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기의 경륜적 진리 분류
멀어져 가는 "왕국"과 "경륜"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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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5년 08월호>
오늘날 배교한 기독교계 안에 다음 구절들 간의 “차이”를 올바르게 구분할 수 있는 목사들, 성경 주석가들, 신학교 교수들은 거의 없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그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도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이 두 구절은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서로 다른 말씀이다. 이는 “천국”(kingdom of heaven)과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가 다르기 때문이다. 전자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왕국인 반면, 후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왕국이다.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해 본(딤후 2:15) 적이 없는 사람은 두 용어가 왜 다른지 의아할 것이다. 하지만 천국의 “천(天),” 곧 “하늘”(heaven)과 하나님의 나라의 “하나님”(God), 이 둘의 차이를 구분 못하는 사람은 없다. 만일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하늘과 영이신 하나님을 같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은 물질(하늘)과 하나”라고 거짓되게 가르치는 범신론자나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하늘과 하나님이 다르다면,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 동의어가 아니다. 이 둘이 서로 다른 용어라면, 앞에 제시한 두 말씀은 같은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두 구절을 동일하다고 간주했던 오리겐, 어거스틴, 칼빈 그리고 이들을 따르는 많은 추종자들이 혼란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초림 때 유대인들 역시 이 두 왕국에 대해 혼동했다.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각각 전파하셨는데, 이는 그분께서 두 왕국 모두의 왕이셨기 때문이다. 이렇듯 유대인들 앞에는 두 개의 왕국이 제시되어 있었고, 천국의 왕관과 하나님의 나라의 왕관, 이 두 왕관을 지니신 왕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그들 앞에 서 계셨다. 이에 물리적인 왕국과 영적인 왕국이 모두 성취될 수 있는 준비도 완벽하게 갖춰졌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물리적인 천국(왕국)이 임하지 못하고 연기된 것이다. 왜냐하면 왕국의 백성들인 유대인들이 왕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들은 “영적인 왕국”을 간과했고, 정치적이고 물리적인 왕국, 곧 반쪽짜리 왕국만을 기대하고 있었다. 로마 제국을 쓸어버리고 이스라엘을 물리적으로 해방시킬 정치적인 왕만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이 도래하기에 앞서서 도덕적이고 영적인 왕국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왕국의 도래를 위한 회개와 도덕적인 의를 촉구했던 구약 선지자들의 경고도 잊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통해 백성들이 갖추어야 할 “도덕적인 의”와 “바리새인들보다 더 뛰어난 의”(마 5:20)를 강조하셨을 때에도 그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한다.”(마 6:33)는 예수님의 말씀도 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요 1:29)고 말했던 침례인 요한의 외침도, 이사야 53장에서 양같이 길 잃은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고난당하시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죄인인 인간 왕이 다스리고, 죄로 점철된 백성들이 거주하는 왕국이 과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왕국이었겠는가? 이러한 왕국의 무가치함과 실패와 붕괴의 모습은 구약을 통해 충분히 드러났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왕국은 죄가 없는 완벽한 의로 통치되는 왕국이었다. 이런 왕국이 세워지려면 죄 없는 왕이 오셔서 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셔야 하고, 백성들은 그런 메시아를 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즉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래서 마태복음 1:21에서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들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적인 왕국은 안중에도 없고 종교적이고 형식적인 경배와 의식에만 사로잡혀 있던 대부분의 유대인들(특히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말씀들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도덕적인 원칙과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제시하신 예수님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왕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본지 280호, pp.38-43 참조)을 충족시키지 못한 채 죄 없으신 왕을 거부하고 말았다. 『카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 19:15).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마 27:23). 그런데 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새 언약의 피가 흘려졌을 때(마 26:28),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구속의 길이 마련되었다(히 9:12, 요 3:16). 이로써 물리적인 왕국은 유대인들에게서 점점 멀어지더니 미래의 재림 때까지 연기되고 말았다. 즉 왕국에 대한 유대인들의 혼란이 그런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후(무)천년주의 누룩에 취해 있는 수많은 교회들에서도 나타난다. 유대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구약에서 예언된 물리적인 왕국의 도래를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그들은 “예수님께서는 실제적인 지상 왕국 자체를 말씀하신 적이 없고, 구약적인 왕국을 무시하셨으며, 오직 영적인 왕국만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전파하셨다”고 주장한다(말하자면 천국이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이 이것을 오해한 나머지 정치적인 왕국만을 기대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문자적이고 물리적인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끝내셨으며, 이로 인해 구약에서 유대인에게 주어진 모든 물리적인 복과 약속들이 교회에게로 넘어왔으며, 교회 시대에는 천국(왕국)이 교회를 통해 확장되어 나간다고 생각해 버린다. 말하자면 이들은 자칭 유대인이라고 말하면서(계 2:9), 교회가 유대인을 대체했고 그리스도인은 영적 유대인이므로 물리적으로도 유대인이 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사탄의 회당』(계 2:9)이라고 말씀한다.
