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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가 신약 교회의 “의식(儀式)”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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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8년 02월호>

성경에 따르면, 주님이 신약 지역 교회에 부여하신 의식은 “주의 만찬”(고전 11:26)과 “침례”(벧전 3:21) 두 가지이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는 여기에 “신유”를 자의적으로 교회 의식의 범주에 포함시킨다.1)

『교회에는 침례와 성찬과 신유 등의 의식이 있는데 이것은 교회가 끝 날까지 계속해야 할 의식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는 침례를 약식 수세로 바꾸고, 성찬은 1년에 한두 번으로 그치고, 병 고치는 신유의 의식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태는 현대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신유를 신약 지역 교회의 핵심사역으로 보는 조목사는 신유에 ‘의식’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조목사는 이어서 ‘신유 의식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와 능력과 병 고치는 은사 등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고전 12:28). 정상적인 교회 안에서는 신유의 역사가 마땅히 나타나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들은 적극적으로 이 임무를 완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 5:14). 당시의 장로는 오늘날 회중의 인도자가 되는 목사나 장로, 또는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한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이러므로 지상에서 교회가 존재하는 한 위와 같은 직분을 가진 자들은 병 고침의 은사를 받아 행할 수 있는 성경적인 권위와 이를 행해야 하는 성경적인 의무를 부여받은 자들입니다. 병 고침의 은사는 초대 교회 이후로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말세로 접어든 오늘날의 교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사모하는 자들에게 병 고침의 은사를 특별히 나타내고 계십니다. 교회는 이러한 은사가 충만히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교회에 맡겨진 치료의 임무를 열심과 성실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2)

조목사가 지역 교회의 병 고치는 은사에 대한 근거로 삼은 고린도전서 12:28은 <한글킹제임스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들이요, 둘째는 선지자들이요, 셋째는 교사들이요, 그 다음은 기적들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들이며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여러 가지 방언들이라.』 성령께서 이 구절에서 ‘교회’를 언급하신 것은 성도들이 모임을 갖는 교회건물을 지칭하신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바로 앞 27절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는 그 지체들이라.』 28절은 27절을 근거로 전개된 구절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지체들에게 각자의 역할이 분담되어 있다는 것이 28절의 논지이다. 즉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세워지고, 기적들과 ‘병 고치는 은사들’이 주어지는 “교회”(28절)가 “그리스도의 몸”(27절)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지체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관해서는 에베소서 5장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사람마다 항상 자기 육신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육성하고 아끼기를, 주께서 교회에게 하심같이 하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몸과 그의 살과 그의 뼈의 지체임이라.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 둘이서 한 몸이 될지니라. 이것은 위대한 신비라.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관하여 말하노라』(29-32절).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것을 성경은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과 살과 뼈의 지체로서 총체적인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교회”가 곧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다. 이 ‘교회’는,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가시적인 교회건물이 아니라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영적인 유기체이다. 고린도전서 12:28의 병 고치는 은사들이란 바로 이 영적인 유기체인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게 주어졌던 은사를 일컫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 모든 것을 채우시는 분의 충만이니라.』(엡 1:23)는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으로서의 우주적인 교회에 주어진 은사들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조목사는 이것이 가시적인 지역 교회에 주어지는 은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병자에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고 명하는 야고보서 5:14을 인용하면서, 정상적인 교회라면 신유의 역사가 마땅히 나타나야 하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유의 임무를 적극적으로 완수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조목사는 고린도전서 12:28에 나타나는 ‘교회’를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영적인 유기체로 보지 않고, 단지 개신교계에서 교회건물을 가리켜 남발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는 상투적인 표현을 답습하며 가시적인 지역 교회로 언급하였으며, 그 가시적인 지역 교회 내에 병 고치는 은사들이 주어진다는 식으로 고린도전서 12:28을 그릇 해석함으로 중대한 오류를 범한 것이다.
병 고치는 은사들을 가진 신유의 치유자들(divine healers)은 전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사도들”뿐이었으며, 이들은 초대 교회 시대에만 존재했었다. 현 시대에 자신이 신유의 은사를 지녔다고 주장하며 기도원이나 각종 신유 은사 집회에서 병자들에게 안수하는 은사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무관한 이들이다. 그들의 신유의 은사가 성경적인 것이라면, 그들은 그런 곳들에만 머물지 말고 전국 종합병원들을 찾아다니며 환자들을 병상에서 일으켜서 우리 주님의 피흘리신 복음이 진리임을 확고히 하고 자신들이 “사도적 믿음”(apostolic faith)을 지녔음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증명해야 할 것이나, 그들은 약 2천 년 전의 사도들과 같이 행하지 못한다.

