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전쟁 분류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면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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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09월호>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그것은 인류가 오랜 세월 지나온 길이었다. 옛말에도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인데, 그만큼 죄인인 인간은 매우 호전적인 존재다. 그래서 성경은 전쟁이 인간 내부의 본성에서 비롯된다고 말씀한다. 『너희 중에 싸움과 다툼이 어디로부터 오느냐? 너희 지체들 속에서 싸우고 있는 너희 정욕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냐?』(약 4:1) 인간의 악한 본성이 완전히 바뀌지 않는 한 전쟁은 사라질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쟁은 인간의 "생존 양식"인 셈이다. 북한의 김정은이 미친 짓을 멈추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45년 국제연합이 소위 "인류의 화평을 위한 최후의 보루이자 최선의 희망"으로 창설되었지만, 결국 그것은 죄인들의 망상이었음이 지난 72년 동안의 갖가지 무력 충돌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정욕적인 인간은 결코 전쟁을 포기할 수 없고, 전쟁에 빌붙어 기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또 다른 한편으로 전쟁은 하나님께서 세상 정욕들에 사로잡혀 있는 죄인들을 이 지상에서 심판하시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실제로 하나님과 율법을 버리고 우상 숭배로 나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통해 심판하셨다. 외세에 의한 침략 전쟁도 있었지만 때로는 "내전"이 일어나게도 하셨다. 대표적인 경우가 재판관기에 나오는데, 이 책에는 세 차례의 내전이 등장한다. 첫 번째 내전은 불법적으로 왕이 되려 했던 아비멜렉 때문에 일어났다. 그는 왕이 되기를 거절했던 아버지 기드온과 달리 자기 고향 사람들을 선동하여 왕이 되고 싶은 자신의 정욕을 채우려 했다(판 9:1,2). 기드온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이 다시 배교하기 시작했을 때(판 8:33,34),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으로 인해 발발한 이 내전으로 그분의 백성을 심판하신 것이다. 두 번째 내전은 에프라임의 정욕에 따른 시기와 불만에서 비롯되었는데(판 12:1), 그 결과 에프라임 사람 42,000명이 죽는 최악의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세 번째는 재판관기 20장에 나오는 베냐민 지파와 다른 지파들 간에 벌어진 내전이다. 이 전쟁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에서 한 레위인의 첩이 벨리알의 아들들인 동성연애자들에 의해 비참하게 욕을 당해 죽은 사건에서 기인했는데, 이로 인해 베냐민 지파가 완전히 사라질 뻔한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판 21:6).
이처럼 내전은 유독 재판관기에서 많이 등장한다. 재판관들이 다스리던 때의 가장 큰 문제는,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말씀과 관계없이 개인의 양심과 생각 또는 개인적인 지식과 신념에 따라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하는 데 있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니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판 21:25). 이것이 배교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요 원인이었고, 결국 "내전"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그런 실상은 특히 마지막 세 번째 내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당시 참담한 일을 겪었던 레위인은 베냐민 지파의 벨리알의 아들들이 저지른 참상을 각 지파들에게 알리기 위해 자기 첩의 시신을 훼손시켰고 그것을 열두 조각으로 나누어 이스라엘의 모든 지경으로 보냈다(판 19장). 이 처참한 광경 앞에 다른 열한 개의 지파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논의하기 위해 재판관기 20장에서 미스페로 모이게 된다. 그들은 잔혹한 짓을 저지른 벨리알의 아들들을 처단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로 모였는데 칼을 뺀 보병이 40만 명이나 되었다(1,2절). 그들은 모두 한 사람같이 일어나 말했고, 한 사람처럼 합심하여 베냐민을 치기 위해 모였다(8-11절). 이스라엘 안에 벌어진 악행을 처단하고 악을 제거하기 위한 매우 일치된 행동이었다. 심지어 그 벨리알의 자식들이 행한 이 악행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그 사실 관계를 규명하기 위해 베냐민 지파에게 묻기도 했는데(12절), 이것은 신명기 13:13,14에 나오는 율법의 명령을 따르는 적법한 행동이었다. 여기까지는 모든 것이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일을 해결함에 있어서 "처음부터" 하나님께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분명 『주 앞에 한 사람같이』 모여 있었으나(1절) 주님께 조언을 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어떤 선한 목적을 위해 사람들끼리 뭉치고 동맹한다 하더라도 그 안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사 8:11-13). 그 모인 숫자가 40만 명, 아니 그 이상의 숫자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 한 승리의 가능성은 제로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빌 4:13).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성공 가능성은 100% 이상이 되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무일푼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미스페에 모인 백성들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인가? 당시는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최우선적으로 주님께 조언을 구하지 않고 행동한 것에 대한 열매를 톡톡히 거두게 된다. 즉 3일 동안 치러진 내전에서 처음 2일 동안은 15배 이상의 전력을 갖추고도(15-17절) 베냐민 지파에게 완패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처음 모였을 때 조언을 구하지 않았던 그들이 전쟁 준비를 다 갖춘 연후에는 돌연 주님께 조언을 구하기 시작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집에 올라가 하나님의 조언을 구하여 말하기를 "우리 중에 누가 먼저 베냐민 자손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하니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유다가 먼저 올라가야 하리라." 하시니』(18절). 그들은 하나님께 무얼 해야 할지를 기도했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대답해 주셨다. 이것만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으니 22,000명의 전사자가 생긴 것이다(21절). 