자, 이 모든 문제의 핵심은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같다고 보는 데 있다. 그러나 이 둘은 결코 같지 않다. 초림 당시에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가 동시에 제시되긴 했어도, 유대인들의 거부로 물리적인 천국은 연기되었다. 취소된 게 아니다. 재림 때로 미뤄졌을 뿐이다. 반면에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의 휴거 때까지 펼쳐질 교회 시대의 경륜 속에서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이 시대에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이 영적인 왕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경륜”이 바뀐 것이다. 물리적인 왕국이 연기되면서 새로운 경륜이 등장한 것이다. 마태복음은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 준다. 그래서 경륜의 변화를 암시해 주는 비유나 내용들이 마태복음 곳곳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관해 몇 가지 사례를 간략하게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신랑을 빼앗길 날들 - 마태복음 9:14,15에는 신혼방의 아이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들이 온다고 말씀한다. 이 아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인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이지, 아이들로 묘사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맥적으로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즉 유대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들이 온다는 것인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를 의미한다. 그 날이 오면 그들은 예수님을 위치적으로는 “하늘로”(부활), 대상으로 보면 “교회”에게 빼앗긴다. 그 결과 중대한 경륜의 변화가 생기는데, 곧 “교회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2. 옷과 포도주의 비유(마 9:16,17) - 이 비유들 역시 교회 시대로의 경륜의 변화를 보여 주는데, 특히 “새 포도주의 비유”가 그렇다. 일반적으로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지만(마 26:27,28), 성령을 상징하기도 한다(엡 5:18, 행 2:4,13).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새 포도주를 새 가죽 부대에 부을 때 잘 보존된다는 것은, 낡은 가죽 부대로 상징되는 이스라엘과는 달리 새 가죽 부대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대, 곧 새로운 백성인 교회가 성령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왕을 거부한 채 종교적인 의로 가득 차 있던 이스라엘은 성령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하지 못한 상태이다. 이것은 구약의 유대인을 위한 경륜에서 새로운 세대인 교회를 위한 경륜으로의 변화를 보여 준다.
3. 요나의 표적 - 이스라엘은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면서도 믿지 않는 세대였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보고도 왕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말씀하신다(마 12:39,40).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과 부활을 보여 주는 표적인데, 왕을 거부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이상 민족적으로 다루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마지막 경고장”과 같은 것이었다. 표적을 믿지 않는 완고한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표적은 왕께서 직접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표적이다. 이것조차 그들이 믿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들을 왕국의 관점에서 민족적으로 다루실 이유가 없고 다만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제시될 은혜의 복음을 개인적으로 믿고 나아오는 자들을 구원하실 뿐이다. 이로써 교회 시대의 경륜이 펼쳐지게 된다.
4. 천국의 신비 - 경륜의 변화는 마태복음 13장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천국의 신비”를 통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신비는 왕국의 거부로 인해 신비로운 형태로 감추어지는 천국의 모습을 보여 준다. 천국이 재림 때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잠시 감추어진다. 그 기간 동안에는 교회 시대가 펼쳐지는 것이다. 즉 천국의 신비를 통해서, 천국이 어떻게 예언되고 감추어지고 다시 드러나게 되는지, 또 그런 과정 속에서 경륜이 어떻게 변화되고 전개되는지에 대한 내용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보다 자세한 내용은 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마태복음> 13장 주석 참조).
이렇듯 왕국의 연기에 따른 경륜의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하지 못하면 계속 엉뚱한 주장을 하게 되어 있다. 약 6개월 전인 1월 25일 주일설교에서 조용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국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첫 번째 천국은 지역적인 천국으로 우리가 육체를 벗어 버릴 때 들어갈 장소인 것입니다... 두 번째 천국은 일정한 장소나 지역에 제한이 없고 예수님을 모시는 곳마다 바로 천국입니다... 이 의미에서 보면... 천국은 바로 너희 속에 있고 가정에 있고 사회에 있고 국가에 있고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에 무지한 조 목사는 “천국”(지상의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왕국)과 “하늘나라”(죽은 뒤에 들어가는 실제적인 장소)와 “하나님의 나라”(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왕국)를 구분하지 못하고 성경적인 진리를 혼잡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그가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이기 때문이다. 『욕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분리된 사람은 모든 지혜를 찾아 혼잡케 하느니라』(잠 18:1). 물론 이것은 조 목사만의 문제는 아니고 오늘날 배교한 교회들의 현주소이다. 이들 모두 후(무)천년주의 누룩에 취해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물리적 왕국인 “천국”과 교회의 영적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하지 못하면 심각한 교리적 혼란이 야기된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존중하고, 또 주께서 구분하고 나누신 것을 혼합시켜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