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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지식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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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10월호>
현재 우리나라는 총체적인 난국에 빠져 있다. 위정자들 중에 지혜와 지식을 갖춘 자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경제, 안보, 외교, 에너지 정책 등 어느 것 하나 망가지지 않은 것이 없다. 일례로 현 정부는 일하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는 "모두가 잘사는 국가"를 만들려 하고 있다. 복지를 통해 정부가 국민의 모든 삶을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년수당, 실업수당, 육아수당, 아동수당, 농민수당, 무상급식 등을 주면서 돈을 뿌려 대고 있지만, 일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들만 더 많이 양산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나(살후 3:10), 이 나라 정부는 진리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이러한 각종 수당들은 시작에 불과한데,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살 수 있을 정도의 "월 기본수당"을 각 개인에게 지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AI"(인공지능)의 발달과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야기될 일자리 감소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옵션으로서,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는 좌파들에 의해 정책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사실 이보다 더 어리석은 정책도 없는데, 이는 그들이 신봉하는 과학에 따르면 가장 보편적인 법칙이 바로 "질량, 운동량, 에너지 보존 법칙"이기 때문이다. 즉 무엇이 되었든지 소비를 하려면 생산해야 하는 것이다. 씨를 심지 않으면 절대로 열매를 거둘 수 없는 법이다. 생산을 위한 방안들을 파괴하면서 소비만 늘리려고 하는 생각이 과연 지혜로운 생각이겠는가?
그런데 이것은 이 나라 정부가 잘못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도대체 왜 그들은 이런 어리석은 일들을 자행하는 것인가? 그들에게 지혜와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잠 9:10)과 "지식의 시작"(잠 1:7)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주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시작"일 뿐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정부 각 부처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곧 지혜와 지식을 시작조차 하지 못한 자들이 가득한 것이다. 세상 명문 대학을 나와 세상을 호령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고 해서 지혜와 지식을 갖춘 것이 아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그 시작의 문턱조차 넘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비웃고 계신다(시 37:13; 59:8). 또한 그들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신다(고전 1:20).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하는 어리석은 자들은(시 14:1; 53:1)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떨기까지 하는 마귀들(약 2:19)보다 훨씬 못한 자들이며, 그들의 말로는 매우 비참하다. 『확실히 주께서는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셨으며 주께서 그들을 파멸에 던지셨나이다』(시 73:1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세상에 사는 모든 날 동안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게 하시기 위함이었다(신 4:10).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도 왕국의 보좌에 앉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서 한 권을 필사해서 평생 동안 그것을 읽어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워야 했던 것이다(신 17:18,19). 이 마지막 때에 한국의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바른 말씀인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주신 목적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게 하시는 데 있다.
그렇다면 주를 두려워하는 것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 당연히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통해 배울 수 있다. 성경은 『주를 두려워하는 데 열중하는 주의 종에게 주의 말씀을 굳게 세우소서.』(시 119:38)라고 말씀한다. 그렇게 열중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 『오, 내가 얼마나 주의 법을 사랑하는지요! 그것이 종일 나의 묵상이 되나이다』(시 119:97).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왕이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공부할 때,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깨달아 알 수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 주는 많은 사례들이 나온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불평불만을 쏟아 내는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신 사건이라든지(민 21:4-6), 주제넘게 행한 반역자들을 죽이신 사건(민 16:1-35),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죄들을 범한 이스라엘 백성을 망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신 28:62,63), 그분의 택하신 백성을 위협했던 앗시리아 군대 185,000명을 죽이신 일(왕하 19:35), 신실한 다윗과 같은 인물도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주님의 모습(삼하 12:7-12) 등이 그렇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다. 의에 대해서는 보상하시고,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징계하시는 분인 것이다. 따라서 죄에게 종노릇하며 사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공의" 때문에 그분의 하나뿐인 아들을 희생시키셔야 했다. 이 희생의 의미를 안다면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의 죄 없으신 독생자를 아끼시지 않고 내어 주실(롬 8:32) 정도로 죄를 증오하셨던 것이다. 죄를 제거하시는 것과 연관해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독생자도 아끼시지 않았다면, 죄 많은 우리를 아끼셔야 할 근거는 더더욱 없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죄 지은 인간을 향해 언제 내려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결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인내를 시험해서는 안 된다. 