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영적 생활 분류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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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06월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 프레모 레비가 쓴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에는 당시 유대인들의 비참한 생활상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사랑했던 사람뿐 아니라 집과 옷가지 등 말 그대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빼앗긴 존재를 상상해 보라! 과거와는 철저히 단절되어 있고 미래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육체의 고통만 있을 뿐이다. 이곳에 도착한 사람 대부분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기도 전에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수인번호는 그들의 새로운 이름이 되며, 머리카락이 잘리고, 매일매일 아무런 이유 없이 얻어맞고 굴욕을 당한다. 발가벗겨진 채로 점호를 기다리고, 아침저녁으로 울리는 군악대의 연주에 맞춰 일터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한다. 수용소의 미리 정해진 생활 계획표에 따라 나갔다가 들어오고, 일했다가 잠이 들고, 아팠다가 아무렇지 않게 죽어 간다. 정기적인 선발을 통해 유약한 사람들은 가스실로 향한다. 수용소 포로들은 그런 동료를 무력하게 쳐다볼 뿐이다. 마지막 인사도, 유언도 없다. 가스실의 잔해들을 화장터로 운반하고 재를 꺼내 없애는 일은 유대인의 몫이다. 남은 자들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가혹한 고통 앞에서 계속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보통의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 없는 만성적인 허기, 치료 불가능한 상처로 곪아 있는 발등, 이미 육체는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아우슈비츠라는 끔찍한 수용소에서 유대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텅 비어 있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이렇게 참혹한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눈물을 뿌리며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부르짖었다고 한다. “하나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왜 이런 일을 허용하시는 것입니까?” 그들의 피맺힌 절규는 승리한 연합군이 수용소를 탈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수용소를 점검하던 한 병사가 한쪽 벽 후미진 곳에서 예사롭지 않은 글들을 우연히 발견했다. 어떤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기록해 놓은 것 같은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한 유대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 밑에 그 병사의 시선을 사로잡은 또 하나의 문장이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여기에 계십니다!” 그 어떤 고통도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뢰를 무너트릴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는 늘 햇볕이 내리쬐는 좋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도 찾아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애에 “번영의 날”과 “역경의 날”을 병행하게 하신다. 『번영의 날에는 기뻐하고 역경의 날에는 생각할지니, 하나님께서 또한 이것과 저것을 병행하게 하셔서 사람으로 그의 뒤에 있을 일들을 알 수 없게 하셨음이라』(전 7:14). 여기서 번영의 날에 기뻐했다면 역경의 날에는 “슬퍼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자연스럽지만 성경은 “생각하라”고 말씀한다. 역경이 올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슬퍼하느라 시간을 낭비한다. 낙심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경 앞에서 낙심하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생각해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를 위협하고 마음을 위축시키는 고난과 역경이 그저 나쁜 것만은 아닌 것이다. 역경이 닥친 원인을 생각해 보면서 그 어떠한 상황이든지 그 상황을 허락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우리 스스로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역경을 통해 죄를 일깨워 주셨다면, 그 죄를 처리하실 수 있는 분도 주님이심을 깨달아야 한다.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분도 하나님이셨고, 욥에게서 고난을 제거해 주신 분도 주님이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어려운 상황과 위험에 직면하게 하셨다면, 그것에 맞서서 담대히 행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분도 분명 주님이시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지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사자의 입에서 아무런 상처도 없이 다니엘을 건져 내셨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던져지도록 허락하신 주님께서는 친히 그 불길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하셨고, 또 그들을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 못하도록 보호하신 후에 그곳에서 건져 내셨다. 수많은 믿음의 순교자들을 칼과 고문과 화형대에 던져지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하셔서 그들이 담대할 수 있도록 해 주셨고, 결국에는 영광스러운 승리 가운데로 끌어올리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거할 수 있도록 하셨다. 문제는 역경이 닥친 상황 자체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이는 주께서 너의 신뢰가 되시어 네 발이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실 것임이라』(잠 3:26).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것은 주님을 온전히 두려워할 때 형성된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에는 견고한 신뢰가 있으니, 그의 자녀들에게는 피난처가 있으리라』(잠 14:26).