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받은 기도의 기쁨 분류
The Joy of Answered Prayers - 참된 용서와 응답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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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2월호>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기도의 응답을 방해한다.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한 지체들을 전혀 용서하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지금까지 저지른 수만 가지의 죄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만큼 치사하고 비열한 짓도 없다. 『너희는 서로 친절하고 다정다감하며 서로 용서하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라』(엡 4:32).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미워하고 원망하는 대상이 있는지 가르쳐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용서하기 힘든 대상이라면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시라고 기도해야 한다. 지속적으로 원망하는 마음이 드는 대상이 있다면 그에 대해 쓴 뿌리가 생기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그러므로 만일 네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가 네게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 생각나거든 네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가서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어떤 사람은 “글쎄요, 저는 아무에게도 반감을 갖고 있지 않는데요.”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혹시 “당신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는가?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오늘 밤 잠들기 전에 그 사람을 찾아가서 그와 화해를 해야 한다. 반대로 당신이 반감을 갖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용서해 주겠다는 편지 한 장이라도 써 보내서 당신의 양심에서 이 고질적인 쓴 뿌리를 제거해 버려야 한다.
몇 년 전 교회의 상담실 한쪽에서 한 자매를 상담한 적이 있었다.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보았다. “자매님, 혹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건가요?” 그녀는 깜짝 놀란 눈빛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반문했다. “왜 물어보시는 거죠? 혹시 저에 대해서 뭐라도 들은 게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자매님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의 원인이 그것 때문인 것 같아서요.” 그러자 그녀는 상담실 다른 쪽에 앉아 있는 한 젊은 자매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기 앉아 있는 자매와 좀 문제가 있거든요. 한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말 한마디도 안 했죠.” “아, 그랬군요.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만일 자매님께서 저기에 있는 자매를 용서하지 않으면 자매님이 갖고 있는 이 고질적인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질긴 싸움이었다. 하지만 십자가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위로부터 내려오는 복도 그만큼 큰 법이다. 인간은 실수하기 마련이지만, 서로를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은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다. 마침내 이 자매가 용기를 내어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가서 그녀를 용서해야겠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자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던 똑같은 부담과 갈등이 다른 사람에게서 상담을 받고 있던 그 자매의 마음속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올바른 마음”으로 돌아왔고, 동시에 상담실 중앙으로 다가와 서로를 용서한다고 말을 하려다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나와 다른 상담자는 이 자매들과 함께 바닥에 무릎을 꿇으면서 작지만 “위대한 부흥 집회”를 가졌고 그 두 사람은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는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바로 내 마음속에 내재된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문제인 것이다. 아직 용서하지 않은 친구나 가족 혹은 교회 안의 형제자매들이 있지는 않은가? 종종 우리는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몇 년간을 서로 말도 안 하고 지내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게 된다. 상황이 이러한데 어찌 하나님께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달라고 “뻔뻔하게” 기도할 수 있겠는가?
얼마 전 나의 동역자인 아이라 생키 형제와 함께 어느 마을에서 한 주 동안 집회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아무런 열매도 없고 하나님의 어떤 능력도 역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이곳에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말을 했는데, 내 옆에 앉아 있던 집회를 주최한 위원장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가고 말았다. 그 말이 그의 정곡을 찔렀던 것이다. 지난 6개월 동안 어떤 형제와 문제를 안고 있었던 그는 즉시로 그 형제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구했다. 그런 다음 그 위원장은 나를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을 이곳에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그날 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고 많은 죄인들이 상담실로 찾아와서 구원을 받았다.
누군가가 잘 말했듯이 세상에서 행해지는 용서 중에는 “아주 추한 용서”도 있다. 이것을 “고슴도치식 용서”(hedgehog forgiveness)라고 하는데, 마치 “가시처럼 쏘아 대듯이 용서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한 상대방을 자신의 “분노의 불길” 속으로 끌고 들어와서 그의 잘못에 대해 불로 지지고 주먹으로 연신 두들겨 준 연후에 용서해 주는 방식인 것이다. 이런 것은 용서가 아니다! 진정한 용서를 하려면 자신의 상한 기분에 대해서도 용서해야 한다. 그것 자체를 마음과 기억 속에서 완전히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설교자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한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는 것은 올바르지도, 합당하지도 않은 태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용서에 관한 한 마음속에 어떠한 악의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되고, 어떠한 원한의 흔적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 복수하겠다는 어떤 계획도 둥지를 틀지 못하게 해야 하며, 그와 관련된 어떤 욕망도 겉으로 드러내는 화평과 화해만큼이나 자리 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한 사람들의 복을 진심으로 구하고 갈망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흔히 사람들이 하듯이 우리를 용서하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용서할 것이지만, 네가 저지른 그 죄에 대해서는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그것에 대해 각인시켜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고 생각해 보자. 당연히 그것을 용서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용서할 것이며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아니할 것임이라』(렘 31:34). 『그가 범한 그의 죄들 중 아무것도 그에게 언급되지 않을 것이며』(겔 33:16).
나는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영원히 지워져서 그 죄가 우리를 대적하여 다시는 언급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런 용서에 대해 설교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그들의 불의에 대하여 자비를 베풀며 그들의 죄들과 불법들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라』(히 8:12).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의 사람들”이 범한 어떤 죄도 언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아브라함이 이집트에서 그의 아내와 관련하여 어떻게 누이라고 속였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참을성을 잃은 모세가 어떻게 반석을 두 번 침으로써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지 않았는가에 대한 언급도 나오지 않는다. 삼손 역시 그의 죄들이 다시는 거론되지 않고 있다. 구약을 보면 눈곱만큼도 “의로운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롯을 신약에서는 『의로운 롯』(벧후 2:7)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이기도 하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우리는 그 어떤 죄도 기억되지 않는 것이다.
설교자 브룩스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용서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때 그 죄를 완전히 제거하신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했듯이 그 죄를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주가 말하노라. 그 날들과 그 때에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아도 아무것도 없을 것이며 유다의 죄들을 찾아도 발견되지 않으리니 이는 내가 남겨 놓은 그들을 내가 용서할 것임이니라』(렘 50:20). 다윗이 므피보셋의 얼굴에서 친구 요나단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가 절름발이라는 사실이나 그 외에 다른 결점 혹은 보기 흉한 모습을 마음에 두지 않은 것처럼, 그분의 자녀들의 모습 속에서 영광스러운 아들의 모습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결점과 흠들을 눈감아 주고 계신다. 이에 관하여 마틴 루터도 ‘주님께서 행하실 위대한 일들을 저와 함께 행하소서. 이는 주께서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죄를 용서한다는 것이 그것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겠는가?”
『죄과들을 용서받고 죄가 가려진 사람은 복이 있도다. 주께서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 영에 간사함이 없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침묵을 지킬 때 온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 밤낮으로 주의 손이 나를 짓누르니 내 진액이 여름철의 가뭄으로 바뀌었나이다. 셀라. 내가 내 죄를 주께 시인하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내 죄과들을 주께 자백하리이다.” 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용서하셨나이다. 셀라』(시 32:1-5). 우선 자기 자신의 죄 문제를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결코 편안히 쉴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용서를 경험한 성도만이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