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기의 경륜적 진리 분류
이단들은 왜 사도행전을 좋아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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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03월호>
"이단"이란 단어가 성경에서 처음 등장하는 곳은 사도행전 24장이다. 우선 5절에서, 온갖 듣기 좋고 그럴듯한 말로 아첨을 떨었던 변사 터툴로가 교회 역사상 가장 신실했고 성경대로 가장 잘 믿고 실행했던 사도 바울을 『나사렛 이단의 두목 』이라 부르며 총독 펠릭스 앞에서 고소할 때 쓰였는데, 여기서는 집단적인 개념의 "이단 종파"(sect, 딛 3:10 - heretick)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14절에서,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오니 즉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그 도 를 따라서 내가 내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서들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으며』라고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면서 그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때는 종파보다는 교리적인 개념의 "이단 교리"(heresy)의 뜻으로 쓰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유대인 집단이 바울이 전파했던 진리의 말씀을 이단으로 정죄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단"이란 용어는, 성경을 거부하는 거대한 "종교 집단"(유대교, 로마카톨릭, 그리스정교, 개신교, 공회들, 교단들 등)이 성경대로 믿는 사람을 부를 때 처음 사용된 것이다. 이런 사실은 "첫 언급의 법칙"에 따라 이단이란 단어가 이후 교회사 2천여 년 동안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가늠하게 해 준다. 말하자면 그 진짜 이단들에 의해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이단으로 낙인찍히며 피 흘린 발자취를 남겨야 했던 것이다.그러나 이단은 그런 왜곡된 의미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데, 이는 그것의 올바른 정의가 " 성경 말씀을 변개시키고, 사사롭게 해석하며, 문맥을 무시한 채 특정 성경 구절만 뽑아서 만든 비성경적인 가르침 "이기 때문이다. 이 정의에 의하면, 개역성경 및 개역개정판 등의 변개된 성경들을 쓰는 자들은 모두 이단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이브처럼 마귀의 덫에 쉽게 걸려드는 미혹된 자들이고(창 3:1-3), 예후디처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성경을 난도질하는 무뢰한들이며(렘 36:23), 사카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눅 1:18-20). 하나님께서는 그런 불한당들을 반드시 심판하시는데, 사카랴의 경우에는 "벙어리"가 되게 하시어 천사가 전해 준 말들이 실제로 이루어질 때까지 말을 못하게 만드셨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는데, 곧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눅 1:20). 이런 이유로 케네스 테일러, 필립 샤프, 트레겔레스, 웨스트코트, 필립스 등의 성경 변개자들이 목소리를 잃었던 것이다. 그 내용이 게일 립링거의 저서 <뉴에이지 성경역본들> 제31장에 나온다. 그런데 이 책이 출간된 지 몇 년 후에 그것이 거짓임을 밝힐 목적으로 미국의 배교한 보수주의자 존 앵커버그가 NASV, NIV, NKJV 등 다섯 개의 성경 번역 위원회의 학자들을 전국적으로 방영되는 기독교 프로그램에 초청한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는 <킹제임스성경>을 최종권위로 믿는 학자 몇 사람도 참석하게 해서 이들을 바보로 만들 계획까지 세웠다.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앵커버그는 게일의 책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면서 과연 그 책에 기술된 대로 목소리를 잃은 학자들이 있었는지 질문했다. NIV 번역 위원회 출신의 학자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NKJV를 대표하는 아더 파스타드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런데 앵커버그가 NASV를 대표하는 돈 윌킨스 박사를 쳐다보며 똑같은 질문을 하려던 순간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겁을 집어 먹은 그는 힘겹게 침을 넘기는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제... 제가... 목소리를 잃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무척 충격을 받았고, 즉시로 앵커버그는 카메라맨에게 손짓하여 이 장면이 절대 방영되지 않도록 지시했다. 하나님의 경고를 우습게 여기는 자들은 누구인가? 『완고한 혀는 끊어지리라』(잠 10:31). 『주께서는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교만한 것들을 말하는 혀를 끊으시리라』(시 12:3). 『거짓말하는 입술로 잠잠케 하소서』(시 31:18). 성경을 변개시킨 자들을 포함한 모든 이단들은 이 엄중한 심판을 피해갈 수 없다!
