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오 목사 설교 분류
기억하고 계시는 일 [베드로전서 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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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8년 01월호>
이 세상에는 조금만 타협하면 피해 보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겠노라고 결심하고 신학교에 들어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거부하고 교단의 종이 된 것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도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교회다니는 사람들은 많은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통받는 것은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편안한 교회생활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걷는 길이요,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요셉은 이집트 포티발의 집에서 청지기로 일했을 때, 죄를 거절함으로 인해서 거짓 혐의를 쓰고 투옥되었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기억하셔서 이집트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섬기는 그의 믿음 때문에 우상에게 절하지 않고, 바빌론 고관들과 타협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자굴에서 살려 주셨고 그 대신에 그를 고소했던 모든 고관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다니엘 역시 바빌론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에서는 어떠했습니까? 부모님께 효도하고 현실에는 충실했을지 모르지만 영원에 대한 가치관을 경시했기에, 영원한 유업을 받을 장자권을 한순간의 배고픔을 참지 못해 팥죽 한 그릇과 바꿔 버렸습니다. 뒤늦게 후회했지만 한 번 잃어버린 유업을 다시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잔꾀나 부리고 속임수에 능했지만 영원에 대한 가치관을 소중히 여기고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장을 받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아서 결국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낳았고, 그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가 의를 위해서 받는 고난은 단순히 선행을 하다가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비진리와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며, 또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누가 의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가?
I.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기도에 열려 있으시다(12절).
여기서 의인이란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교리적인 의인이 아닙니다.
의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은 자신 이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누가 진리를 위해 고난을 당합니까? 진리를 깨닫고 그 가치를 안 성도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고 그것을 지킬 믿음도 없는 사람에게는 죽을 때까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마 5:10). 의로 인해서 고난을 받는데 왜 복이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올바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항상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며 하나님을 진리로 섬기도록 돌보시고 지켜 주고 계십니다. 마치 바람에 촛불이 꺼질 듯하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하는 일을 아시기 때문에 지켜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어떻게 아십니까? 그 일들을 하라고 성도들에게 시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귀는 기도에 열려 있으십니다. 그런데 왜 간절한 성도들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입니까? 어떤 성도는 불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경우들도 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계획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성도가 기도하는 일들이 이루어지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이루어지면 오히려 믿음에서 떠나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고, 어떤 성도들은 기다릴 줄 모르고 바로 응답받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다리를 절게 하신 의도는 야곱이 에서를 만났을 때 에서가 자기 동생 야곱에게 어떤 연민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성도들은 기도하고 응답받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표시하지만, 주님께서는 왜 그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는지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않으시고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선하게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악을 행하는 자들도 모른 척하지 않으십니다. 일일이 그들의 언행을 감시하시고 속마음과 계략들을 살피시며, 대적하시고 그들의 악행에 대해 응분의 벌을 내리십니다. 죄악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하물며 의인을 속이고 해치며, 교회를 속이는 자들이 받을 벌이 얼마나 큰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것도 배우지 못했으면서 남을 가르치려 하고 설교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고 파괴시킨 자들의 죄가 얼마나 큰지 곧 알게 될 것입니다.
누가 의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하는가?
II.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자는 복이 있다(13,14절).
악한 이 세상에서는 의를 위하여 선을 따르는 사람들이 고난당하는 일이 빈번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모든 일에 선을 따르고, 의를 위하여 행동할 때 사방에서 우리를 해치려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와 무관한 자들이 교회에 다닌다면서 가증스런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은 이런 상황을 잘 알고 계시기에 그들의 위협에 두려워하지 말고 동요되지 말라고 조언하고 계십니다. 같은 성경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설교하는데 왜 그들의 교리와 우리의 교리가 다른 것입니까? 왜 그들은 우리가 하는 사역을 하지 못하고 돈과 연관된 일이나 하며, 세상에서 인정받는 일이나 하고, 사역이 아닌 것을 사역으로 가장해서 교회를 장터나 극장같이 만드는 것입니까? 왜 그들은 진리 때문에 한 번도 고난을 받지 않는 것입니까? 그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 하나님과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마귀가 인정하거나 동조할 수 없듯이 마귀의 일들 역시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마귀는 왜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합니까? 세상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동요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동요된 자들은 다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들의 모든 보상은 그 날로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마귀는 성도들이 동요되기를 바라고 위협합니다. 성도가 여기에 굴복하여 의의 길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를 위해 마련된 모든 유업들을 다 상실하게 됩니다. 마치 에서가 현실에 치우쳐 영원한 유업을 무시하여 소중한 것을 다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망각하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과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그것도 선물로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지 않고 이 세상에서 일 년 더 살고, 십 년 더 사는 것을 원하면서 잘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과 영생을 얻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에 열심히 교회에 다녀도 그의 생이 무미건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있고 마귀의 교회들이 있는데, 하나님의 교회에서 쫓겨나서 마귀의 교회에 앉아 있으면서 자신도 무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지금 마귀의 속임수에 속아 인생에 있어서 큰 손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데 왜 행동이 없습니까? 가슴에 불을 품었는데 왜 뜨겁다고 소리치지 않습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 못합니까? 가장 비참한 광경은 하나님의 자녀가 마귀의 교회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사방을 살펴봐도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곳은 지상에서의 지옥의 축소판입니다.
