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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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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9월호>
당신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라고 누가 나에게 질문을 해 온다면 나의 대답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때문에 믿는다고 할 것이다. 나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철저하게 믿으며, 또 그 일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이루어 질 것이라고 확신하며 산다.기분으로 그렇게 느끼는가? 아니면 확실한 근거가 있는가? 그것은 기분이 아니다. 성경적 근거가 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너희 오라비(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리라』 하시자 마르다가 대답하기를 『마지막 날에 부활로 그가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했다. 마르다가 알고 있는 부활은 일반적인 부활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일반적인 부활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반적인 부활은 물론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면서 죽지 않고 휴거되는 것을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11:24,25).
또 성경은 고린도전서 15:51에서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라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가 다 죽을 것이 아니요”라는 말이다. 성경에서 잠잔다는 말은 죽는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 꼭 마지막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변화된다. 『마지막 나팔에 눈 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이 말이 개역성경에는 삭제됨)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자가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살며 우리도 변화되리라』(52절). 예를들어 눈먼 사람이 눈이 없는 채로 영원히 산다면 얼마나 저주스러운 삶이겠는가? 간과 신장이 나쁜 사람, 다리가 없는 사람, 이빨이 없는 사람, 허리가 구부러진 사람이 그 불구의 몸으로 천 년을 살고, 영원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저주스런 삶이겠는가? 그런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몸은 변화된다. 『그리하여 이 썩을 몸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또 이 죽을 몸이 반드시 죽지 아니할 몸을 입으리라(53절). 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또 이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할 몸을 입게되면 ‘사망이 승리 속에 삼킨 바 되었노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54절).』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나는 죽어도 그날에 부활하고 또 살아서 믿는 자는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않기 때문에 믿는다(요11:26). 이 구절 끝에 예수님께서는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반문하고 계신다. 당신도 이것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믿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성경은 더 자상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잠들어 있는 자들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살전4:14,15)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죽은 자들이 먼저 살아나고 그 다음에 우리도 들림받는다. 죽은 아기가 먼저 살아나고 그 다음에 엄마도 올라간다. 사별한 남편이 먼저 살아나고 그 다음에 그 아내가 올라가는 것이다. 불의의 사고로 죽음에 넘겨 주었던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나기 전에는 들림받지 못하는 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 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고나서 살아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올라 가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이 말씀을 믿는다면 의심해야 할 것이 조금도 없다. 성경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를 인정해 주고 부여해 줘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최종권위인 것이다.
고린도전서 15:51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몸의 부활과 변화를 이야기할 때에 한 가지 신비를 알려 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신비란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고, 알게 할 수도 없이 감추어진 것이지만 특정한 사람들은 알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신약에서 “신비”라는 단어는 27번 나온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몸에 들어가 한 지체가 된 것은 위대한 신비이다(엡5:32). 복음도 신비이다(엡6:19).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것은 영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무리 설명해 줘도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이다(고전2:14; 요8:47).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썩을 몸이 썩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즉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며 믿고 살아있는 사람들은 들림받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영을 받아 그의 영이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으며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상속받을 수 없느니라』(고전15:50).
일상 생활 가운데서 자기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기 위해서 “내기”를 한다.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이 내기를 하게 될 때, 사실이 판명되면 승자와 패자가 갈라지게 된다. 그런데 이 내기를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죽음”이고 그것은 “휴거”이다. 이미 한 편이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내기를 해서 승패가 갈라졌어도 확인시켜줄 상대가 없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 내기에 앞서 앞으로 이 세상에 이루어질 일들을 인간에게 절대 무오한 진리로 계시해 주고 있으나 인간은 다만 이를 믿으려 하지 않을 뿐이다.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믿지 않은 죄 때문에 세계 인구의 절반이 죽는 유사이래 가장 처참한 상황을 직면하게 된다. 짐승의 표, “666”을 받지 않으면 비누 한 개도 살 수 없게 된다. 그것을 사려면 적그리스도의 세계 본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싫어도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목베어서 죽임을 당한다. 처참하고 처참한 전무후무한 광경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필자에게 시비하지 말라.
지금까지 종말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복음과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모두 자기 유익을 취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실을 제시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앞으로 전개될 일들을 전하는 데 자기 유익과 연계를 시키는 것은 모두 사탄의 계략인 것이다. 순수하게 복음을 전했더라면 왜 오대양 사건 같은 것이 일어났겠는가? 그로 인해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최상의 과제가 구원파로 매도 되어 우스개 거리로 되어 버린 것이다. 사탄이 지배하는 이 세상 제도 하에서 사는 사람은 사탄의 자식들인 것이다. 이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성령이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그들의 죽은 영을 살려주지 않는다면 죽어서 부활도, 살아서 휴거도 안되기 때문이다. 혈과 육은 아무리 종교적으로 다듬고 은사와 능력으로 다듬어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게 된다. 왜 그들은 복음을 돈과 바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희석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였을까?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는 사람들인가?
