것은 “육신의 정욕”을 통한 시험으로서 뱀이 여자에게 보여 준 열매가 “먹음직한 열매”였다는 사실과 잘 대응된다. 흔히 이러한 시험은 “돈”의 형태로 다가오는데, 속된 말로 “하나님이 밥 먹여 주냐?”라는 식의 아주 현실적인 시험인 것이다.
한번은 구두를 만들어서 생활을 영위하던 윌리엄 캐리가 복음 전파에 너무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자, 이를 지켜본 한 친구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에게 진지하게 충고할 말이 있네. 자네는 분명 사업가일세. 그런데 복음을 전파하느라 본업을 너무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어.” 그러자 캐리가 이렇게 응수했다. “보다시피 나는 지금 본업에 열중하고 있는 거라네. 나의 본업은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일세. 구두를 만드는 일은 그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 공부하거나 노동하는 것은 전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흘리는 땀”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거나 주객을 전도시킨다면, 그때는 얼마든지 죄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높은 눈과 교만한 마음과 악인의 쟁기질은 죄니라』(잠 21:4).
이후 사탄은 “두 번째 시험”으로서 “안목의 정욕”을 통해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 주며 “내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 여자가 보았던 열매가 “보기에도 즐거운 열매”였다는 사실과 잘 대응된다. 이번 시험의 경우 사탄이 자기에게 경배하라고 요구한 것은 너무나 명백한 잘못임이 분명하게 드러나므로, 다른 두 시험에 비해 상대적으로 극복하기가 쉬운 시험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담이 “그것이 죄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여자가 준 열매를 먹었다는 것을 고려하면(딤전 2:14), 이 두 번째 시험 역시 그 심각성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시험은 보편적으로 “성”(性)과 관련된 문제를 통해 다가오는데, 서양의 고전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아담은 “그녀를 얻을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자신의 혼이라도 팔겠다.”라는 심정으로 자기에게 열매를 건네준 여자의 제안을 수락한 것이었다. 한편 “안목의 정욕”은 소금기의 바닷물처럼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은 더 심해지고 마음은 더욱 허무해져만 간다. 『지옥과 멸망은 결코 가득 차지 않으며, 사람의 눈도 결코 만족함이 없느니라』(잠 27:20). 수많은 사람이 이 두 번째 시험 앞에서 『내일이면 죽으리라.』(고전 15:32)라는 심정으로 굴복하고 만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죽은 자들이 반드시 살아난다는 사실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보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상기해야 한다(롬 8:24).
사탄이 한 “마지막 시험”은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것이었고, 이것은 “생의 자랑”을 통한 시험으로서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열매가 “현명하게 할 만큼 탐스러운 열매”였다는 사실과 잘 연결된다. 그야말로 “대단한 존재”가 되려는 열망은 일찍이 “실각해 버린 루시퍼의 죄”(사 14:12-15)와 똑같은 뿌리를 공유하는 아주 유서가 깊은 죄다.
마귀는 “네가 그렇게 중요한 존재라면, 네가 무슨 일을 저지르든지 하나님께서 모두 수습해 주시지 않겠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했는데, 실제로 이런 생각에 지배당하면 전광훈 목사처럼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와 같은 망발도 서슴지 않게 된다. 하나님조차 자신을 막 대하실 수 없다는 발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거듭난 그분의 자녀를 항상 위하시고, 또 때때로 인내로 참아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관용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이용하여 자신의 자긍심을 채워 보려고 시도하다가는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속지 말라, 하나님은 우롱당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는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이라』(갈 6:7).
이상 “세 가지 시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시험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최초의 사람은 이에 굴복했지만, “둘째 사람”(고전 15:47)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시험들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시어 승리하셨고, 또한 우리에게 승리를 위한 본을 남겨 주셨다.
이제 『그 시험하는 자』(마 4:3)는 승리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잠시 무대 밖으로 퇴장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싸움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인류의 죄를 제거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그는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 사두개인 등의 종교 지도자들, 심지어 “베드로”(마 16:21-23)를 통해서도 주님을 시험하려 했다. 이러한 끈질긴 공격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 번의 시험을 잘 통과했다고 해서 그다음 시험까지 “프리패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승리의 자리”에 서 있다 하더라도 항상 긴장의 끈을 늦춰서는 안 될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