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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의 기원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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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0년 08월호>
로마 카톨릭 교회는 뿌리부터 열매까지 전부 다 악한 한 그루의 나무와도 같다. 마태복음 13:31,32의 “겨자 씨의 비유”에 등장하는 이 나무는 원래 푸성귀 같은 나물이 되었어야 했음에도,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와 무관심과 긴 세월의 망각 속에서 비정상적으로 숲 전체를 뒤덮을 만한 거대한 나무로 자라 “공중의 새들”(마귀들, 마 13:4,19)이 깃들이는 보금자리가 되고야 말았다. 우리는 성경과 역사를 통해 그 뿌리와 몇몇 줄기들을 살펴봄으로써 이 나무의 실체를 피익하고자 한다.힘센 사냥꾼 님롯과 바벨 탑
홍수 후에 사람들은 동쪽으로부터 여행을 하여 시날 땅에서 평원을 만나, 거기에서 거하였다(창 11:2). 메소포타미아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이 흘러 비옥한 대지에서 풍부한 곡식이 산출되는 곳이었지만, 반면 번식력이 강한 들짐승으로 인해 계속적으로 안전을 위협받아 왔다(출 23:29,30 참조).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힘센 사냥꾼 님롯(Nymrod)이었다(창 10:8,9). 사람들로부터 명성을 얻은 님롯은 사람들을 모아 성읍을 세우고 성벽을 만들어 왕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창 10:10-12).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왕국이다. 님롯이란 이름은 “반역자”라는 뜻이다. 님롯이 왕국을 세웠던 바로 그 시날 땅에서 사람들은 주를 거역하여 바벨 탑을 쌓았던 것이다. 그들은 흩어지지 않기 위해서 탑을 쌓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란케 하셔서 그들을 온 지면에 멀리 흩으셨다(창 11:1-9). 바벨탑은 무너졌지만 바벨의 종교는 전세계로 흩어져 이방 종교 속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되었다.
하늘의 여왕 세미라미스와 태양 신의 아들 탐무스
전설에 의하면 바빌론 왕국의 왕 겸 제사장이었던 님롯이 죽자, 그의 시체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여러 지역에 보내졌다고 한다(판 19:29, 삼상 11:7 참조). 님롯이 죽자 그의 아내 세미라미스는 음란한 아들을 낳아 탐무스(겔 8:14)라 이름붙이고, 그가 부활한 님롯이며 초인간적으로 잉태된 “구주”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아이뿐 아니라 어머니까지도 함께 숭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모자 숭배 사상”이 발전되었다. 바빌론의 유물 가운데는 여신 세미라미스(Semiramis)가 아들 탐무스(Tammuz)를 안고 있는 신상들을 많이 볼 수가 있다. 이러한 모자 숭배는 독일, 스칸디나비아, 에투루리아, 드루이드, 그리스, 수메르, 영국, 중국, 멕시코 등 여러 나라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로마 시대에는 비너스(Venus)와 쥬피터(Jupiter), 인도에서는 이쉬(Ish)와 이스와라(Iswara), 아시아에서는 시베레(Cybele)와 디오이우스(Deoius), 이집트에서는 이시스와 호러스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도 이 “하늘의 여왕”(렘 7:18-20, 44:17-19)을 여신 아스타롯(판 2:13, 10:6, 삼상 7:3,4, 12:10, 왕상 11:5, 왕하 23:13)으로 섬겼고, 신약 시대에 와서는 “에베소”에서 다이애나를 숭배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행 19:27). 또한 마리아 숭배 교리가 A.D. 431년 “에베소” 종교 회의에서 채택되었다는 것은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바빌론 여신의 이름은 이탈리아에서는 마돈나(Madonna)로, 페니키아에서는 “바다의 여신”으로 불리는데, 그 이름 가운데는 태양 신 바알에서 붙여진 바알티(Baalti)와 중보자(Mediatrix)란 뜻의 밀리타(Mylitta)도 있다. 바빌론의 숭배는 신비한 상징물과 함께 점점 발전되어 갔다. 사람들은 님롯을 태양 신 곧 바알로 믿었고, 그를 불, 물고기, 나무, 기둥, 여러 동물 등으로 상징하였는데, 금 송아지는 바로 태양 신의 아들인 탐무스의 상징이었다.