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실제로 두려워하고 있는가? 주님의 명령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따를 수 있을 만큼 두려워하고 있는가? 죄를 미워할 만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육신을 증오할 만큼 주님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세상에 대해 진저리를 칠 만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생의 자랑을 지긋지긋하게 여길 만큼 주님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다른 어떤 것도 의존하지 않을 만큼 주님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한 “견고한 신뢰”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견고한 신뢰”를 형성하게 해 준다. 『너의 신뢰가 주께 있게 하려고 오늘 내가 너에게 이것을 알게 하였으니, 바로 너에게라』(잠 22:19). 우리의 신뢰가 주님께 있게 하려고 “무엇”을 알게 했다는 것인가? 『너는 귀를 기울여 현명한 자의 말들을 듣고, 내 지식을 네 마음에 두라. 그것들을 네 속에 간직하면 즐거움이 있나니, 그것들이 모두 네 입술에 바르게 자리잡으리라... 내가 조언과 지식의 훌륭한 것들을 네게 기록하였으니 이는 너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들의 확실함을 알게 하며, 너에게 사람을 보낸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들을 대답하게 하려 함이 아니냐?』(잠 22:17,18,20,21)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 진리의 지식으로 뿌리를 내리고, 그 말씀에 의해 우리의 마음이 압도될 때 우리가 하나님만을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냐? 왕국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에 5:3). 이것은 페르시아 왕이 에스더에게 했던 말이다. 이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일종의 “백지수표”다. 백지수표는 수표를 발행하는 사람의 이름과 도장과 날짜만 기재되어 있고 금액을 포함한 다른 사항들은 비어 있다. 하지만 그 비어 있는 부분을 채우는 순간 수표를 발행한 날짜에 소급해서 효력이 발생한다. 그러니까 백지수표는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수표인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발행해 주신 백지수표가 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한, 우리는 이 백지수표를 들고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주님을 향한 “견고한 신뢰”를 구축하게 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성도에게 종종 이렇게 질문하신다. “사랑하는 누구누구야, 너의 소원은 무엇이냐? 너의 간절한 기도 제목은 무엇이냐? 내가 네게 줄 것을 구하라.” 만일 여러분이 이 질문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된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솔로몬 왕은 밤에 꿈으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줄 것을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지혜”를 구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부와 명예도 함께 더해 주셨다. 선지자 엘리사는 “내가 네게 해 줄 것을 구하라.”라고 요구하는 엘리야에게 “당신의 영의 두 배의 분량을 주소서.”라고 요구했다. 그 일은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 엘리야가 휴거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엘리사는 그 능력을 받을 수 있었다. 반면에 이사야 7장에서 남왕국 유다의 사악한 왕이었던 아하스는 “표적을 구하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교만함과 자의적인 겸손으로 표적을 구하기를 거절했다가 책망만 듣고 말았다. 마태복음 20:21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베대의 자녀들의 어머니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녀는 주님의 왕국에서 자기의 두 아들이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요즘 말로 하면 정부의 요직에서 한자리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누가복음 18:41에서는 예수님께서 소경 바디매오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는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주님께서 지금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내가 네게 줄 것을 구하라.”라고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겠는가? 솔로몬처럼 지혜를 구하겠는가? 바디매오처럼 질병을 치유해 달라고 간구하겠는가? 세베대의 자녀들의 어머니처럼 높은 자리 하나 달라고 요청하겠는가? 아니면 엘리사처럼 영적인 능력을 원하겠는가? 아니면 돈이나 집, 결혼, 자녀, 직장, 진로 문제 등을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겠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구원이나 영적 성장을 위해 기도하겠는가? 아니면 아하스 왕처럼 거드름이나 피우면서 아예 간구조차 안 하겠는가? 나에게 이런 백지수표가 발행되어서 “지금 무엇이든 말만 하면 당장 이루어 줄 것이니, 내가 네게 줄 것을 구하라.”라고 말씀하신다면, 나는 사도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 빨리 오시옵소서!”라고 말씀드릴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오실 때 해결되지 않을 문제는 단 한 가지도 없기 때문이다. 피터 럭크만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는 더 이상 고통도 없고 슬픔도 없으며, 청구서도 없고 세금도 없으며, 가정의 근심거리도 없고 아이들과의 갈등도 없으며, 대머리도 없고 이가 흔들거릴 일도 없으며, 아픔도 없고 관절염도 없으며, 백혈병도 없고 궤양도 없으며, 대장에 이상이 생길 일도 없고 위가 불편하거나 뼈가 부러질 일도 없으며, 실의에 빠질 일도 없고 관에 들어갈 일도 없으며, 처방전도 구급차도 병원도 없는 날이 올 것이다. 만사가 잘될 것이다! 나는 당신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지만 나는 오늘이라도 갈 준비가 되어 있다. 빠르면 빠를수록 더 좋다. 『아멘. 그러하옵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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