성경에서 이단들이 자기들의 거짓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즐겨 인용하는 책들 중 하나는 "사도행전"이다. 자기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벌 떼처럼 사도행전으로 달려드는 것이다. 그들이 이 책을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사도행전이 어떤 책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 이 책의 특징에 대해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데, 무지가 맹목적인 사랑을 낳은 것이다! 그들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올라왔다가 원폭 실험으로 인한 방사능에 노출되어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막을 향해 나아갔다가 뜨거운 햇볕에 말라 죽은 비키니 섬의 바다거북들 같고, 한 곳에서만 맴돌다가 죽는, 더듬이를 잃은 곤충들 같은 자들이다. "방향 감각"을 상실한 것이다. 또한 말씀을 제대로 섭취하지도 소화시키지도 못하여 영양실조에 걸린 자들과도 같다. 『젖을 사용하는 자는 누구나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하나니, 이는 그가 아기이기 때문이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이니, 그들은 그 말씀을 사용함으로 감각들을 단련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사람들이라』(히 5:13,14). 하나님의 말씀은 젖, 물, 꿀, 빵, 사과, 씨, 곡식, 고기 등으로 비유되는데,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젖"만 먹어 가지고서는 결코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를 수 없다. "단단한 음식"(strong meat), 곧 "고기"도 섭취할 줄 알아야 감각들을 단련해서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수준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영적 감각이나 분별력도 없는 자들이 교계 강단을 차지하고 앉아 성경을 가르치려 하고 있으니, 어찌 이 나라에 부흥이 있을 수 있겠으며 성경대로 믿는 일꾼이 길러질 수 있겠는가!
이처럼 고기와도 같은 책이 사도행전이다. 마태복음과 히브리서 역시 질긴 고기에 해당하는 책들이다. 우리는 이런 책들을 "과도기적인(전환기적인) 책들"이라 부른다. 이런 책들에는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본지 제270호, 『과도기의 경륜적인 진리 4』, pp. 26-31 참조). 첫째 , 하나가 아닌 두 개 이상의 시대 및 경륜을 다룬다. 둘째 , 둘 이상의 경륜들 각각에 속하는 서로 다른 "대상들"(이를테면 "유대인"과 "교회")과 그 각각의 대상들에게만 적용되는 서로 다른 "교리들"이 동시에 등장한다. 즉 서로 다른 교리들이 상호 중첩되는 "교차로"가 존재하는 것이다. 교차로에서의 교통사고 사망률은 매우 높다! 그래서 이곳 사도행전 내의 교차로를 아무 생각 없이 건너다가 영적으로 사망해 버리는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허다한 것이다. 셋째 , 신약 안에 있지만 "구약적인" 책들이다. 그래서 신약적인 교리들로 일관하지 않고 교회 시대에는 적용할 수 없는 구약적인 교리들도 다수 등장한다. 이 점을 유의하지 않고 무딘 감각에 비뚤어진 마음으로 무턱대고 사도행전으로 덤벼들면 덫에 걸리기 십상이다. 『마음이 비뚤어진 자의 길에는 가시와 덫이 있으나』(잠 22:5). 지난 2천여 년의 교회사에서 대부분의 교리적인 오류들은 이런 과도기적인 책들을 억지로 풀었거나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그런 자들에게는 이 책들이 최대의 걸림돌이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의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계셨을 때,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을 대적하려고 여러 차례의 논쟁을 걸었다. 그중에서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해 논쟁을 건 주제는 "부활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는 거짓 교리를 정당화하려고 구약성경을 어설프게 인용했는데(신 25: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성경을 모르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마 22:29). 거짓 교리를 주장하는 이단들은 성경을 인용해 가면서 아는 체해 보지만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다. 성경을 나누어 볼 줄 모르면(딤후 2:15) 성경을 안다고 말해선 안 된다. 단단한 음식(고기)을 먹을 줄도 모르고(히 5:13,14), 또 성경을 억지로 푸는 자들은(벧후 3:16) 성경을 안다고 말하면 안 되는데 그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은 지금 당장 강단에서 내려와야 한다! 하나님께서 과도기적인 책들을 주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이런 거짓 교사들을 끌어내시기 위함이다. 고린도전서 11:19에서는 『이단들도 있어야만... 인정받는 사람들』, 곧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진가가 드러난다고 말씀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제대로 믿고 아는 것에 관한 한, 누가 "옥석"인지 가늠하게 해 주는 "시금석"이 바로 과도기적인 책들인 것이다 .
