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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물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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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11월호>
『내가 간구하오니, 들으소서, 내가 말하겠나이다.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나로 알게 하소서』(욥 42:4).『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나로 알게 하소서.』 이것은 고난을 당한 욥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주님께 드렸던 말씀이다. 『나는 깨닫지 못한 것을 말하였으니』(욥 42:3)라고 고백한 이후에 드린 말씀으로서, 지금까지는 그가 깨닫지 못한 것, 즉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말했으나, 앞으로는 섣불리 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묻겠으니 그것을 알게 해 달라는 간구의 말씀인 것이다. 당대에 주님께서 인정하신 의인, "욥"이 고난을 겪은 후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깨닫고 회개하며 드린 말씀이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나로 알게 하소서.』였다면, 우리가 "주께 묻는 일"에 관하여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행하는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의 기준이 항상 "자기 자신"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내어 드릴 권위의 자리가 없다. 원래 주님께서 앉으셔야 할 권위의 자리에 그들 자신이 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성향을 사탄으로부터 전수받았다. 『이는 네가 네 마음속에 말하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가서 내가 내 보좌를 하나님의 별들보다 높일 것이요, 내가 또한 북편에 있는 회중의 산 위에 앉으리라. 내가 구름들의 높은 곳들 위로 올라가, 내가 지극히 높으신 분같이 되리라." 하였음이라』(사 14:13,14). 사탄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렸어야 할 권위의 자리에 자기가 앉으려 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다음과 같은 결말을 맞게 된다. 『그러나 너는 지옥까지 끌어내려질 것이요, 구렁의 사면에까지 끌어내려지리라』(사 14:15). 이것은 또한 사탄의 성품을 가진 죄인들의 운명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은 물을 일이 있을 때 자기 자신에게 묻는 사람이 아니다. 오직 자신의 생명과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물을 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최고 권위자"이시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묻는다. 자기 자신을 자기 삶의 최고 권위자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착각은 사탄의 착각이기도 했다. 따라서 구원받은 성도이면서도 자기의 생명과 삶에 관하여 하나님께 묻지 않고 스스로에게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여전히 사탄의 성품을 가지고 세상 사람처럼 살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주님께 물어야 하는 것인가?
① 어떤 원인 모를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 이유를 주님께 물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수많은 원인과 결과의 연결 고리들로 엮여 있다. 그러나 만일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들이 우리의 삶에 개입되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강력하게 관여하신 것일 수 있다. 『그후 다윗의 때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간 기근이 있어, 다윗이 주께 물으니라. 주께서 대답하시기를 "이 기근은 사울과 피흘린 그의 집 때문이니, 이는 그가 기브온인들을 죽였음이라." 하신지라』(삼하 21:1). 3년간의 기근으로 인해 다윗이 그 이유를 주님께 묻자, 주님께서는 그 일이 사울에게서 기인했다고 알려 주셨다. 한 나라에 3년 연속 기근이 드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기에 국가적으로 매우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주께 물은 것이다. 그가 좀 더 일찍 국가적인 재난에 민감하게 대처하여 1년의 기근 후에 물었다면, 백성들은 2년의 기근을 더 겪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사울과 기브온인들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통치자인 다윗 왕뿐이었다. 주님께서는 다윗이 무언가 반응을 보일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어떤 예기치 않은 일이 지속되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반응을 기다리고 계신 것일 수 있다. 주님께서 보내신 신호를 제대로 감지할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② 무언가를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주님께 물어야 한다. 『이 일 후에 다윗이 주께 물어 말하기를 "내가 유다의 어느 성읍에든지 올라가리이까?" 하니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올라가라." 하시므로, 다윗이 말씀드리기를 "내가 어디로 올라가리이까?" 하니,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헤브론으로 가라." 하시더라』(삼하 2:1). 다윗은 어떤 행동을 실행해야 할지, 가만히 있어야 할지를 판단하고 결정해야 했을 때 주님께 물었으며, 주께서는 분명한 응답으로 다윗의 삶을 이끄셨다. 다윗은 섬세한 시인이었고 전쟁에 익숙한 전사였다. 당연히 상황 판단도 뛰어났을 것이기에, 위 내용의 경우 "올라가야 할 상황"임을 충분히 감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섣불리 행동에 옮기는 대신 주님께 물었다. 물론 주님의 뜻은 그가 헤브론으로 가는 것이었다. 다윗 역시 헤브론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헤브론으로 올라가리이까?"라고 묻지 않고 "어디로 올라가리이까?"라고 물었다. 다윗은 "가느냐 마느냐, 간다면 어디로 가느냐"에 대한 자기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고 주님의 온전한 뜻을 물었던 것이다. 우리도 다윗처럼 주님께 완전한 결정권을 내어 드려야 한다.
