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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카톨릭의 비성경적인 교리 (1) 침례로 거듭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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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3년 04월호>
4. 야누스의 두 얼굴 - 노아의 두 생애그렇다면 바빌론 사람들은 침례로 거듭난다는 교리를 어디에서 얻게 된 것인지 살펴 보기로 하겠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바빌론 신비 종교에서 기념하는 대홍수나 방주 및 노아의 생애에 있었던 사건들이 하늘의 여왕과 그 아들의 숭배와 혼합되었다는 점이다. 노아는 홍수 이전과 이후의 두 세상을 살았던 인물로서 “디퓨즈” 또는 “두 번 태어난” 사람이라고 일컬어졌으며, 각각 반대 방향을 보고 있는 머리 둘 달린 신으로 묘사되었는데, 한 쪽은 늙었고 다른 한 쪽은 젊은 얼굴 모양이다. 구스와 그의 아들 니므롯을 상징하기도 하는 이 머리 둘 달린 야누스는 양면적 능력을 가진 하나의 신으로 간주되었으며 지존한 신, 모든 위대한 신들의 아버지로 숭배되었지만, 그것 외에도 그에게 숭배의 대상으로서의 핵심적인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인류의 두번째 조상이며 기적과 같은 인생을 살았던 위대한 족장 노아라는 인물의 이야기와 어떤 방법으로든 연관을 짓는 것이 필요했다. 따라서 우리는 야누스의 전설이 본래의 것과 완전히 기원이 다른 이야기와 혼합된 것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은 그가 “세상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방주를 만든 사람”이라고 불린다는 점에서 노아의 이야기로부터 차용해 왔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따라서 야누스의 전설은 원래 노아의 생애와 관련이 있었던 것이며, 대홍수를 겪고 살아남은 그는 당대의 의인으로 인정되었다. 아시아뿐만 아니라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의 상당한 부분이 노아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5. 비시누 신의 잠 - 방주에 갇힌 노아
인도에서는 “보존자”라고 하는 비시누 신이 세상이 물 속에 가라앉았을 때 기적적으로 하나의 의로운 가족을 보존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전설은 노아의 이야기와 내용만 같은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이름조차도 노아 자신의 이름과 같다. 비시누(Vishnu)는 갈대아의 “이시-누”(Ish-nuh)라는 단어의 산스크리트어 표기인데 그것은 “노아라는 사람”(the man Noah) 또는 “남은 자”(Man of rest)를 뜻한다. 뿐만 아니라 비시누를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지존하고 영원한 신으로 등장시키는 신화 자체가 앞의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데, 비시누는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태양과 바람, 대기, 모든 형체없는 것은 그의 신성한 정수(essence)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우주를 소모해 버린 그 영원하고 무소부재한 신은 세상을 덮는 대양의 수면 위에서 신비롭게 잠들었다. 그러나 그 신이 당시에 눈에 보였는지 보이지 않았는지, 그 거룩한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그 신비로운 잠의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아무도 말할 수 없다. 또한 그가 잠에서 깨어나 움직이려는 생각을 가질 때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는지 아무도 말할 수 없다.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고 그에게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고대의 전설에 부합하여 비시누 신은 지금까지도 해마다 넉 달씩 잠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제 이 이야기를 노아의 이야기와 연결시켜 보기로 하겠다. 세상이 홍수로 멸망할 때 40낮 40밤 동안 대혼란이었으며 태양도 달도 반짝이는 별들도 그 모습을 감추었고 바다와 하늘이 한데 뭉쳐져 버렸을 때,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대양으로 변해 버렸을 때, 위대한 족장 노아는 그 바다의 표면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 어떠한 인간도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고 단지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아무도 접근할 수 없었고 그 원인을 알 수 없었던 비시누 신의 “신비로운 잠”인 것이다. 노아는 방주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은둔자”를 뜻하는 사투른(Saturn)이나, 해인(海人)을 뜻하는 오안네스(Oannes) 또는 야누스(Janus) 등의 이름으로 불려졌으며 “두 번 태어난” 또는 “거듭난” 디퓨즈(Diphues)로 묘사되었다. “두 번 태어났다”고 자처하는 브라민들은 자신들 각자가 하나의 신이라고 믿는데, 그들이 자신에 대해 사용하는 “브라민”이라는 명칭 자체가 그들이 믿는 신이 “두 번 태어난” 신임을 의미한다.
6. 오시리스의 죽음 - 홍수 때의 노아
노아의 생애가 “중생”과 관련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집트의 신비 종교의 전설에서 그 증거를 얻을 수 있다.
윌킨슨을 포함해서 이집트 고대 종교의 대부분의 석학들은 노아의 이야기가 오시리스의 전설과 융합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물 위를 떠다녔던 이시스의 배와 오시리스의 “관”은 분명히 대홍수 때의 노아의 방주를 가리키는 것이다. 또 “오시리스의 부재”(The Disappearance of Osiris)라고 하는 제일(際日)은 사실상 노아가 사라졌던 날인 것이다. 플루타크는 오시리스가 “관 속에 갇혀 있었고” 물 위를 떠다녔던 때는 노아가 방주에 들어갔던 때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것은 아달 월 17일이었는데, 그 때는 나일강의 범람이 그치며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는 때이다. 아달 월은 춘분 이후에 두번째 달인데 그 시기는 유대인의 civil year와 patriarchs가 시작되는 때이다. 이것과 성경이 말하고 있는 노아가 방주로 들어간 때를 비교해 보면 그 둘이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 것이다. “ ”(창 8:11)
오시리스(다른 이름으로는 아도니스)가 관 속에 갇혀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는 기간 역시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 있었던 기간과 일치한다. 그것은 만 1년이었다. 플루타크의 진술은 이 제일 때 오시리스가 그의 관 또는 방주 안에 갇혀서 아주 “죽었고” “장사된” 것으로 여겨지며 음부에까지 넘겨졌다가, 거기에서 나왔을 때는 “새로운 생명의 상태” 즉 “중생“의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홍수와 방주를 통해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능력으로 인한 구원과 죄씻음에 대한 생생한 모형을 주셨다고 믿는 데에는 아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베드로가 “침례는 우리를 구원하는 모양이니”라고 말한 이유이다. 그런데 갈대아의 사제들은 이같은 침례의 참된 의미를 오염시키고 변질시켰다. 그들은 노아가 끔찍한 비극인 대홍수를 무사히 지낼 수 있었고, 홍수 후에 방주에서 나와 마치 새롭게 탄생한 것과 같이 신천지에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홍수 이전에 그의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간과한 것이다. 그들은 신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침례의 물을 통과하고 그에 관련된 고행을 감수하기만 하면 그것이 인류의 두번째 조상 노아와 같이 “디퓨에즈”, 즉 “다시 태어난”, “중생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며 의로운 노아가 누렸던 모든 특권을 누릴 수 있고, 그들의 양심에 따라 그들이 그렇게도 갈구했던 “새로운 탄생”을 가져다 준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바빌론의 가르침과 정확하게 일치하여 그들의 교리를 전개하였다. 침례로 인한 중생이라는 교리는 다름아닌 바빌론에서부터 나온 것이며, 이 교리는 지금까지 그토록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든 간에, 이제까지 우리가 말한 것이 이 비성경적인 교리의 진짜 기원인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