또한 위의 두 번째 인용부분에서 보는 것처럼, 조목사는 신약 지역 교회의 신유의식을 주장하기 위해 야고보서 5:14-16을 근거로 삼고 있다. 그는 위의 인용부분과 매우 유사한 내용을 그의 다른 책에도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와 능력과 병 고치는 은사 등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고전 12:28). 교회 안에서는 신유의 역사가 마땅히 나타나야 한다. 병 고침의 은사는 초대 교회 이후로 사라진 것이 아니다. 말세로 접어든 오늘날의 교회에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사모하는 자들에게 병 고침의 은사를 특별히 나타내고 계신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중간 생략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4-16). 당시의 장로는 오늘날 회중의 인도자가 되는 주의 종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서 교회가 존재하는 한 주의 종은 병 고침의 은사를 받아 행할 수 있는 성경적인 권위와 이를 행해야 하는 성경적인 의무를 부여받은 자들인 것이다.』3)

위에서 보는 것처럼 조목사는 야고보서 5:14-16을 가시적인 지역 교회 내의 병 고치는 은사들에 대한 근거 구절로 삼고 있다. 그 근거 구절을 바른 성경인 <한글킹제임스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장로들은 주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그가 죄들을 범했어도 그것들을 용서해 주시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서로 잘못들을 자백하고 치유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효과적이고 열렬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위의 야고보서 구절들이 말씀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지역 교회 내에 병든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즉 목사들)을 청해야 한다(14절). 청함 받은 자리에 모인 장로들은 효과적인 기도를 위해서 서로 간에 있는 잘못을 낱낱이 자백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한다(16절). 그리고 몸이 아파 누워 있는 성도를 위해 서로 열렬히 기도한다(16절). 교회의 장로들이 와서 서로 잘못을 자백하고 치유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면 그 믿음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께서 병든 자를 일으키실 것이다(15절).
조목사는 이와 같은 내용의 야고보서 5:14-16을 근거로 하여 신유를 지역 교회가 실행해야 할 의식으로 가르치고, 또 자신도 그것이 ‘교회가 끝날까지 계속해야 할 의식’이기에 매주일 신유를 선포하고 있지만,4) 우리는 야고보서의 이 구절들이 “교회의 장로들이 병든 자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그곳이 교회가 되었든 병원이 되었든 병자의 집이 되었든 청함을 받은 곳으로 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의 지역 교회들이 성경의 명령을 근거로 하여 그들이 교회의 전통으로 정한 방식을 따라 정기적(定期的)으로 실행하는 주의 만찬과 침례와 같은 의식(儀式)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으로, 그것은 시·공간적 임의성이 전제되어 있어 결코 신약 지역 교회의 의식(儀式)의 범주에 들 수 없는 실행인 것이다.
또한 야고보서 5장에 등장하는 신적 치유는 조목사가 주장하는 ‘신유의 은사’의 결과가 아니라, 서로의 잘못들을 자백하고 치유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는 장로들의 효과적이고 열렬한 “기도”에 주님이 응답하시는 것을 말하고 있다. 조목사가 현 교회 시대의 신유의 은사의 근거로 든 야고보서 5장의 그 구절들에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신유의 은사가 주어진다거나, 그것을 갖도록 구해야 한다는 것을 언급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그 구절들은 병든 성도가 취해야 할 방법을 말하고 있을 뿐이며, 그의 청함을 받은 교회 장로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을 뿐이다. 주님이 치유하시기 때문에 신유인 것은 확실하지만, 결코 조목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주의 종은 병 고침의 은사를 받아 행할 수 있는 성경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이를 행해야 하는 성경적인 의무를 부여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설령, 교회 장로들에게 신유의 의무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조목사처럼 자의적으로 매주일 의무감을 갖고 신유를 선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병든 자에게서 청을 받는다면 성도의 요청에 거절하지 말고 가서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의무이다. 따라서 야고보서 5:14-16의 병 고침은 은사가 아닌 타 성도를 위한 기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올바른 성경 해석이다. [필자는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병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치유(Divine healing)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의 질병을 위해서 기도하면 주님의 뜻 가운데서 치유해 주심을 믿는다. 하지만 질병을 얻게 되는 데에는 직간접적인 원인이 있다. 어떤 질병은 성도에게 주는 경고용도 있고, 어떤 것은 징계용도 있다. 본인의 부주의나 주변 환경 때문에 걸리는 병도 있다. 그러나 어떤 목사가 기도한다고 해서 모든 질병이 다 낫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도 시대가 끝난 현 신약 교회 시대에는 신유의 치유자(divine healer)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조목사가 야고보서 5장에 등장하는 ‘교회의 장로들’을 정의하는 부분이다. 그는 교회의 장로들이라는 동일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두 책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장로는 오늘날 회중의 인도자가 되는 주의 종을 가리킨다.』5)
『당시의 장로는 오늘날 회중의 인도자가 되는 목사나 장로, 또는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한 성도들을 가리킵니다.』6)