③ 주님의 뜻을 행하다가 의심스런 부분이 생겼을 때 주님께 물어야 한다. 내가 주님의 뜻을 행하고 있기에 내가 예상한 대로 일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즉 주께서 의도하신 시기와 장소와 방법이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 5:22,23에서 모세는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그처럼 악한 일을 탄원하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이는 내가 파라오에게 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이래로 그가 이 백성에게 악을 행하였으며, 주께서는 주의 백성을 전혀 구해 주지 않으셨음이니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주께서는 『내가 파라오에게 어떻게 행할는지 이제 네가 보리라.』(출 6:1)라고 말씀하셨다. 모세는 파라오에게 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가 생각한 대로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세 자신의 기대였을 뿐 주님의 계획은 달랐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우를 범할 수 있다. 즉 아무런 근거 없이 자기 생각대로 되기를 기대하는 태도 말이다. 자기가 기대한 대로 일이 진행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구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먼저 주님께 그분의 계획을 알게 해 달라고 묻는 것이 올바른 수순이다.
④ 우리가 바라는 것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해 주님께 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바라는 것이 있다고 해서 함부로 자기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뜻대로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방식이다. 그리스도인은 바라는 것이 주님의 뜻에 맞는지 먼저 주님께 물어야 한다. 『그러자 다윗이 주께 물어 말하기를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리이까? 내가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겠나이까?" 하니, 주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기를 "추격하라. 네가 그들을 반드시 따라잡을 것이며, 틀림없이 모두 다시 찾아오리라." 하시더라』(삼상 30:8). 다윗은 적들을 추격해서 따라잡고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을 다시 찾아오기를 바랐다. 거기에는 그의 아내들도 있었기에 보통 사람 같으면 주님께 묻지도 않고 추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 다급한 순간에도 먼저 주님께 물은 것이다.
예레미야 21:2에서는 시드키야가 주님께 묻도록 예레미야에게 간구한다. 『내가 네게 간구하노니 우리를 위하여 주께 물으라. 이는 바빌론 왕 느부캇넷살이 우리를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킴이니 만일 주께서 그의 모든 경이로운 일들에 따라 우리를 다루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 올라가리라.』 시드키야는 주님께서 경이로운 일들을 일으켜 느부캇넷살을 물리쳐 주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항복하라는 응답을 주셨다. 이에 시드키야는 어리석게도 주님의 말씀에 경청하지 않음으로써 유다 왕국에 큰 고통을 가져오고 말았다. 주님께 물었으면, 어떤 응답을 주시든지 주님께 경청해야 하는 것이다.
⑤ 말씀에 조명을 받기 위해서 주님께 물어야 한다. 『너희는 가서 발견된 이 책의 말씀에 관하여,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주께 물으라. 이는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들에 경청하지 아니하였고, 우리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에게 발하신 주의 진노가 크심이라』(왕하 22:13). 요시야 왕은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관해 주님께 묻게 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한 그는 그 책에 기록된 모든 재앙을 하나도 보지 않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도 존중해 주시는 것이다.
초림 당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 사역을 하시면서 많은 질문을 받으셨는데, 그중에는 주님을 시험하는 질문들도 있었다. 누가복음 20:21,22에서는 선임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보낸 정탐꾼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당신께서 올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누구도 외모로 받아들이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길을 진실하게 가르치시는 줄 아나이다. 우리가 카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나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눅 20:25)라고 분명하게 답변하셨다. 사람의 속마음을 훤히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들의 간계에(눅 20:23) 걸려들지 않으셨던 것이다. 또한 정직하지 못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들의 질문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으셨는데, 헤롯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가 많은 말로 주께 묻되, 주께서는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더라』(눅 23:9).
우리는 구약에서처럼 선지자나 우림과 툼밈을 통해 주님께 묻지 않는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처럼 직접 주님께 물을 수도 없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주님께 묻는데, 이때 헤롯처럼 부정직하고 의심이 가득한 태도로 묻는다면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할 것이다. 겸손한 자세로 우리의 생명과 삶의 주인이신 주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주님께 진지하게 물을 때 자상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의 답변은 성경 묵상을 통해서, 설교 말씀을 통해서, 신실한 성도의 조언을 통해서, 또 환경을 통해서 올 수 있다. 주님의 답변을 놓치지 않고 제대로 감지하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묻는 것을 결코 귀찮아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께 물어야 할 사람이 묻지 않는 것을 매우 싫어하신다. 심지어 묻지 않는 것을 "죄"로 여기시기도 한다. 사울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리하여 사울이 죽으니라. 이는 그가 주께 범한 죄 때문이었으니 그가... 주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를 죽이시고 왕국을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로 돌이키셨더라』(대상 10:13,14). 주님께 물어야 할 것을 묻지 않는 것이 큰 죄인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묻지 않는 자는 주님 대신 자기 자신을 그 권위의 자리에 두고, 주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을 실현하려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생명과 삶의 주인이신 주님을 마땅히 계셔야 할 권위의 자리에 모시고, 모든 필요한 때에 주님께 물음으로써 말씀과 환경을 통해 가장 합당한 답변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야 할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