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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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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08월호>
미혹에 대해 깨어 있는 사람들은혜로 구원받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된 사람들은 기도의 능력을 믿는다. 성경이 그렇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의인의 효과적이고 열렬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로 구속받았고 성경으로 거듭난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다. 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온전히 그분만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는 사실도 믿는다.
그들은 죄를 미워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그들은 단순히 ‘종교적’인 사람들이 아니며 오히려 종교적인 의식을 거부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인정하는 두 개의 의식, 즉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의식은 오직 침례와 주의 만찬뿐이다. 그들은 한 영에 의해 인도받기를 원하고 그들의 믿음의 확신을 한 책에 두기 원한다. 그 책은 성경이다.
그들은 미혹과 악의 침투에 대해 깨어 있고 분별력을 지니고 있다. 『또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며』(행 20:29). 그들은 분파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부정적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보수적일 뿐 아니라 편협되고 때로는 사랑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상이 주는 낙인을 지니고
스코틀랜드 고원지대에서 사역하는 복음전도자 존 케네디(John Kennedy)는 이같이 썼다. “세상이 그 이마에 편협된 자라는 낙인을 찍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우리는 그 낙인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수치를 주기 위해 그 낙인을 찍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영광의 표이다. 매 시대마다 열띤 논쟁 속에서 결국 진리가 승리를 얻을 때, 그 승리는 바로 진리를 수호하기로 굳게 맹세한 ‘편협된 사람들’에 의해 쟁취되었던 것이다.” 다음은 그러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C.H. 스펄전의 말이다.
“나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강력하게 거부하는 ‘분파주의’를 믿으며 또 자랑한다. 진리에 신실한 사람이라면 그는 분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만일 우리가 진리를 위해 투쟁하고 그것을 추구하며 주장하고 고수하기를 그친다면, 진리는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고 대신 오류가 군림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그러한 하나님의 종들을 “성도들”(saints, 카톨릭의 ‘성인들’에 해당하는 말-역자 주)과 “왕 같은 제사장들”(priests, 카톨릭의 ‘사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다(벧전 2:9).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그렇게 높이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인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도 바울조차도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같이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갈 2:20).
믿음을 지키는 소수
주님께서도 이 문제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막 8:34).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언제나 정치적 권력도 없고 군사력도 없고 (집단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피의 복수도 하지 않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오늘날 그들의 맥을 잇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있다. 기독교의 여러 교단들에 흩어져서 대개는 고립되어 있는, 남은 자들이 있는 것이다.
라일(J.C. Ryle) 감독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바로 교회”라며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은 적은 수의 양무리이다. 여기에 조금, 저기에 조금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이 기도로써 우주를 뒤흔들고 왕국들의 운명을 바꾸는 자들이다. 이들이 바로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종교’의 지식을 전파하는 역동적인 일꾼들이다. 그들이 어느 나라에 속해 있든지간에 그들이야말로 그 나라의 생명이며 방패요 요새이며 지주이고 도움인 것이다.” (The True Church by Dr J.C. Ryle)
라일 감독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논쟁은 개탄스런 일이라고 하면서도 거짓 교리를 묵인하는 것은 논쟁보다 더 나쁘다고 말한다.
“우리측 진영 안에서 개개인간의 불일치 없이 마귀와 세상과 육신을 대적해 싸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논쟁보다 더 나쁜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거짓 교리를 묵인하고 그것에 대항하거나 저지함 없이 인정해 주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승리로 이끈 것은 바로 논쟁이었다. 만일 논쟁 그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견해가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면, 우리는 애초에 종교개혁을 일으키지도 말았어야 했다. 그들의 말대로 평화만을 고집해야 한다면, 우리는 오늘까지 계속해서 동정녀 마리아를 숭배하고 형상들과 성인들의 유물에 대고 절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보여지는 사도 바울의 일관된 모습은 불화와 논쟁을 가장 많이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는 몽둥이로 맞았고, 돌에 맞았다가 죽은 것으로 알고 버려졌으며, 쇠사슬에 묶여 지하 감옥에 갇히고, 판사들 앞에 끌려다녔으며, 암살 음모에서 겨우 빠져나왔고, 자기 안에 있는 확신을 너무나 분명하게 증거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에 있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세상을 소란케 한 자들이 여기에도 왔도다’(행 17:6)라고 말했다. 최대의 목표가 교회 성장이고 최대의 관심사가 자기들이 탄 ‘배가 흔들리지 않는 것’인 목사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기를 원한다. 그들은 논쟁에 연루되는 것에서는 피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진리와 우상숭배에 항거하며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이다. 한 영국인이 엄청난 논쟁에 맞서 진리를 고수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존 켄짓(John Kensit)이었다. 1898년에 성 쿠드버트(St Cuthburt) 교회에서 있었던 그의 항변은 그가 했던 여러 번의 항변 중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켄짓은 리버풀에서 암살당했다. 