그래도 첫 패배일 뿐이니 이들은 승리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용기를 내어 전열을 가다듬은 뒤 다시 주님께 조언을 구했고 이에 싸우러 가라는 응답을 받는다(22,23절). 그러나 결과는 또 패배였다. 18,000명이 추가로 전사했으니(25절) 두 번의 전투로 4만 명(10%)의 사람이 죽은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분명 하나님의 조언을 구했는데 왜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것인가? 이에 대해 믿음 없는 자들이 보이는 한결같은 반응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지 않아, 주님은 날 버리셨어, 기도해도 소용없어,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 거짓이야."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기도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조언을 구하면서 "우리가 베냐민 지파와 전쟁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우리는 베냐민 지파와 싸우러 갈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싸우러 올라가야 합니까?"라고 물었던 것이다. 이 두 기도의 차이를 알겠는가? 전자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이지만, 후자는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조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계획을 자기가 먼저 정해 놓고 그 일을 수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제가 이 일을 해도 되겠습니까?"가 아니라, "주님, 저는 이런 일을 할 건데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기도는 결코 응답될 수 없다. 가장 먼저 "싸우러 가도 되는지, 가면 안 되는 것인지"를 물은 다음, 싸우러 가야 한다면, 반대로 싸우지 말아야 한다면 그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보여 주시라고 기도했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목적과 이유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목적과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기도한 후에 언제, 어떻게, 어디로, 누가 먼저 가서 싸우면 되는지 하나님께 조언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그 전쟁은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다. 이 첫 번째 기도에서 열한 지파의 문제는 하나님께 먼저 조언을 구하지 않고 자기들이 할 일을 먼저 정해 놓았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패배의 쓴맛을 맛본 그들은 두 번째 전투에 임하기 전 주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며 첫 번째 기도에서 하지 못한 올바른 기도를 했다. 『내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을 대적하여 싸우러 다시 가야 하리이까?』(23절) 이 질문에 주님께서는 올라가라고 답해 주셨지만 결과는 또 참패였다.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마귀의 간교한 술수를 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마귀는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하게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거부하고 믿음으로 올바른 행동을 취하고자 결심했을 때는 전략을 바꾸어 그 올바른 행동을 "적합하지 않은 시기"에 하도록 만든다. 이런 모습은 신앙생활에서 종종 나타나는데, 이를테면 구령하고 진리의 말씀을 증거해야 하는 순간에 기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성경을 읽고 공부해야 할 때에 구령하러 가도록 충동질하는 것이다. "시기"뿐만이 아니다. 마귀는 매우 간교하기 때문에, 올바른 일을 "적합하지 않은 장소"에서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수행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뜻이 있으시며, 그 뜻에 부합하는 행동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성경적인 방법으로 수행하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간교한 마귀는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회개 속에서 올바른 기도를 하고 있었지만 "올바른 방법"으로 회개하지는 않았다. 하나님께 조언을 구하되 결코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해서는 안 된다. 물론 벨리알의 자식들을 비호하는 가증한 베냐민 지파를 벌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었다. 그렇다고 적합하지 않은 방법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두 차례의 패배를 경험한 그들은 드디어 하나님의 뜻과 올바른 방법을 따라 주님께 조언을 구하게 된다(26-28절). 그 내용에서 앞선 두 번의 상황과 비교하여 어떤 변화들이 생겼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그들은 처음부터 했어야 할 "올바른 질문"을 하나님께 드린다. "우리가 베냐민 자손과 싸우러 가야 합니까? 아니면 그만 두어야 합니까?"(28절) 그리고 하나님의 집에 와서 울며 회개하되 앞선 23절과 달리 그날 저녁까지 금식하면서 "올바르게 회개"했다(26절). 또한 "올바른 장소"에 서 있었으니, 하나님의 집, 특히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장소였다(27절). 앞선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와 연관된 언약궤가 언급되지 않았다. "올바른 사람"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도 했으니, 곧 대제사장인 피느하스를 통해 나아간 것이다(28절).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물을 드렸다. 다시 말해 "주님, 우리에게 주세요,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고..."와 같은 식으로만 기도한 것이 아니다. "합당한 제물"을 가지고 주님께 다가서면서 필요한 것을 구했던 것이다. 히브리서 13:15에서는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합당한 제물로서 찬양과 감사를 계속 드려야 한다고 말씀한다. 내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만을 말씀드리기에 앞서서 먼저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상황이 제자리를 찾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전쟁 승리"에 관한 가장 확실한 응답을 주신다.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들을 너의 손에 넘겨주리라』(28절). 더 이상의 패배는 없었다. 이 약속에 근거하여 열한 지파는 베냐민 지파를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29-48절). 그리스도인의 역사는 영적 전쟁의 역사다. 피할 수 없는 외길 역사인 것이다. 그것이 승리의 역사로 남기 위해서는 우리의 군대 대장이시요 만왕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방법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실패가 없는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