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특집 목회자 칼럼 분류

그리스도인 자신을 측정하는 잣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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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6년 07월호>

사도 바울은 신약교회사에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여겨진다. 바울은 제1차 선교 여행을 마친 후 안티옥에 돌아와 있었는데, 그때 함께 선교 여행을 다녀온 바나바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파한 각 성읍의 우리 형제들에게 다시 가서 방문하여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아보자』(행 15:36). 말하자면 이것은 자신들의 복음 전파를 통해 세워진 교회와 형제들에게 다시 가서 그들을 돌아보자는 것이었다. 시작은 잘했지만 사도들이 떠나온 이후에도 잘하고 있는지, 혹시 가시밭에 떨어진 씨처럼 잘 자라지 못하고 있는지 살펴보자는 것이었으니, 이 얼마나 지혜롭고 훌륭한 제안인가?

마지막 교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위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비록 우리가 구원받았다 해도, 육신은 언제든지 우리를 넘어지게 할 수 있고 우리의 의지는 약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지막 시대와 관련하여 『그러나 인자가 올 때 그가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눅 18:8)라고 하셨다. 재림이 가까운 지금은 제대로 된 믿음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때이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믿음을 살피고 측정하는 잣대를 항상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잣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이 두려움이 처음 등장한 것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이후였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나,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나이다.』(창 3:10)라는 말씀처럼, 죄를 지은 아담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두려움에 숨었다. 이때부터 죄인 된 인간에게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셨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올바른 두려움은 단지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이는 두려움이 있는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러했다. 하나님께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지체 없이 순종했다. 그러나 이삭을 제단에 묶고 칼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을 만류하시며 『나는 이제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의 두려움은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경외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 두려움을 인정해 주셨다.

이러한 두려움은 구원의 문을 여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이방인 백부장 코넬료에 대해 성경은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행 10:2)라고 기록한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했던 코넬료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를 보내어 그와 그의 온 가족과 친구들을 구원해 주셨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보류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이끄는 강력한 힘이 된다. 성경은 『죄악은 자비와 진리로 정결케 되나니, 사람들이 주를 두려워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잠 16:6)라고 말씀한다. 아이가 나쁜 짓을 하려다가도 아버지의 엄한 매와 질책을 떠올리며 멈추는 것처럼, 그리스도인 역시 죄를 지었을 때 가해질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할 때 악에서 돌이킬 수 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것처럼 내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도 더욱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빌 2:12)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성도는 죄를 멀리하고 죄와 싸워 이김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두 번째 잣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며(요 3:16),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다(롬 5:8). 이러한 사랑을 깨달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제는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것도 “첫째”로 사랑하고 있는지 늘 점검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계명이니라.』(막 12:30)라고 말씀하셨다. 이 첫째 자리를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하거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우상을 두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삶의 첫째 자리에 모시는 성도야말로 온전한 믿음을 이룬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1)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이 순서를 뒤바꾸어 가르치고 실행하는지 모른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 없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입으로만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뿐, 첫째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위선에 빠져 있다. 만약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한다는 핑계로 타협하고 세상과 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행위이다. 성경은 『너희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약 4:4)라고 경고한다. 하나님보다 세상 사람들을 더 기쁘게 하려는 것은 영적 간음과 다름없다.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한다는 것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유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나의 마음과 혼과 생각과 힘이 진정 하나님만을 향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증거하며,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세상에 전파함으로써 주님을 향한 사랑을 삶으로 증명해 낼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세 번째 잣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이다. 성경은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라.』(고전 11:26)라고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고, 마귀를 따르던 진노의 자녀이자 소망 없는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한때 멀리 있었던 너희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힌 중간의 벽을 자신의 죽음으로 허물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으며, 그 구속의 은혜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이 죽으심을 항상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주님께서 그와 같이 피로 사신 교회에게 주신 의식은 “침례”와 “주의 만찬” 두 가지뿐이며, 모두 주님의 죽으심과 관련된 성경적 의식이다. 먼저 “침례”는 구원받은 성도가 주님과 함께 죽고, 묻혔으며, 함께 부활했음을 공개적으로 간증하는 신앙 고백이다(벧전 3:21). 이는 구원의 조건이 아닌 모형일 뿐이기에, “세례”라는 죄를 씻는 의식으로 변개해서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것은 비성경적인 일이다. 또한 복음을 통해 구원받고 침례에 순종한 성도들이 참여하는 의식은 “주의 만찬”이다. 이 만찬식의 빵과 포도주는 주님의 죽으심, 곧 주님의 찢겨진 살과 흘리신 피를 기억하게 하는 “상징”일 뿐인데, 로마카톨릭은 그 빵과 포도주(발효된 술)가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로 왜곡했다. 이와 같은 이교도 종교 집단으로부터 성별하겠다고 일으켰던 종교 개혁이 무색하게, 개신 교회들은 로마카톨릭의 사악한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루터는 물질이 변하지는 않지만 빵과 포도주 “안에, 위에, 아래에” 그리스도의 몸이 물리적으로 함께 존재한다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했고, 칼빈은 물리적 결합은 없으나 성찬식 때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영적으로 임하신다는 “영적 임재설”(Spiritual Presence)을 가르쳤다. 이처럼 개신 교회들도 빵과 포도주에 거룩한 신비주의를 부여하며 주의 만찬식의 성경적인 본질을 흐리게 했던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인간의 편의대로 “누룩”(죄와 거짓 교리의 상징)을 넣은 카스텔라 빵과 발효된 포도주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주님의 죽으심을 바르게 기억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님의 죽으심을 올바로 선포하고 기념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자신이 세운 교회들을 다시 방문하여 성도들의 신앙을 돌아보고자 했던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성도들이 세상의 유혹과 육신의 연약함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바른 믿음을 지키고 있는지를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주님의 재림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진 지금은 참된 믿음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시기이다. 이러한 때일수록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진리의 잣대로 자신을 엄격히 돌아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함으로써 죄를 멀리하고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며, 주님의 다시 오심을 순결하게 기다리는 성숙한 성도로 서 있어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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