2001년에 출판된 첫 번째 인용문에서는 야고보서 5장 당시의 장로가 ‘오늘날 회중의 인도자가 되는 주의 종’이라고 한 반면, 그 후년도인 2002년에 출판된 두 번째 인용문에서는 ‘오늘날 회중의 인도자가 되는 목사나 장로, 또는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한 성도들’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조목사가 주장하는 신유의 은사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을 ‘회중의 인도자가 되는 주의 종,’ 곧 목사에서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한 성도들’로 확대했음을 보여 주는데, 이는 첫 번째 인용부분만을 가지고는 조목사가 주장하는 그 신유의 은사를 지역 교회 내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목사는 성경에서 ‘장로’(elder) 또는 ‘감독’(bishop)으로 불리며, <스코필드주석성경>을 집필한 C.I. 스코필드는 이 직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장로(프레스뷔테로스)와 감독(에피스코포스=감독자)이라는 말은 같은 직분을 나타내는데... 전자는 그 사람을 언급하는 것이고 후자는 그 직분의 임무를 언급하는 것이다.』7)

성경에서 목사를 부르는 명칭은 감독(bishop, 딤전 3:1), 장로(elder, 딤전 5:17), 목사(pastor, 엡 4:11) 세 가지이다. 사도 요한도 자신을 장로라 불렀고(요이 1, 요삼 1), 베드로도 자신을 장로라 불렀다(벧전 5:1).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장로 직분은 에베소서 4:11의 “목사”이다. 그러나 개신 교회의 직책으로서의 장로는 교회에서 어른으로 대접받는 사람들일 뿐이다.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회에는 그런 장로 직분이 없다. 목사가 곧 장로이기 때문이다. 다만 감독과 장로와 목사라는 칭호 중에 목사라는 칭호를 쓰는 것이다. 조목사는 장로에 관한 올바른 성경적 개념을 정립하지 못한 채 야고보서 5장의 ‘교회의 장로들’을 정의하려다 오류를 범한 것이다.

지금까지 성경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신약 교회 시대에는 신유가 교회의 ‘의식’이 될 수 없다. 교회와 무관한 일을 교회의 의식이라며 행하는 곳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교회가 아님을 알도록 하자. BB
주석)---------------
1) 조용기,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서울: 서울말씀사, 2002), p.164.
2) 위의 책, pp.164-165.
3) 조용기, 『신유론』 (서울: 서울말씀사, 2001), pp.51-52.
4) 위의 책, p.49.
5) 위의 책, p.51.
6) 조용기,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p.164.
7) 『스코필드주석성경』 (서울: 말씀보존학회, 1994), “신약,”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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