우리 자신의 행동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속 생각까지 아시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변명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아무도 항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분 앞에 서게 될 날을 생각할 때, 두려움과 떨림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고난과 징계를 통해서도 주를 두려워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가장 사악한 왕은 각각 "므낫세"와 "아합"이다. 여러 악한 왕들이 있었지만 이들이야말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아합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시작부터 멸망까지 배교와 타락의 대로를 열어젖힌 "여로보암의 죄"(왕상 12:25-33)가 그의 눈에 가볍게 보일 만큼 사악한 죄인이었고(왕상 16:31), 므낫세는 남왕국 유다가 멸망하게 된 원인이었을 정도로 가증한 죄인이었다(왕하 23:26). 만일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써 주를 두려워하는 것을 배웠다면, 이런 사악한 왕들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율법의 말씀을 통해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사례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아합의 경우 그가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탈취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시어 그에게 엄중한 경고를 주셨다(왕상 21:21-26). 저주받은 죽음으로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였는데, 그때 아합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겸손해졌고 그의 걸음을 조심스럽게 했다(왕상 21:27-29). 심판에 관한 경고만으로도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웠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 잠깐 동안의 겸손이 평생에 저지른 죄악에 대한 심판을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므낫세도 마찬가지였다. 주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온갖 악행을 저지른 므낫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앗시리아를 통해 심판을 내리셨는데, 곧 앗시리아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침공하게 하셔서 그를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하신 것이다(대하 33:11). 그러한 고난이 닥치자 므낫세는 마음이 크게 겸손해져서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남왕국 유다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를 드렸는데,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그의 간구대로 그를 유다로 다시 데리고 오셨다. 이때 므낫세가 『주,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더라.』(대하 33:13)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운 므낫세는 이방 신들과 우상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거했고, 우상에 바쳐진 제단들을 내버렸으며, 하나님의 제단을 개수하면서 백성들에게 주 하나님만 섬기라는 명령을 내렸다(대하 33:15,16). 하지만 그런 잠깐 동안의 겸손이 이미 정해진 유다 왕국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두 왕들은 비록 잠깐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생 마지막 문턱에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울 만큼 약간의 "지혜와 명철"(욥 28:28)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 두 왕들과는 달리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왕도 있었다. 남왕국 유다의 아하스 왕이 그러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사악한 므낫세 왕보다도 못할 만큼 명철이 전혀 없는 왕이었다. 아하스는 다마스커스에서 그들이 시리아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던 제단을 보고 얼마나 큰 인상을 받았던지 그 양식과 모양대로 제단을 만들어 솔로몬 성전에 두었고, 이미 있던 거룩한 제단은 "새롭게 만들어진 제단"의 북편으로 치워 버렸다(왕하 16:10-14). 뿐만 아니라 앗시리아 왕을 위해서 성전을 개조하기도 했다(왕하 16:17,18). 또한 우상 숭배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자녀를 불사르기까지 했다(대하 28:3). 이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시리아, 에돔, 필리스티아 등 주변 이방 왕국들을 통해 아하스를 심판하셨지만, 그는 앞선 왕들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겸손해지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이 아닌 앗시리아 왕을 의지했다(대하 28:20,21).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지는 않고, 더욱더 주님을 거역하여 더 많은 죄를 저질렀던 것이다(대하 28:22). 이렇게 명철이 전혀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얻어맞으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법이다. 그래서 어리석은 아하스는 오히려 더 화를 내고 반항하고 거역하면서 하나님의 전의 기명들을 부숴 버리고 성전 문을 닫아 버리기까지 했다(대하 28:24). 창조주이시고 구속주이시며 심판주이신 온 우주의 왕께서 친히 바로잡으시고 교훈을 주셔도 아하스는 전혀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의 인생은 죄의 대가만 치르다가 끝나 버리고 말았다.
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의 공의와 심판 때문이다. 만약 심판이 없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선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모든 마음을 살피시고(대상 28:9) 감찰하시는(잠 21:2)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심판하시기에, 우리는 이곳 지상에서의 삶을 두려움 속에서 지내야 한다(벧전 1:17).
아무리 어떤 사람이 세상에서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며 높은 자리에 올라 승승장구한다 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지혜와 지식을 시작조차 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다. 반면에 세상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주님을 두려워하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지혜와 지식을 배우고 있는 현명한 사람이다. 종국에는 지식인이요, 지성인이라 불리는 세상의 수많은 죄인들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고(고전 1:27), 우리 현명한 그리스도인들은 영광스럽게 통치할 것이다(계 20:6). 만왕의 왕이신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