이장림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휴거를 말했던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가 성경대로 휴거만 전했다면 왜 세상 판사들 앞에 서고, 왜 감옥에 들어가야 했는가? 휴거만 전하면 됐지 왜 선동하는가? 왜 거짓말하는가? 왜 돈을 받는가? 자기는 못 올라가는 줄 알면서 왜 다른 사람들은 올라간다고 속였는가? 왜 그런 행위로 성경적 휴거의 진상을 흐리게 만들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축복된 소망에서 멀어지게 했는가?
‘교회들’은 세상의 종말을 그들 교인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성경대로 믿는 교회들은 여기에 속하지 않음). 마치 김일성이 북한 주민들에게 고정 주파수만 있는 라디오를 주며 국영방송만을 청취하게 하듯이 이들도 자기들의 교단 교리에만 고정시켜 놓는다. “구원은 구원파가 하는 것이요, 휴거는 시한부 종말론자가 하는 것을 보았지 않느냐?” “A.D.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때부터 카톨릭 교회와 그와 친한 친 카톨릭 교회들이 우세했지 않느냐?” “교회 협의회, 세계 교회 협의회가 더 우세하지 않느냐?” “교회도 에큐메니칼 운동에 적극 동참하고 세상에 참여해서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야 되지 않느냐?”
그러나 교회가 할 일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펼치는 주장에 불과하다. 참 교회는 교회의 이름으로 성금하지 않는다. 지금의 ‘교회’는 교인들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로 만들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들로 만들고 있다.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지 않는데 예수를 믿으라 하면 난 그 사람을 저주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안오신다면 난 목사하지 않고 나의 본래의 직업으로 돌아가 비행기 조종사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지 않는다면 난 성경 번역에 관여하지 않고 시원한 물가에서 시원한 맥주나 마시며 지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지 않는다면 만나는 사람들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들’은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교회 놀이’만 한 것이다. 복음을 제쳐 두고 극단적 칼빈주의나 가르쳤고, 끝까지 충성하지 않으면 구원을 잃어 버리게 되며, 침례를 받으면 죄사함을 받은 것이고, 아기 때 세례받아 교회 명단에 오르면 생명책에 들게 된 것이고, 방언을 해야 성령이 내주하신 증거이고, 예수님은 적어도 천 년 이상 이 땅에 평화가 지속되기까지는 오시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만일 이렇게 믿고 있다면 죽어서 지옥에 가고, 살아 있게 되면 들림받지 못하여 그 전무후무한 처참한 상황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아마 수많은 사람이 그 날에 기절할 것이다. 나와 내기하려 들지 말라. 나는 그 때 이 땅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을 속였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돈을 가져오라고 한 적도 없고, 우리 교회로 오라고 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나의 유익과 당신의 처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다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노아가 홍수 직전까지 복음을 전했듯이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복음을 전할 뿐이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성경을 볼 안목이 없으므로 성경적 사실을 지구에 국한시키려는 무지를 드러낸다. 성경이 말하는 휴거는 그리스도인들이(교인들 말고) 외계로 가는 것이다. 7년 간 외계에 가 있다가 예수님과 함께 이 지상에 내려와 1000년을 산다. 그 때 이 땅은 재생되고 기후의 변화로 인하여 농사를 1년에 네 번 짓게 된다. 금년에 심은 복숭아 나무는 그 다음 해면 복숭아를 따 먹게 된다. 동물들도 구원을 받아 아이들과 친구가 된다. 이 천 년 기간이 끝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완전히 파멸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으며,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계21:1,2).
내가 한 이런 말들을 믿을 수 없는가? 그것은 내가 잘못 쓴 것이 아니고 성경 말씀인데 당신은 이것을 포착하여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아직 없을 뿐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안된 사람은 마귀의 자식이며, 마귀의 자식은 그의 왕초가 믿지 못하게 하는 대로 따라 간다. 거듭나지 않은 채 종교적인 허식에 매여 하나님을 섬겨 보겠다고 교회에만 다니면 “알지 못하는 신”(마귀)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하나의 종교를 가질 뿐이다.
인간이 달에 다녀 오고 많은 인공위성이 목성, 금성, 토성, 해왕성까지 돌고 있으며 우주 정거장을 짓고 있는 이러한 인간의 지혜와 기술이 하나님의 성경에서 밝히신 그 지혜보다 낫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왜 예수를 믿는가? 그 분이 다시 오시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라오디케아 교회시대의 마지막에 살고 있다. 우리는 기차를 타러 역에 나간 사람들이다. 기차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뿐이지 기차가 안 오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축복된 소망이란 바로 주님이 오시는 그 순간을, 나를 데려가시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와 내기해도 소용없다. 나는 여기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도 믿지 않으면서 무엇하러 교회에 다니는가?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