미카의 종교
재판관기 17,18장에 보면 미카의 종교가 등장하는데, 에프라임인 미카가 새긴 형상과 부어 만든 형상을 만들고 한 레위인을 자기 집의 제사장으로 세워 그를 “아버지”(신부)라고 부른다(마 23:9). 이 때 미카가 레위인에게 준 은 열 세켈과 옷 한 벌은 콘스탄틴이 성직 계급에 면세 혜택을 주고(A.D. 313), 모든 개종자들에게 금화 20냥과 흰 옷 한 벌씩을 선물로 준 것(A.D. 324)과 흡사하다. 그런데 단 지파에서 이 신들과 제사장을 뺏아 자기 족속의 제사장으로 삼은 것이다. 이것은 바빌론의 신비 종교를 취해 기독교와 융합하여 자기들의 새로운 국가 종교를 만들어 낸 로마의 거짓 종교를 연상시킨다.
콘스탄틴의 십자가
로마 카톨릭이 국가 종교적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은 바로 콘스탄틴 황제 때의 일이었다. 밀비안 브리지(Milvian Bridge) 전투 하루 전날 콘스탄틴은 태양 신에게 기도했을 때 석양 너머로 십자가와 함께 “In hoc signo Vinces” 곧 이 표로 정복하라(In this sign conquer)는 글씨를 보았다. 그 다음날 십자가를 앞세우고 진군했을 때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회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유일한 출처는 유세비우스인데, 그는 “역사의 날조자”로 규탄받은 인물로 신뢰하기가 매우 어렵다. 현재 기독교의 십자가는 원래 기독교의 표가 아니라 칼데아와 이집트의 문자로 신비의 타우(Tau)란 글자였다. 이것은 탐무스(Tammuz)란 이름의 머릿글자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라틴(Latin), 타우(Egyptian), 갈보리(Calvary), 켈틱(Celtic), 성 안드레(St. Andrew), 그리스(Greek) 십자가 등으로 여러 형태로 사용되었다.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십자가는 이교의 근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십자가는 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의 상징”이었다(갈 3:13).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미신적이어서 유품들을 찾아다녔다. 수세기 동안 교황들이 인정한 유품들은 가지각색이다. 십자가에 박혔던 못, 그리스도께서 입을 댄 해면, 예수님께 입혔던 주홍색 겉옷, 가시 면류관, 최후에 만찬 때 쓰던 잔, 마리아의 머리카락(어떤 것은 갈색, 고수머리, 빨간 머리, 검정색 등 종류가 다양하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탔던 어린 나귀의 뼈들. 이런 것들은 부적으로 팔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성당의 땅과 건물이 거룩하다고 사람들이 믿었기 때문에, 787년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는 유물을 제시하지 않으면 어떤 주교도 성당을 짓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이러한 극단적인 생각으로 인해 마틴 루터가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걸었던 비텐베르그의 캐슬 교회는 19,000개의 성도 유품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로마 교황 제도
로마가 세계를 정복한 이후 바빌론으로부터 퍼져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된 이교주의가 로마 종교 제도 속으로 흡수됐는데, 그 가운데는 “최고 교황”이라는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율리어스 시저가 공식적으로 신비 종교의 “최고 사제”(Pontifix Maximus)로 인정된 것은 기원전 63년이었다. 모든 로마 황제들은 A.D. 376년까지 이 직무를 수행해 왔었다. 그러나 그라티안 황제는 이런 칭호가 우상 숭배의 사상을 담은 것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임을 알았기에 최고 사제가 되기를 거절했다. 로마 황제가 종교적인 제사장의 직무도 겸하였는데다가, 로마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도시였기 때문에, 로마의 감독이 “모든 감독들의 감독” 곧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생각이 당연시되었고, 마침내 378년 로마의 감독 다마수스 1세(A.D. 366-384년)가 “최고 사제”로 선임되었던 것이다.
