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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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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2월호>
박승용 / 말씀보존학회 성경연구원목 차
1. 성경은 과학을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2. "사탄의 거짓말" 진화론의 허구
3. 위대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증거들
4. 우주의 구조
5. 노아의 홍수
6. 화석들의 증언
7. 인류의 기원과 역사
8. 성경 속 다양한 과학적 사실들
창세기 5:25-32에는 므두셀라에서 노아까지 이르는 계보가 나온다.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969세에 죽었다. 그가 죽자 홍수가 났는데, 이는 그 이름의 의미가 "그가 죽으면 그것(홍수)이 보내질 것이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이름은 "심판"을 보여 준다.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는데, 그 의미는 "위로(안식)"로서 므두셀라의 이름과 사뭇 대조적이다. 만일 당시 사람들이 『의의 전파자』(벧후 2:5)인 노아의 경고를 믿고 방주로 들어왔다면, 그들은 대홍수의 심판으로부터 위로와 안식을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안식을 얻은 사람은 불과 여덟 명에 불과했다. 므두셀라와 라멕은 120년의 유예기간 동안(창 6:3) 상황을 주시하며 노아가 방주를 짓는 것을 지켜보다가, 홍수가 나기 전(라멕은 5년 전, 므두셀라는 바로 직전)에 죽었다.
라멕이 자기 아들의 이름을 "위로(안식)"의 의미로 지었다는 사실은 특이한데, 이는 당대 세상을 바라본 그의 세계관이 어떠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는 인간과 세상에 대해 긍정적(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찬란했던 문명을 부정적 시각으로 보았다. 이것은 오늘날 전천년주의 믿음을 가진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동일하다. 그의 할아버지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 심각성을 인지하여 300년 동안 주님과 동행하다가 휴거되었던 것처럼, 라멕 역시 "저주하신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그의 아버지의 이름(므두셀라)을 통해 감지했다. 『이 아이는 주께서 저주하셨던 땅으로 인한 우리의 일과 우리의 손의 노고에 관하여 우리를 위로할 것이라』(창 5:29). 그는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저주받은 땅"(17절)과 "여자의 씨에 관한 약속"(15절)에 대해 들었을 것인데, 이것이 충분히 가능한 이유는 아담과 라멕이 동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담이 874세였을 때 라멕이 태어났다. 그리고 아담은 죽기(930세) 전 56년 동안 라멕과 살면서 에덴에서의 인간의 타락과 저주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자세히 말했을 것이다. 이에 라멕은 약속된 여자의 씨에 소망을 두면서, 자기 아들 노아가 멸망해 가는 세상에 위로를 가져다주길 바랐을 것이다.
자, 여기에서 다루는 내용은 단순한 "유대인의 설화"가 아니다. 팔레스타인이라는 한 지역에만 국한된 전래 이야기도 아니다. "노아의 홍수"는 역사적인 사실이며, 전 지구적인(세계적인) 심판이었다. 그 분명한 증거들도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런데도 이것을 어찌 믿지 못할 일로 단정할 수 있겠는가?
노아의 홍수의 역사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성경의 "무오한" 증거 이외에도, 홍수에 관한 기록은 전 세계적으로 남아 있다. 대홍수의 기록을 보여 주는 고문서들도 많이 있는데, 고대 바빌론 지역(니푸르)에서 발견된 서판 조각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영국의 인류학자였던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1854-1941)는 홍수에 대한 138여 개의 기록을 수집했었다. 앗시리아인들의 기록에서부터 고대 그리스인들의 기록, 페니키아인들, 이집트인들, 멕시코인들, 중국의 고전, 폴리네시안, 영국의 드루이즈족, 말레이시아인들, 동아프리카인들, 인도의 리그베다, 알래스카, 아이슬란드의 기록들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발견된 인디언의 돌판에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다섯 개의 칸이 구분되어 있는데, 각 칸에는 커다란 상자 모양의 배, 물에 빠져 죽는 사람들, 40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40칸의 네모, 무지개 등이 그려져 있다. 창세기 8:4에 따르면, 노아의 방주는 아라랏 산지 위에 멈췄다. 이 산지는 오늘날 터키 북동쪽 끝에 위치해 있고, 그 최고봉은 해발 5,137m(백두산의 약 2배)로 만년설로 뒤덮여 있다. 페르시아인들은 이 산을 "노아의 산"이라 불렀고, 터키족은 "방주의 산" 또는 "고통의 산," 쿠르드족은 "재난의 산"이라 불렀다.
