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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하는 호칭을 붙이지 않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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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03월호>
1. 욥기는 일반적으로 욥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엘리후가 기록했다(욥 32:16). 엘리후는 B.C. 1700년 이전에 욥기를 기록했다. 어셔(James Ussher)는 창세기 35 -37장의 기록 연대를 B.C. 1800 -1780년경으로 잡았는데, 그의 연대 계산은 매우 신뢰할 만하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은 특별한 예외가 없는 한 그의 연대를 따르고 있다. 욥기는 지금까지 기록된 책들 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책이다.욥기는 이제 곧 다가올 대환란 기간에 이스라엘이 겪게 될 고난을 다루는 책들 중 하나다. 욥은 자녀들과 그 많은 재산들을 다 잃고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엄청난 비극 앞에서 오히려 욥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한낱 보잘것없고 나약한 인간임을 실토하며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때 욥이 일어나 그의 겉옷을 찢고 머리를 밀고 땅바닥에 엎드려 경배하며 말하기를 "내가 내 어미의 태에서 맨몸으로 나왔으니 내가 맨몸으로 그리 돌아 가리이다. 주신 분도 주시요, 빼앗아 가신 분도 주시니 주의 이름을 송축하나이다." 하더라. 이 모든 일에도 욥이 죄를 짓지 아니하였고 어리석게 하나님을 탓하지 아니하였더라』(욥 1:20-22). 욥은 자식들과 재산을 다 잃었을 뿐 아니라 생의 반려자인 아내에게조차 버림을 받았다. 그가 피부병으로 잠 못 이루고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으며 재 가운데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 아내에게서 저주의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때에 그의 아내가 욥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아직도 당신의 온전함을 간직하려 하느뇨?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하더라』(욥 2:9). 사랑하는 아내가 결례를 범한다 해도, 욥의 아내를 생각하면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2. 욥에게는 세 친구가 있었다. 욥이 불행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 세 사람은 그가 당한 불행에 대하여 한 가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욥이 표면상으로는 선했지만, 실제로는 무엇인지는 몰라도 악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의로운 욥에게 그런 엄청난 불행이 닥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여하튼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공하게 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불행이 닥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라고 판단했다. 세상은 죄로 가득 차 있다. 범죄는 날이면 날마다 늘어 간다. 교회는 많은데 믿음 없는 쭉정이들뿐이다. 그들은 하루살이처럼 보장 없는 내일을 살아가면서 자기의 죄로 인해 야기된 불행마저도 "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는가?" 하고 자신은 물론 친구에게까지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속내를 전달하며 불평한다.
욥의 특성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세 친구는 욥의 불행에 대해 정확히는 몰라도 그가 죄인일 것이라고 논박했지만, 욥의 내면에는 줄곧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아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 모두 다 죄를 짓고 살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마귀에게 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사는 성도들도 있다. 한편 엘리후는 그들 세 친구보다 젊지만 그들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영적 심도를 갖추고 있었다. 욥의 세 친구들은 하나님을 인간과의 관계에서 마음이 편협하고 강요만 하시며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해 엄격하게 벌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종교적인 형식주의자들과 도덕주의자들은 이런 편협한 사고로 하나님에 대해 오해한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엘리후의 설명은 고상하고 진실했기에,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부분에 가서 엘리후를 다른 세 친구들과 같은 선상에서 취급하지 않으셨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책인 욥기는, 욥이 당한 고통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통들과, 하나님의 의 대신 자기 자신의 의를 신뢰하다가 지옥에 버려진 인간의 혼의 모습을 인간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형제들아, 내 마음의 소원과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그들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라. 내가 그들에 대해 증거하노니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열성은 있으나 지식을 따라 된 것은 아니니라.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의가 되시고자 율법의 끝이 되셨느니라. 모세도 율법에서 난 의에 대해 기록하기를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들로 인하여 살리라."고 하였느니라』(롬 10:1-5). 『내 피부는 내 위로 검어졌고 내 뼈는 열기로 탔도다』(욥 30:30). 또한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무슨 일을 행하시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에 대해 설명하시거나 정당화하실 도덕적 책임이 전혀 없으시다는 진리를 제시해 놓음으로써 문제들을 해결한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시는 것이 아니라 비난받을 일을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는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들이 설 때부터 깨닫지 못하였느냐? 원형의 지구 위에 앉으신 분이 그분이시니 그곳의 거민들이 메뚜기 같으며, 하늘들을 휘장같이 펼치셨으며, 그 안에 거할 장막처럼 펴셔서, 통치자들을 없애며, 땅의 재판관들을 헛되게 하시는도다』(사 40:21-23). 『오 주여, 주께서 하시는 일들이 얼마나 다양한지요! 주께서 그들 모두를 지혜로 지으셨으니 땅이 주의 풍요로 가득 찼나이다』(시 104:24).
