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특집 분류

“바른 경배”가 “최상의 순종”이다!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5년 10월호>

“경배는 최상의 순종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100% 옳다. 그렇다면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어떤 경배가 최상의 순종인 것인가?” 당신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가? 배교한 교회들에서 세상을 흉내 낸 리드 싱어와 반주자들을 데려다 놓고 쇼를 하는 “찬양과 경배”가 최상의 순종인 것인가? 비성경적인 방언이 난무하는 은사주의자들의 경배가 최상의 순종인 것인가? 아니면 로마카톨릭을 따라하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예배 때마다 반복하는 것이 최상의 순종인 것인가? 한번 대답해 보라.

인간은 심히 육신적이어서 자신의 욕망대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다 받아 주실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위에 열거한 “경배들”은 원칙 없는 제물을 바쳤다가 하나님께 거절당한 카인이 원조가 된 “혼적 종교”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카인은 종교적 욕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분리됨으로써, 다른 것도 아닌 “경배”를 혼잡케 했다(잠 18:1). 카인처럼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이 혼의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경배를 망쳤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2천 년 신약교회사에서 듣도 보도 못한 경배들이 교회들을 오래전부터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그 같은 일을 행할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좋게 여긴다(롬 1:32). “경배”라고 이름을 붙이면 다 같은 경배가 되는 것인가? 그런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반응은 어떠한가? 『헛된 예물을 더 이상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게 가증함이요, 새 달들과 안식일들과 집회들을 모으는 것도 내가 견딜 수 없으니 심지어 엄숙한 모임까지도 악한 것이니라』(사 1:13). 멸망 전의 이스라엘은 “바른 경배”를 상실했다. 율법에 명백히 제시되어 있음에도, 그 율법을 멸시한 결과 “경배”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들처럼 하나님께서 견딜 수 없어 하시는 헛된 경배를 드리는 교회들이 개혁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 하나, “바른 경배”를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

“경배”는 “하나님”을 살아 계신 인격으로서 숭배하되, 신들 중의 신이요, 왕들 중의 왕이시며, 주들 중의 주이신 분, 곧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창조주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리는 일이다.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분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요한 “경배”가 성경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22장”이며,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러 가는 상황에서 언급된다. 『아브라함이 그의 청년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서 머물라. 나와 아이는 저기로 가서 경배드리고, 다시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 22:5). 이렇듯 성경에서 최초로 언급된 “경배”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배자인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삭)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바쳤다. 이 점은 경배가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일임을 보여 준다. 둘째,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배는 “아버지”(아브라함)가 “독자”(이삭)를 제물로 바치는 “피의 제사”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피의 제물”로 바쳐지게 하신 일을 예표한다. 셋째, 하나님께 경배드린 후 자신과 이삭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 아브라함은 이삭의 “부활”을 믿고 있었다(히 11:19).

위와 같은 사실이 “경배”에 관해 증거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신 십자가”에 근거를 둔 경배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이들의 경배를 받아 주신다는 것이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다가 삼 일 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제사와 관련 없이 드려지는 경배는, 하나님을 이교도들처럼 찾고 있는 종교인들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주일이면 거듭나지도 않은 자들이 몰려들어서 자신들의 종교심을 만족시키려고 드리는 경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지도 않았고 그분의 부활을 믿지도 않는 자들이 육신적으로 드리는 경배는 하나님께 완전히 거부당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자신의 종교심이 무시당한 것에 대해 자존심이 상해서 “지금은 신약 시대인데 왜 구약성경을 들먹거리느냐”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런 몰지각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실 말씀이 없으시겠는가? 당연히 있으시다. “신약성경”에서 “경배”가 최초로 언급될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계시하신다. 『그들이 그 집에 들어가서 그 어린아이가 모친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 보물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 2:11). 예수님께 “경배드린” 현자들이 주님께 예물로 바친 것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었다. “황금”은 “왕”을 위한 것이고(왕상 10:16-21), “유향”은 “제사장”과 관련 있으며(출 30:34-38), “몰약”은 “선지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준다. 주님께는 지상 생애의 마지막에도 “몰약”이 드려졌는데(막 15:23), 그럼으로써 현자들의 “몰약”은 선지자로서(신 18:15-17, 마 21:11) 사역하다가 죽으실 주님을 보여 준다. 이처럼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경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주님의 피흘리신 죽음과 무관하게 드려지는 육신적인 경배는 하나님께서 지시기에 피곤한 짐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창세전에 택함받은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고 믿는 칼빈주의 교회들과, 주님의 피로는 부족하니 인간의 행위가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알미니안주의 교회들에서 드려지는 경배는 하나님께 완전히 거부당하고 있다. 구원이 잘못된 사람들은 바른 경배가 불가능한 것이다.