로마로 들어온 바빌론 신비 종교의 한 분파 가운데 태양 신 숭배교에서는 제사장의 우두머리를 페이터 파트룸(Pater Patrum) 곧 “모든 아버지들의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이 칭호에서 로마 교황의 칭호인 “Papa” 또는 “Pope”라는 말이 나왔다. 신비 종교의 우두머리는 기독교 시대 이전에 벌써 로마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교황이 쓰고 있는 티아라(Tiara: 관)는 시대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다르게 만들어졌지만, 고대 앗시리아 서판에 그려진 신들이 쓰고 있던 것과 같은 형상이다. 교황이 쓰고 있는 마이터(Mitre: 사교관, 물고기 머리 모양을 한 어두관)은 님롯이 “물고기 신”으로 형상화된 다곤(Dagon: “Dag”란 물고기란 뜻이다.)에게서 유래된 것이다. 다곤 숭배 사상에 대해서는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판 16:21-30, 삼상 5:5,6). 다곤은 옛 기념비에 반인반어의 형상으로 나타나곤 하는데, 고대 바빌론의 칼데아 제사장들도 물고기 모양의 관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또 야누스의 열쇠가 베드로의 천국의 열쇠와 연관되고, 우상을 운반하던 종교적인 행렬이 교황의 행렬로 바뀌고, 이집트의 왕 겸 제사장이 사용하던 깃털로 만든 커다란 부채 “파벨룸”(박카스의 신비의 부채로 알려짐)이 교황의 행렬에서도 등장하듯이, 이교의 숭배 의식과 제도가 기독교식으로 둔갑했을 뿐 로마 카톨릭은 이교 숭배와 하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수백년 전의 이교도의 신인 쥬피터(탐무스의 로마식 이름) 상이 로마에서 발견되었는데, 흉측한 모습을 한 이 거대한 청동 신상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성 베드로 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상에게 절하고 입맞추는 것은 바알 숭배의 표시였다(왕상 19:18). 님롯의 신비로운 모형 중의 하나는 금 송아지로 표시되는데, 구약에서도 이런 우상 숭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호 13:2). 이 동상은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최대의 존경을 받아 발이 다 닳아질 정도지만, 실상 이 동상은 이교도의 우상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교와 기독교의 혼합은 너무나도 교활하게 이루어져 갔다.
바빌론의 이교 전통은 전세계로 전파되어 이집트와 로마에서 꽃을 피웠다. 633년 토레토에서 열렸던 종교 회의에서는 모든 성직자들이 머리 뒤를 둥글게 체발해야 한다는 엄격한 규례를 만들었다. 이것은 태양 신의 상징으로, 태양 신을 숭배하는 이방 종교의 예식이었다. 바카스의 제사장이나 이집트 오시리스의 제사장도 체발을 했고, 중국이나 로마에서도 행해졌다. 구약은 머리 가를 둥글게 깎는 것을 금하고 있다(레 19:27, 21:5). 이런 사실을 감추기 위해 카톨릭은 둥근 체발을 미사 때 사용하는 둥근 성찬용 빵과 연관시켰다. 또 다른 태양의 상징은 마치 살이 달린 마차 바퀴 모양으로 선들을 가로질러서 둥글게 만든 원이었다. 고대인들은 태양에 대하여 매일 하늘을 가로질러 여행하는 태양 신이 몰고가는 거대한 수레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알 숭배를 들여왔을 때에도 태양신에게 바친 수레 곧 “태양의 병거들”을 갖고 있었다(왕하 23:4-11). 많은 성당에서 이런 상징들을 붙여 놓고 있는데, 이것은 초기 바빌론의 성전과 이집트의 성전 입구에서 발견되는 것들이다.
카톨릭 당국에 의하면 “성인”이란 순교자들이거나 “교회”에서 이름난 죽은 사람들로서 교황이 성인으로 선언한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성도라고 부르는데, 대부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 죽은 자들과 접촉하려는 것은 신접하는 것으로서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데도(사 8:19,20), 개신교도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을 믿사옵나이다.” 하는 사도신경을 외우고 있다. 여기서 성도란 살아 있는 성도들뿐 아니라 카톨릭이 정한 죽은 성인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들과 함께 도움과 만족과 기도와 다른 선행과 상호 교통을 나눈다는 것이다.(신카톨릭 백과사전 4권 41p.) 하나님께서는 성도들도 신뢰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다(욥 15:15, 5:1). 이교도들 가운데서 개종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옛 신들의 이름을 부르기를 꺼려 하자, “Venus”(비너스)를 “Vesta”(성 베스타)로, “빅토리아”(알페스의 여신)를 “성 빅토이레”로, “오시리스”를 “성 오누푸리스”로, “디오니수스”를 “성 디오니수스”로, “아폴로”를 “성 아폴리나니스”로, “마스”를 “성 마르틴”으로 부르는 것처럼, 기독교에서 그 신들에 해당하는 비슷한 발음의 다른 이름을 찾게 되었고, 그들을 성인으로 시성하여 공경하였던 것이다(A.D. 313년 밀라노 칙령).