3.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검은 제의를 입은 소위 콘스탄틴식 기독교가 마귀의 사주를 받아 로마에서 발원하여 지중해 연안 국가들에 산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도대체 이들 성경이 없는 교회들은 무엇을 하려고 모였던가? 지휘자가 없는 오케스트라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그들 안에는 혼란만 가중되었다. 만일 그때 유럽 국가들 안에서 신약성경을 아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는 즉시 영적 지도자로 추대되었을 것이다. 그 시대, 곧 퍼가모 교회 시대(A.D. 325-500)에서 두아티라 교회 시대(A.D. 500-1000)로 넘어가는 과도기 시대의 인물로는 크리소스톰, 성 패트릭, 제롬 등이 있었다. 성자(saint)라는 칭호는 그 이전부터 있었는데, 그 칭호만 받으면 작은 모임이라도 인도할 수 있었다. 그들이 가르쳤던 일반적인 진리들은 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② "그리스도는 구세주이시다." ③ "기도는 구세주와 창조주를 찾는 방법이다." ④ "그리스도는 마땅히 섬김을 받아야 한다." 등이었다. 당시에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지식은 지금과 비교해 볼 때 A4 용지 절반도 채우지 못할 정도의 지식이었다. 또한 요즘 같으면 전도사, 목사의 호칭이 수도 없이 널려 있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점을 인정받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기괴한 일들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불교나 힌두교 구루들처럼 윗옷을 벗고 나무 아래 앉아 무언가를 중얼거리면서 초혼(招魂)하는 흉내를 낸다든지, 티베트나 히말라야의 어린 동자승들처럼 아침저녁으로 음식 동냥에 나선다든지 하면서 절과 같은 곳에서 생활했던 것인데, 그렇게 할 때 그들의 호칭은 달라졌다. 그 중 하나가 시므온 스틸라이트(Simeon Stylites, A.D. 390-459)였다. 시므온은 "기둥 위에 앉아 있는 자들"이라는 수도회를 창설하고 자신이 올라가 기거할 기둥을 스스로 세웠다. 기둥의 높이는 처음에는 3m 정도였고, 기둥 위를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 위에서 약 4년간 살았다고 한다. 그는 3m 높이의 기둥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두 번째 기둥을 약 7m 높이로 세웠고, 세 번째 기둥은 11m나 되었다. 20년 동안에 그가 마지막으로 세운 기둥의 높이는 13m였고, 그 윗면의 지름은 1m도 채 안 되었다고 한다. 왜 그는 기둥을 처음 3m에서 나중에는 네 배가 넘는 13m까지 높인 것일까? 미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악령이 그를 계속 부추겨서 인위적인 경건으로 자아를 망각하게 하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역사인 것처럼 여기게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당시 성자(saint)라고 불린 자들의 실체였다.