누군가가 날카로운 물체를 그의 눈에 관통시켰던 것이다. 진리의 순교자인 켄짓이 세상을 떠난 직후인 1902년에 윌콕스(J.C. Wilcox) 목사는 이 하나님의 사람이 쿠드버트에서 했던 유명한 항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영광스러운 종교개혁의 순교자들을 불태웠던 화형대의 불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순교자들의 정신은 아직도 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화형대를 불태운 촛불은 꺼진 적이 없다. 1898년의 성(聖)금요일 바로 그 순간에 (그때 윌콕스는 공교롭게도 그의 <횃불, Beacon Fire>의 초고를 읽고 있었다) 웨스트엔드 교회에서 한 사람의 영이 진리의 제단에서 온 불로 불붙어 있었고 그의 뼈는 비진리와 우상숭배에 대한 의로운 분노의 소멸케 하는 불로 타오르고 있었는 줄 누가 알았으랴. 그의 입술은 종교개혁의 순교자들을 태운 벌건 숯불에 닿아 있었다. 켄싱톤 필비치 가든의 악명높은 성 쿠드버트 교회에서 한 용감한 영혼이 전 영국을 개혁의 촛불로 다시 불붙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용감한 사람은 존 켄짓이었다. 그는 성 쿠드버트 교회에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소위 “십자가 숭배식”이라고 하는 카톨릭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 예배에서 사제는 베일에 싸여 있던 십자가를 드러내 보이며 “십자가의 나무를 보라”고 말했다. 여기에 회중들은 “우리가 그것을 숭배하나이다.”라고 답하고는 사제를 뒤따라 둘씩 나와서 설교단 앞에 세워져 있는 십자가까지 기어나와 그 위에 있는 형상에 엎드려 입맞추기 시작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성당 안에서 뻔뻔스럽게 자행되는 이 우상숭배 앞에서 그 영이 불타올라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느꼈다. 그는 나가서 그 십자가상을 잡고 우상숭배자들의 눈 앞에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는 분명하고도 엄숙하게 히브리 선지자의 말을 빌어 이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는 영국 교회 내의 이같은 우상숭배를 비난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이렇게 해서 영국 교회 내의 제 2의 종교개혁의 나팔 소리는 울려퍼졌으며, 성 쿠드버트 교회에서부터 시작된 그 소리는 영국 땅의 모든 교구 교회로 퍼져나갔다.” (Contending for the Faith: Revd J.C. Wilcox, Protestans Truth Society, 184 Fleet Street, London: 1902 and 1989)
배교의 물결을 거슬러
라일과 켄짓, 그밖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오늘날 살아 있었다면, 기회주의적이고 세상의 죄를 대적하며 구주가 필요함을 증거하기보다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는, 인기있고 안락한 형태의 복음주의적 기독교를 과연 인정할 것인가. 그들은 오히려 기독교가 거짓 종교에 일치되어가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와 같은 현상은 수많은 사람의 생명의 기초를 궁극적으로 파괴시킬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기초들이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으랴?』(시 11:3) 그들은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나약하고 타협적이며 수많은 거짓 교리들을 묵인함으로써 성도들을 극심한 혼란으로 인도하고 수백만의 성공회 신자들과 정교회와 카톨릭 신자들을 그리스도 없는 영원 세계로 인도하고 있는 사실을 개탄해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믿음을 말로써 고백한다.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비밀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믿음을 고백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들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자기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막 8:38).
담대히 외치는 사람들, 성경적 진리에 대한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사람들은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해 주신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운다”(유 3). 그들은 바울이 그의 첫 번째 서신을 썼던 사람들처럼, 아니면 라일 주교가 언급한 사람들처럼 흩어져 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용감했던 그들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압도하려 하는 거짓과 혼란과 타협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에 들어선 수백만의 미혹당한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제시하는 사람들이다.
1969년에 열린 ‘영국 복음주의 대회’ 개회 연설 때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oyd-Jones)는 그 당대와 그 이후까지 참으로 예언적인 내용의 연설을 했다. 그는 매우 강력한 어조로 그들이 어떻게 사태에 대처해야 하는지를 피력했는데, 그의 메시지는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미를 던진다.
고린도전서 14:8의 “뿐만 아니라 만일 나팔이 불확실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 준비를 하겠느냐?”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는 적들은 단순히 존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측 진영에 완전히 퍼져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경보를 울려라.” 우뢰같이 그는 외쳤다. “경보를 울려라.” (Dr Martin Lloyd-Jones: The Trumpet Yields an Uncertain Sound; BEC Audio-tape 1969)
배교한 기독교는 세계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종교이며, 그 종교의 이면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피에 굶주려 있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뉴 에이지와 통합되어 에큐메니칼에 입각한 다중 신앙 연합체를 이루면, 하나님의 소수의 양무리는 또다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과 같이 될 것이다.
진리를 외치는 파수꾼들
파수꾼은 “깨어나라”고 외친다. 우리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가 닿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해야 하며, 그들이 마태복음 7:22의 예수님의 말씀처럼 되지 않도록 우리의 기도를 몇 배나 증가시켜야 할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아니하였으며,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며, 또 주의 이름으로
많은 경이로운 일들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하리니
그때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하되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하니,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