군대에 들어가면 강도 높은 훈련을 받습니다. 보병, 해병대, 특수병과 군인들은 더욱 강한 훈련을 받는데, 점령할 고지를 탈환해야 아군의 희생을 줄일 수 있다고 판단될 때 지휘관이 돌격명령을 내리면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영적 군사들은 어떻게 훈련시키십니까? 고난과 시련을 통해 훈련시키시는데 이것을 경건을 위한 훈련이라고 합니다(딤전 4:8,9). 여러분이 지금 어떤 시련과 고난을 겪고 있다면, 여러분은 경건을 위한 훈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훈련을 질펀하게 지나쳐 버렸다면 그 훈련을 받을 기회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받는 시련과 고난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시련과 고난 가운데 정금같이 빚어져 나와야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허락하시고 못 본 체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나의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본으로 삼으라. 보라, 우리는 견디어 내는 자들을 복 있는 사람들로 여기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또 주의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인정이 심히 많으시고 자비로우시니라』(약 5:10,11).
주님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시면 우리는 고난의 때를, 그분을 증거할 계기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참을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에 맡겼다가 불안해서 다시 가져와 버립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0.1초도 참지 못하고 급히 화를 냅니다. 기도하고 곧바로 응답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구했으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한 것을 잊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시련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 일도 못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사람은 그분을 거룩하게 여기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지 않고 무엇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을 하는 데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연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일을 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을 자기 배와 바꿔 버렸습니다.
누가 의를 위하여 고난을 감수하는가?
III. 주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며(15,16절)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다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주 존귀하신 분으로 대해야 합니다. 주님을 거룩하게 여긴다고 말하려면, 그분을 대할 때 전혀 다른 마음가짐으로 그분을 대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나 예배에 참예할 때, 여러분의 생각이 다른 것으로 뒤섞여 있다면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거룩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기며...”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무 데나 두지 말고 마땅히 모셔야 할 곳에 모셔야만이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아무나 세워 놓은 교회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손으로 지은 곳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마음속에 계십니다. 그러나 마음속이 어지럽혀져 있다면 거룩한 곳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더럽고 지저분한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마음에 모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라오디케아 교회에 들어가지 않으십니다. 배교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쫓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 3:20). 이것이 라오디케아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다고 거짓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담은 구원받은 우리의 몸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하시고,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을 정결케 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계신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정결케 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거룩하게 여긴다는 말이고, 그 의미를 여러분들이 되새기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제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성경대로 장사되신 지 삼 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님께서 내려오셔서 임무교대를 하셨는데, 사람이 손으로 지은 곳에는 계시지 않으시고 오직 거듭난 성도들의 몸 안에 계십니다. 영이 살아난 성도의 몸 안에 들어가셔서 거처를 정하신 것입니다. 거짓말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성령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영이 살아 있는 사람 안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셔서 그 영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성도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 성도들이 모인 곳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지만 그 성도가 불결하고 거짓말하고 죄짓게 되면 그 몸은 성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는 그런 곳에는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떠나 버리시면 그 육체는 육신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로 채워져야 하는데, 성령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육신이 되어 마귀가 점유하기에 최적의 상태가 됩니다(마 12:43-45).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만 믿고 악령이 채워진 것을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마귀짓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짓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되면 구원받은 사람이나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떠나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나라의 교회들은 그런 마귀의 전들을 모아 놓고 마귀짓을 하며 교회 성장이라고 떠들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답변할 것을 온유와 두려움으로 항상 예비하고』(15절).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한다면 복 있는 자들』이라는 이유를 궁금하게 여기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소망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서 온유한 마음으로 이렇게 하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줘야 합니다. 온유란 양보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겸손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낮추되, 불의와 비진리에 담대하게 항거하고 복음 전파와 진리를 수호하는 데 있어서 불굴의 의지와 믿음으로 무장하여 강건한 용기를 간직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겉은 약해 보여도 속은 튼튼한 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고후 4:16). 『그 안에서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느니라』(엡 3:12).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표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성도들은 바른 교회에서 양육받아야 합니다. 물이 있는 곳을 파야 물이 나오지 쓸데없이 아무 곳이나 판다고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와 그렇지 않은 교회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배교한 이 세상에서 진리를 실행하며 성경대로 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실한 성도들에게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마귀는 가정들을 공격하여 파괴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나 홀로” 출석하는 가정들이 많습니다. 마태복음 10:36에서 사람의 원수들은 그의 가족 중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대적하여 살 때는 친구가 되고, 부부 간에 서로 사이가 좋았지만 진리를 따라 섬긴 후에는 싫어하고 원수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마귀는 교회를 속입니다. 그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거짓되이 전하면서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은 모두 마귀의 세력입니다. 영적 분별 능력이 없으면 속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실행하고 수호하는 일이 어려운 것과 고난받는다는 것을 주님께서 알고 계시기에 우리를 지켜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거짓되이 비난하는 자들은 결과적으로 자기들이 부끄러운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용기를 가지고 주님을 찾으면 새 힘을 얻게 됩니다(사 40:31).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