“경배”에 관해서는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두 사람은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잘못된 방법으로 나아갔다가 죽임을 당했다.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각자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그 안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담아 주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지 않으신 다른 불을 주 앞에 드렸더니, 주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그들을 삼키니 그들이 주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2). 성경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과 관련하여 “다른 불”을 강조한다. 『주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지 않으신 다른 불』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불”이 있음을 뜻하는데, 이 불은 위의 레위기 10장 바로 앞 절인 “레위기 9:24”에 나와 있다. 『주 앞에서 불이 나와서 제단 위에 있는 번제물과 기름을 불사른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주님께서 명령하신 불은 “주 앞에서 나온 불”이었다. 바로 이 불로 번제단 위의 제물을 살랐고, 이 “번제단 불”을 가져다가 향을 태워야 했던 것이다.

“번제단 불”로 태워 올리는 “향의 연기”는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를 상징한다. 『내 기도가 주 앞에 향처럼 놓이게 하시며 나의 손을 들어올림이 저녁 희생제 같게 하소서』(시 141:2). 『향을 피우는 그 시간에 온 백성의 무리가 밖에서 기도하고 있는데』(눅 1:10). 『향으로 가득한 금호리병들을 가지고 그 어린양 앞에 엎드렸으니, 그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 그 향의 연기가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그 천사의 손에서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더라』(계 5:8; 8:4). 이로써 “향”을 태우는 “향제단”은 “기도의 제단”이 된다. “기도의 제단”에서 태워지는 향의 연기는 “기도”를 상징하는데, “기도”를 상징하는 이 향은 “어린양”을 불태우던 “번제단 불”로 살라야 했다. 이 점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불 같은 진노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바탕을 두어야 함을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무관한 기도는 “다른 불”로 태워진 향의 연기와 같아서 하나님의 진노를 살 뿐이다.

성경은 “죄인들의 향로들이 그들 자신의 생명을 거스른다”(민 16:38)고 말씀한다. 종교적인 죄인들의 잘못된 기도가 그들 자신의 죽음과 멸망을 가져올 수 있는데, 특히 배교한 교회들이 예배 때마다 외우는 “주기도문”(마 6:9-13)이 그렇다. 교회들에서 “주기도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 주신 “제자들의 기도”로, 교리적으로는 대환란 때 유대인들이 “아버지의 왕국”을 기다리면서 드리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유대인 제자들이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시옵고,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시오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 10)라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아버지의 왕국』이 문자적으로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고 있기에, 적그리스도의 박해 아래서 매일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마 6:11), 남을 용서해야만 자신도 용서받을 수 있는 “행위 구원”을 추구하면서(마 6:12) 다시금 “아버지의 왕국”을 최종적으로 언급한다. 『그 왕국과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니다. 아멘』(마 6:13). 이 “제자들의 기도”에는 주님께서 기도할 때 사용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이름”도 없고(요 16:24), 십자가의 피의 공로(골 1:14)와 율법의 행위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롬 3:21)도 강조되지 않는다. 그와 같은 기도를 카톨릭을 흉내 내며 반복적으로 외우는 자신을 구원받은 것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지옥에 간다. 그렇다면 그들이 예배 때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은 어떠한가? 그것은 카톨릭을 “거룩한 공회”(Catholic Church)라고 부르면서 “카톨릭 교회”를 “유일한 교회”로 제시하는 카톨릭의 신조이다. 카톨릭은 사도신경을 “신앙고백” 삼아 외워서 답변하거나 앵무새처럼 따라 말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어 자기 교회의 일원이 되게 했다. 그 신조 중의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죽은 성도들과의 교제”)이라는 내용에도 카톨릭의 누룩이 담겨 있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은 기도와 관련된 경거망동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가증한가를 보여 준다. 매 예배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무관한 대환란 때의 기도를 드리고 카톨릭의 신조를 반복하며 자신이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하는 교회들이 하나님께 바르게 경배하는 곳인지 생각해 보라.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23,24”에서 한 영이신 하나님께서 “영과 진리로 경배드리는 참된 경배자들”을 찾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그 구절들에서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 함을 두 번이나 강조하셨다. “영으로 드리는 경배”는 성령님에 의해 영이 거듭난(요 3:6) 성도가 바로 그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롬 8:14, 요 16:13) 드리는 경배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이 거듭남으로써 성령님께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을 통해 자신의 영으로 하나님과 영적 접촉을 갖게 되어 올바른 경배를 드리게 된다. “진리로 드리는 경배”는 변개되지 않은 바른 성경에 근거하여 선포되는 진리의 말씀들에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요 17:17; 16:13) 경배를 말한다. “진리로 드리는 경배”는 변개되지 않은 바른 성경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 경배 중에 불리는 찬송과, 드려지는 기도 역시 진리의 말씀과 일치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기본”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경배는 무의미한 종교 행위로 전락한다. 경배가 부패하면 신앙의 모든 것이 부패한다. 경배의 부패는 교회들의 총체적인 부패를 의미한다. 성경, 기도, 찬양과 같은 신앙의 기본 요소가 “경배” 안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개혁은 로마카톨릭의 변개된 성경과 거짓된 전통을 버리고 바른 경배를 드릴 때 시작될 수 있다. 불완전한 순종은 순종이 아니다. “바른 경배”만이 완전한, 최상의 순종이다. BB

전체 989 / 1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