사도 바울의 시대에 예루살렘, 안티옥, 로마는 그런 미신적인 요소가 다분한 곳들이었다. 한편 마리아가 예수님을 출산하고 정결례를 치르러 예수님을 안고 성전에 갔을 때, 거기에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대로 말했다. 『주여, 주의 말씀대로 이제는 주의 종을 평안히 가게 하옵소서. 이는 내 눈으로 주의 구원을 보았기 때문이니이다』(눅 2:29,30).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승천하실 때까지 미신적인 행위들은 곳곳에 심심찮게 있었다. 시므온 스틸라이트가 세워 그 위에 기거했던 기둥은 남근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 묘지들에 세워 둔 기둥 역시 남근의 모형이다. 신을 규명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남근에 힘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워싱턴 D.C.에 세워진 오벨리스크와 마찬가지로 미신적인 힘의 증표였다. 이런 미신적인 상징이나 신들의 신전은 하나같이 힘을 원했던 것이다. 유럽 나라들이 문명화됨에 따라 전쟁 영웅들은 앞다퉈서 자신의 동상을 세우기 시작했다.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규명하지 못한 자들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동상들을 만들었다. 북한 전역에는 크고 작은 김일성 부자의 동상이 3만 개가 넘는다고 하지 않던가? 만수대의 면적은 여의도의 몇 배라 하지 않던가? 시므온의 기둥 거처는 마귀에 의하여 창안된 것이었다(사 14:12-14).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종교 놀이와 그들이 만든 호칭에는 어떤 성경적인 근거도 없다. 로마카톨릭이 성경적인 근거 없이 멋대로 지은 호칭들을 보라. 사제(수사, 수녀), 주교, 대주교, 추기경, 교황 등 모두 다 인간이 만든 호칭들이다. 성경에 없는 호칭들은 하나님과 무관하다.
시므온 스틸라이트는 그가 세운 기둥 위에서 운동을 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그의 운동 횟수를 헤아린 적이 있었는데, 머리를 숙여 발끝까지 닿는 이 운동을 하루에 1,244번이나 한 것을 목격했다고 했다. 또한 그는 비, 햇빛, 서리, 눈 등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으며, 때로는 신음하면서, 때로는 부르짖으면서, 때로는 울면서, 때로는 기도하면서 자신의 죄를 없애려고 안간힘을 썼다. 구원도 받지 않았고 성경에도 무지했던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도말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리시어 피 흘려 죽으셨는지 모르는 자들이 기독교란 종교에 얽매이게 되면 모두 다 시므온 스틸라이트같이 된다. 『진리를 알게 되리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러므로 만일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참으로 너희가 자유롭게 되리라』(요 8:32,36).
감독, 목사, 장로는 모두 목사를 가리키는 호칭들이며, 그 외에는 모두 다 형제자매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약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은혜의 분량대로 사도, 선지자, 복음 전도자, 목사와 교사로 주셨다(엡 4:11). 사도와 선지자들은 주님께서 인정해 주신 사역자들이었다. 시므온 스틸라이트는 69세에 죽었는데, 그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그가 진리를 알았더라면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죄들을 용서받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했을 것인데, 성경을 몰랐기에 그런 식으로 살다가 결국 지옥으로 가고 말았다.
4.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에도 성경에 적시된 대로(계 3:14-22) 아무런 자격도 없는 자들이 목사, 선교사, 장로, 집사, 전도사 등으로 불리기를 좋아한다. 거기에 "님" 자까지 붙여서 부른다. 그것이 바로 "아부하는 호칭"이다. 『내가 원하노니 나로 어떤 사람도 외모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며 사람에게 아부하는 호칭을 붙이지 않게 하라. 이는 내가 아부하는 호칭도 붙일 줄 모름이니 그리하면 나의 창조주께서 곧 나를 제거하실 것이라』(욥 32:21,22).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없는 호칭을 사용해서도 안 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은 교회들에 가서 찬송을 하고 설교 아닌 설교를 듣는 것도 일종의 아부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을 의식하는 경외함은 "아부"다. 그리스도 안에는 형제와 자매뿐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