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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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을 때 무엇을 믿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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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2월호>

손주영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강사



『만일 너희가 내가 전한 복음을 굳게 잡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다면 복음을 통하여 너희도 구원받은 것이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달하였나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셔서 게바에게 보이시고 그후에 열두 사도에게 보이신 것이라』(고전 15:2-5).

거리에서 “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셔야 합니다!”라고 외치다 보면, 지나가던 “교인”들에게 훈계(?)를 당하기 일쑤다. 직접 들어본 말들을 몇 개 나열하자면 이렇다. “아니, ‘구원의 서정’에 대해서는 알고나 말하는 거예요?”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는 인간이 스스로 알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구원받는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지 마세요.”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성경에 대해 무지한지를 보여 주는 한 단면이라고 하겠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어떤 복잡한 “서정(순서)”을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고(막 10:46-52, 눅 23:39-43, 롬 10:13), 스스로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것도 아니며(고후 13:5, 벧전 1:9), 애를 써야 겨우 구원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롬 4:4,5, 엡 2:8,9). 성경은 다만 바울이 전파한 복음의 말씀에 제시된 몇 가지 사실들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신다. 누군가가 “신학적 헛소리”로 구원의 확신을 흔들려고 할 때, 우리는 자신이 복음과 관련된 몇 가지 단순한 사실들을 믿고 구원받았음을 떠올리면서 귓등으로 흘려버리면 된다. 그리고 그들을 온유함으로 바로잡아 주면 되는 것이다(딤후 2:25).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구원받을 때 믿었던 사실들이 무엇이었는지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우리는 복음의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었다.

사도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아 성도들에게 전했던 복음은 『성경대로』(고전 15:3)라는 말로 시작한다. 우리 중 대부분은 어떤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 들은 복음을 통해 구원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살전 2:13). 사람의 혼을 구원하고 영을 거듭나게 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지, 누군가의 신학 이론이나, 그의 말과 지혜의 탁월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고전 2:1-5).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이 점은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성도가 명심해야 할 사실이기도 하다. 복음을 전할 때는 상황이 허락하는 한 몇 구절이라도 성경을 직접 펼쳐 그 내용을 입증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행 8:30-35). 성경을 펼쳐 보여 주는 일이 여의치 않다면, 적어도 암송하고 있던 말씀으로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이 “성경”에 근거하고 있음을 확증해 주어야 한다. 명심하라. 복음 전도자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믿게 해야 할 것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둘째, 우리는 자신이 심판받기에 합당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믿었다.

사도 바울이 복음과 관련하여 두 번째로 제시하는 사실은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고전 15:3) 그리스도께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죄를 짓고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민 32:23). 죄는 언젠가 반드시 심판을 요구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진리이다(롬 1:32). 따라서 이성과 양심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유아나 지적 장애인을 제외하면(롬 2:14,15), 죄로 인한 심판의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모두가 죄를 지으면서 살았기 때문이다(롬 3:23). 『선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아니하는 의인은 땅 위에 한 명도 없느니라』(전 7:20).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이는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까닭에 죄가 세상으로 들어왔고, 그 후손들에게 죄를 짓고자 하는 성품을 물려주게 되었기 때문이다(롬 5:12).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먹은 이래로 인류는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를 지으면서 살다가, 죄 가운데 죽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죄에 대한 심판은 언제 어떻게 집행될까? 우선 성경은 그 때가 “죽음 이후”라고 말씀하신다(히 9:27). 그리고 그 때에 “죄”에 대해 내려지는 판결은 “사망”이다(롬 6:23). 이상하지 않은가?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또 “사망”을 언도받는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신다.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즉 우리 죄인들은 “몸”이 사망한 이후에, 또다시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서 “혼”이 영원히 불타는 둘째 사망에 참여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구원받을 때 이상의 진리들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이 지옥에 가기에 합당한 죄인이라는 사실만큼은 인정했다. 말할 것도 없이, 자기가 그러한 운명에 합당한 더럽고 추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면, 남은 선택지는 잠깐 동안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면서 살다가 결국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는 것뿐이다.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이 지옥에 가기에 합당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편이 낫겠다고 결심했기에,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우리는 자신의 죄들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음을 믿었다.

죄와 지옥의 심판에 대해 깨달은 죄인이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구원자”이다. 스스로는 심판을 면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법정에서는 범죄자가 아무리 크게 뉘우치고 선을 행했다고 할지라도 죄로 인한 심판을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 살인을 저질렀다면 살인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하고, 강간을 저질렀다면 강간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 죄가 더 이상 법정에서 유효하지 못하게 되려면, 형이 집행되는 방법 외에는 없다. 벌금을 물든 징역을 살든 사형을 당하든, 형이 집행되고 나서야 사법 체계가 더 이상 그 죄에 대한 심판을 요구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지옥의 형벌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지할 만한 것이 없었다. 종교 행위나 선행으로는 죄와 심판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었다(롬 3:20, 갈 2:16). 스스로 죄와 심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이 무엇인가? 우리에겐 심판을 “대신” 받아 줄 존재가 필요했다. 바로 그 일을 행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가 친히 나무에 달린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죄들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낫게 되었느니라』(벧전 2:24).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희생제물이 되셔서 우리가 받았어야 할 모든 심판을 대신 받으셨고(요 1:29, 요일 4:10), 지옥까지 낮아지셨다(마 12:40, 엡 4:9). 따라서 우리가 제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주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였다면, 죄에 대한 심판은 주님 안에서 이미 집행돼 버린 것이기에 “죄”는 더 이상 그 심판을 요구할 수가 없다(고전 15:55,56). 이로써 우리는 “의롭게” 되어 법률적으로 완전히 “무죄”가 된 것이다! 『율법이 육신을 통하여서는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 그 육신에 죄를 선고하셨으니 이는 율법의 의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롬 8:3,4).

넷째,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역사적 사건”으로 믿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셨다가 셋째 날에 부활하셨다는 것으로 말을 맺지 않고, 그 후에 여러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이셨다는 사실을 덧붙인다(고전 15:5-8).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온갖 이단적인 가르침은 여기서 전부 바스러진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후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일 뿐, 실제로 몸을 입고 부활하신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을 부정하는데, 그들은 주님께서 잠시 “기절하셨다가” 무덤에서 깨어나신 것이라고 말한다. 모두 다 주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일을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에 생겨난 억측이다. 성경은 그 사건이 수많은 “증인들”의 입으로 입증되는 “사실”임을 적시하고 있다. 우리가 믿은 주 예수께서는 “인류의 4대 성인”이나 “위대한 선지자”에 불과한 분이 아니시다. 구원은 “인간 예수”를 믿는다고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고 다시 얻을 권세가 있는 예수님(요 10:18), 즉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딤전 3:16)께서 죄인인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셨음을 믿을 때 받는 것이다(롬 10:9,10).

우리의 구원은 이상의 “사실들”에 근거한다. “사실에 근거한 믿음”은 “느낌”과 다르다. “느낌”은 변하지만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때로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느낌”에 괴로워할 수 있다. 그럴 때면 “사실들”을 꺼내 들어야 한다. 주 예수께서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치셨듯이(마 4:4,6,7,10), 우리 역시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을 근거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해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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