방주를 실제로 목격했다는 사람들도 많은데, 1800년대 이후만으로도 200명이 넘는다. 동방견문록(1299년)을 쓴 마르코 폴로(1254-1324)는 아르메니아 근처에서 방주를 보았다고 실토했다(1269년). 1833년, 영국의 한 과학자는 방주가 강하 계곡이라 불리는 산기슭에 있다고 <시카고 트리뷴>지에 기고했다. 1883년, 터키 위원회는 "노아의 방주 목격 발표 보고서"에서 그것을 "매우 짙은 색 나무의 거대한 구조물"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당시 과학계의 냉소로 후속적인 탐험은 중단되었다. 또한 아르메니아계 농부 조지 하고피안은 어린 시절(1902년경) 삼촌을 따라갔다가 방주를 보았고, 심지어 삼촌의 도움을 받아 방주 위에까지 올라갔다고 말했다. 1917년에는 두 명의 러시아 조종사가 방주의 잔재를 목격했는데, 황제는 2개 중대를 파견하여 이를 확인하게 했다. 그들은 실제로 방주를 찾아 크기를 측정했고 모형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보고서를 황제에게 전달했지만, 이틀 뒤에 일어난 공산주의 혁명으로 황제는 권좌에서 쫓겨나고 모든 관련 보고서는 파기되고 말았다. 1942년, 방주를 목격했던 블라디마르 로스키비스키라는 비행사는 그것을 "광석 운반선처럼 고래 등같이 평평한 거대한 배 같다."고 했다. 1955년에는 프랑스 탐험가 페르디난드 나바라가 방주를 목격했고, 이후 1974년에 <내가 손으로 만진 노아의 방주>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간했다.
대홍수에 관한 기록들과 증언들이 전 세계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그것이 "지역적인" 홍수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만일 특정 지역에만 국한된 홍수였다면, 방주는 홍수 이후 산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바다로 떠내려갔어야 옳다. 방주를 만들 필요도 없었다. 인근 고지대로 대피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땅의 동물들이 멸종될 위험도 없었기에, 그들을 한 쌍씩 방주에 태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전 지구가 물에 잠겼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모든 산들까지도 덮은 물 위로 방주가 떠 있었다. 그러나 잔잔하고 고요한 바다 위에 떠 있었던 게 아니다. 거대한 물은 달의 인력과 지구의 자전 때문에 엄청난 파괴력으로 전 지구를 휘감고 돌았을 것이다. 이때 지표면의 균형이 깨지면서 큰 지진들이 곳곳에 발생했고, 높은 산들은 물속에서 급격하게 허물어졌다. 거센 폭풍과 해일도 일어났다. 만일 이런 악조건을 견딜 수 있는 배가 없었다면, 방주 안의 노아의 가족이나 짐승들은 어떠한 안전도 보장받지 못했을 것이다.
창세기 6:14에 따르면, 방주는 고펠 나무로 만들어졌고, 안팎이 역청으로 칠해졌다. 규격을 보면 "길이가 삼백 큐빗, 너비가 오십 큐빗, 높이가 삼십 큐빗"이었다(창 6:15). 즉 1큐빗은 평균 약 45cm(손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이므로, 135m(길이) × 22.5m(너비) × 13.5m(높이)의 크기이다. 비율을 보면, 길이는 너비의 6배이고, 높이의 10배가 된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날 높고 거센 파도에도 견딜 수 있는 대형 선박의 가장 안전한 설계 비율과 일치한다. 길이가 축구장만한 100m 정도 되는 최초의 배는 1843년에 건조된 "그레이트 브리튼호"였는데(영국, 96.6m × 15.3m × 9.6m), 이 비율 역시 노아의 방주와 거의 유사했다. 만일 성경이 꾸며 낸 책이었다면, 이렇게 길이가 "비정상적으로" 길어 보이는 배의 규격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센 파도가 한 쪽 끝을 칠 경우, 배가 두 동강 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2년 대전의 대덕 연구단지에서 방주의 모형을 제작하여 조선공학적으로 실험한 결과, 30m 높이의(10m가 넘어가는 파도는 거의 없음) 파도에도 안전한 구조의 배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심지어 "복원 안정성"(뒤집어지지 않아야 함), "파랑 안정성"(흔들림이 적어야 함), "구조 안정성"(부서지지 않아야 함)에도 가장 안전한 비율의 배임이 드러났다. 이로써 "노아의 홍수의 역사성"은 과학적으로도 입증되었는데,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즉 노아에게 방주의 완벽한 설계 비율을 알려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방주가 안전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 안에 주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방주로 들어오라』(창 7:1). 주님께서는 밖에서 "들어가라." 하시지 않고, 안에서 초청하셨다. 주께서 함께 계시지 않았다면, 완벽한 규모의 배라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약 4,400년 전 역사의 중심에서 죄인들을 초청하셨던 주님께서는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초청하시기 때문이다. "오라! 목마른 자도 오게 하라"(계 22:17). 이 초청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