종교 재판
교황 이노센트 4세(1243-1254)는 “Ad Exstripanda”라는 문서를 발표해 “이단 사냥”을 명령했는데, 이 문서는 불법적으로 취득한 어떠한 재산도 합법적 소유로 인정해 주고 이단을 한 명이라도 죽이기만 한다면 그들의 모든 죄가 용서된다는 약속과 함께 고문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사지를 밧줄로 당겨 손발을 탈골시켜 심한 고통을 주는 고문대, 날카로운 칼날과 못이 박힌 로울러, 다리와 발을 부수는 데 사용된 “스페인식 장화”, 무서운 칼날이 박혀 있는 마리아 형상을 한 “철 동정녀” 형틀 등 이들은 “이단들”이 자기들을 주장을 굽히게 할 목적을 잔인한 고문 기구들을 고안해 내었다. 이 밖에도 귀와 입에 끓는 납물을 붓는다든가, 눈과 온몸을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진다든다, 사람들을 벌거벗긴 채 발에는 무거운 추를 달고 팔을 등 뒤로 묶어 도르래로 공중에 끌어올려 매달았다가 줄이 살을 뚫고 뼈에까지 닿으면 땅으로 떨어뜨려 손발의 관절을 비틀어 버린다든가 하는 잔혹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들은 개인이나 집단을 고문하고 죽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주의의 교리를 거절하는 도시 전체를 박해하기도 하였다. 1209년 베치아 시에서는 6만 명이 칼로 희생되어 그 피가 거리에 흘러넘쳤는데, 교황은 이단을 박멸하는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죽는 즉시 연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약속으로 이들을 고무하였던 것이다. 1211년 라바르 시에서는 400명을 산 채로 화형시켰고, 어떤 지역에서는 하루에 10만이 넘는 알비겐스를 죽여 그 시체를 산더미처럼 쌓아 불로 태우고 “교회”를 위한 큰 승리에 감사하여 특별 찬송을 불렀으며, 메린돌에서는 왈덴스의 부녀자 500여 명을 헛간에 가두고 불을 지르기도 했고,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어린 아이들을 끔찍하게 죽이기도 하였다. 1562년에는 교황 피우스 4세가 이탈리아 군대를 동원해 남녀노소를 닥치는 대로 죽이도록 명령했으며, 1572년 “성 바돌로매의 날”에는 파리에서 10만여 명의 위그노들이 살해되었다. 교황은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1572년 위그노들의 학살”(Ugonottorum Strages 1572)이라고 적힌 주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요컨대, 로마 카톨릭은 바빌론의 신비 종교와 기독교가 혼합된 이교도들의 우상 숭배에 불과하다. 바빌론 종교는 님롯과 세미라미스 사이에서 태어난 탐무스에게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는데, 사람들이 바빌론에서 흩어지면서 이 종교를 가지고 나왔고, 이것이 각 민족과 언어에 따라 각 형태와 이름으로 발전되었다. 로마가 세계를 정복했을 때 피지배국에 있던 여러 신들과 바빌론의 종교 제도들이 로마 제국 속으로 흡수되었고, 기독교와 혼합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큰 바빌론의 신비이다. 『“신비라, 큰 바빌론이라,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계 17:5) 종교 개혁자들의 개혁에 의해서 로마주의의 이교적인 요소들이 상당 부분 제거되었지만, 아직도 카톨릭의 전통이 개신 교회 내에 많이 잔재되어 있다. 이로 인해 오늘날 기독교는 바빌론의 음녀에게 속아 에큐메니즘으로 향한 배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발은 죽음으로 내려가고, 그녀의 걸음은 지옥으로 접어드는도다.』(잠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