사도행전 안에 기생하려는 간교한 이단들로는 소위 신유와 방언을 내세우는 오순절 은사주의자들, 침례(또는 세례)에 의한 중생을 가르치는 로마카톨릭과 그리스도의 교회,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 극단적 칼빈주의자들, 극단적 세대주의자들 등이 있다. 이들은 사도행전에서 특정 구절들을 자기들의 구미에 맞게 제멋대로 끄집어내어 거짓 교리들을 정당화하고, 또한 자기들이 정해 놓은 교리의 틀 안에 성경 구절들을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으며, 심지어 그에 부합하도록 아예 성경을 고치는 악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사도행전은 마태복음(및 다른 복음서들)의 뒤를 이어 교리적인 진전과 변화가 나타나는 책이다 . 마태복음이 구약에서 신약으로 전환되는 과정 속에서 신약의 문을 연 책이라면, 사도행전은 이미 열려진 신약 안에서(마 27:50) 시작되는 책이다. 마태복음은 신약조차 열리지 않은 상황에서, 곧 구약의 연장선상에서 시작된 반면, 사도행전은 이미 예수님의 "새 언약의 피"(마 26:28)가 흘려진 상황에서 출발하고 있다. 심지어 사도행전 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오순절 날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계획된(엡 1:4) "교회"가 시작되기까지 한다. 이런 이유로 많은 거짓 교사들이 사도행전의 구절들을 교회 시대의 교리로 무분별하게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 대해 주의 깊게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 제자들은 최초의 신약성경이 기록된 사도행전 9,10장에 이를 때까지는 어떤 신약성경도 갖고 있지 않았다 . 그들에게는 창세기부터 말라키까지의 구약성경밖에 없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시작되었고, 심지어 사도들이 그 몸 안으로 들어가는 성령침례를 받았을지라도(행 2장), 그들 가운데 교회 시대를 위한 교리와 성경적 믿음과 실행이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실 그들에게 계시조차 되지 않았는데(최소 사도행전 7장까지는 그러했음), 이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계시해 주시기 위해 준비해 두신 일꾼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엡 3:1-7). 그는 "바울"로서 사도행전 7장 끝에 가서야 비로소 등장한다(행 7:58). 따라서 제자들은 여전히 구약에서 예언된 물리적인 "메시아 왕국"을 기다리고 있었고(행 1:6), 마태복음 10장에서 위임받은 천국복음을 전하면서 표적과 이적들을 행했으며, 이방인들이 아닌 오직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만을 상대하려 했다. 이런 역사적인 상황에서 눈에 불을 켜고 교회 시대의 교리를 찾으려 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짓이다. 그분의 명령대로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성령께서 "조명"을 꺼 버리시는 것이다. 특히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이다. 일종의 "역사서"인 것이다. 교리적인 내용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교리서는 아닌 것이다. 교회 시대의 교리를 명확하게 담고 있는 13권의 바울 서신을 옆으로 제쳐 두고 "1권의 역사서"에만 매달려 교리를 정립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깨달아야 한다. 그런 자들은 영적 분별력이 없는 어린 아기들이거나 탐욕을 품고 지어 낸 말로 교인들에게서 돈을 갈취하려는 거듭나지 않은 거짓 교사들임에 틀림없다(벧후 2:1-3).
사도행전은 "이스라엘"을 위한 경륜에서 "교회"를 위한 경륜으로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 . 그래서 이 책에는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천국복음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으로 전환되는 과도기의 말씀들이 다루어진다. A.D. 30-63년의 기간 동안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은 마태복음에서 로마서로 이어지는 과도기적인 책이다. 그래서 새 언약의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죽으심"(이것은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이 태어날 길을 마련해 준 사건)과 이방인을 위한 사도였던 "바울의 서신서들"(이것은 교회 시대를 위한 교리들을 확정해 주는 책들) 사이의 과도기에 있었던 경륜적인 진리와 실행이 어떤 것이었는지 제시해 주고 있다.
사도행전 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셨고, 2장에서는 예수님의 약속대로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유기체인 교회가 중심이 되는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가 무르익기 전까지 여전히 이스라엘을 "천국복음"으로 다루고 계셨다. 즉 갑작스럽게 단숨에 은혜의 복음으로 선회하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이는 율법과 물리적인 왕국에만 익숙해 있음으로 인하여 교리적인 혼란에 빠질 수 있었던 당시의 성도들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다 . 앞서 언급했지만 사도들은 성령침례를 통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몸을 형성하고 있었음에도, 교회 시대나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진리를 깨닫지는 못했다. 여전히 그들의 관심은 지상 왕국에 있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7장을 기점으로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옮겨진다. 이런 과정 속에서 교리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때로는 두 가지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서로 다른 경륜에 속한 교리들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단들은 이런 중요한 사실에 무지하다 . 그래서 아무 관련도 없는 구절들을 자기들의 교리에 억지로 끼워 맞춘다. 이 나라 기독교계에는 그것이 틀렸다고 성경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성경 교사도 없다. 그래서 이단들은 "마음 편히" 로마서로 발길을 옮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이 좋아하는 사도행전에서만 맴돌다가 영적으로 죽어 버린다! 종국에는 성경을 공부할 줄 모르는 무지와 상실된 감각 속에서 파멸을 맞게 될 것이다! 『자기의 수치를 거품처럼 내뿜는 바다의 성난 파도며, 유리하는 별들이니 이들에게 캄캄한 흑암이 영원히 간직되어 있느니라』(유 1:13).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