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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짓는 자녀에게 “그럼에도” 베푸시는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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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8월호>
시편 106편은 시편에 기록된 “할렐루야” 시들, 즉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로 시작하는 시들 가운데 첫 번째 시이다(cf. 시 111,112,113,135,146,147,148,149,150편). 본 시편에서 주를 찬양해야 하는 이유로 제시하는 것은 “죄짓는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총”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향해 가지신 자비와 긍휼은 그들의 죄 가운데서도 넘쳐난다.『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오, 주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자비는 영원히 지속됨이라. 주의 능하신 행적들을 누가 말할 수 있으며 그의 모든 찬사를 누가 나타낼 수 있으랴?』(1,2절) 시편의 화자는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선하심과 영원히 지속되는 자비 때문이라고 노래한다. 죄에 자주 무릎 꿇고 주님을 거역했던 세월을 돌이켜볼 때 그 잃어버린 세월의 얼룩진 자리를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이러한 작은 인생에 베풀어 주신 은혜와 자비도 다 셀 수 없을진대, 하물며 주님의 모든 능하신 행적들을 누가 말할 수 있으며, 그분의 모든 찬양을 누가 나타낼 수 있겠는가!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면전에서 요한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으며(요 20:30), 그분께서 행하신 다른 많은 일들이 일일이 기록된다면 세상 그 자체에라도 기록된 책들을 둘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요 21:25). 즉 아무도 주님의 능하신 행적들을 다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찬양으로도 그분께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 없는 무한한 능력의 『참 하나님』(요일 5:20)이시다!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오 주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총으로 나를 기억하시고 오, 주의 구원으로 나를 찾아 주소서. 그리하여 나로 주께서 택하신 자가 잘되는 것을 보게 하시며 주의 민족의 기쁨 가운데 즐거워하게 하시고 주의 유업을 자랑하게 하소서』(3-5절). 공의를 지키고 의를 행하여 주님께 은총과 구원을 얻는 것은 구약적 구원을 보여 준다.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갚아 주셨다(롬 2:6,7). 그러한 사람을 택하시어 그분의 구원으로 찾아 주셨고, 즐거움과 유업을 소유케 하셨다. 즉 어느 시대에나 그 행위가 올바른 자들에게는 그분의 선함을 베푸신다. 인생의 소원은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아 잘 되는 것이며, 그분께서 베풀어 주신 것들을 자랑삼아 간증해 보는 것이다. 그러한 소원의 성취를 막는 것이 성도 자신의 죄라는(사 59:1,2) 점은 너무도 쉽게 간과된다. 죄에 젖어 살지는 않아도 작은 죄들에 묻혀 살기에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두운 산길을 더듬듯 두려움과 염려 가운데 생을 보낸다. 그러한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이 죄로 인해 위태해질 때면 은총의 손길을 뻗어 주시곤 한다.
『우리가 우리의 조상들과 함께 죄를 지었나이다. 우리가 죄악을 범하였으며 우리가 악하게 행하였나이다』(6절). 화자는 자신과 동족을 분리시키지 않고 “우리”의 죄를 참회한다. “범죄와 징계와 구원”이 악순환하는 역사를 되짚으며 “우리의 죄악이 받아야 할 것보다 적게 벌 주시는”(스 9:13) 하나님을 찬양한다.
첫째,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행하신 주님의 이적들을 깨닫지 못했고, 주님의 수많은 자비를 기억하지도 못하여 홍해에서 주님을 거역했다(7절). 『그들이 모세에게 말하기를 “이집트에 무덤이 없어서 네가 우리를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서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느냐? 우리가 이집트에서 너에게 한 말이 이것이 아니냐? 말하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이집트인을 섬기리라.’ 하지 않았느냐? 우리가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인을 섬기는 것이 더 나았겠노라.” 하더라』(출 14:11,12). 『그럼에도 주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이는 자기의 강한 능력을 알리려 하심이라』(8절). 즉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러한 백성 앞에서 홍해를 꾸짖어 홍해를 마르게 하셨으며, 그들을 인도하여 광야를 지나가듯이 바닷속을 지나가게 하셨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을 그들의 원수인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속하셨고, 뒤쫓아 온 이집트인들을 단 한 명도 남은 자가 없이 홍해에 수장시키셨다(9-11절).
둘째, 그 홍해의 사건 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주님을 찬송했지만(12절, cf. 출 14:31; 15:1-21), 곧 주님의 행사를 잊어버리고 주님의 조언을 기다리지 않고 광야에서 심히 욕심을 부려 고기를 먹고자 했다(13,14절, cf. 민 11장). 『주께서 그들의 요구대로 그들에게 주셨으나 그들의 혼 속으로 메마름을 보내셨도다』(15절). 백성들은 메추라기 고기를 먹고서 배는 불렀으나 그들의 혼은 메말라 있었다. 육신은 기름졌어도 혼에는 아무런 기쁨이 없었다(잠 15:17). 『주의하고, 탐심을 조심하라. 이는 사람의 생명이 자기가 소유한 것의 풍부함에 있지 않음이라.』(눅 12:15)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셋째, 이스라엘은 진영 가운데서 모세와 아론을 시기하여 그들의 영적 권위에 도전했다(16절). 그때 땅이 갈라져 다단을 삼켰고 아비람의 무리를 덮었으며 불이 그 무리 가운데 붙어서 화염이 악인들을 살랐다(17,18절, cf. 민 16장). “시기는 모든 것을 갖고 싶어 하고 결국 죽음이 주어진다.”
넷째, 이스라엘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그 주조한 형상을 경배하여 자기들의 영광을 풀을 먹는 수소의 모습으로 바꾸었다. 함의 땅 이집트에서 경이로운 일들을 행하시고 홍해에서 무서운 일들을 행하신 구주 하나님을 잊고서(19-22절) 뱀처럼 생긴 몸 위에 두 뿔 달린 황소의 얼굴을 가진(겔 1:5-11; 10:14) “사탄”을 숭배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멸망시키리라 말씀하셨으나 그의 택하신 모세가 갈라진 틈에서, 그의 앞에 서서 그의 진노를 돌이켜 그들을 멸하시지 않게 하였도다』(23절, cf. 신 9:8). 즉 “중보자”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되는 대목이다. “중보자 모세”는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신 위대한 중보자, 즉 “모세와 같은 선지자”(신 18:15)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딤전 2:5).
다섯째, 믿음 없는 정탐꾼들의 보고(민 13:31-33)를 들은 이스라엘은 약속하신 좋은 땅을 멸시했으며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장막에서 불평하며 주님의 음성에 경청하지 않았다(24,25절). 주님께서는 그들을 대적하시어 광야에서 쓰러지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26절), 그 조상들의 전철을 밟은 그들의 씨들 역시 이후 역사 속에서 민족들 가운데 쓰러지고 흩어짐을 맛보아야 했다(27절). 자기 민족의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면 동일한 역사가 반복된다. 의도적인 무지는 반역의 씨앗이다.
여섯째, 이스라엘은 바알프올에게 연합하여 죽은 자들에게 바친 희생제물들을 먹었고(민 23:28; 25:18; 31:16), 그들의 행위로 주님을 격노케 함으로써 재앙이 그들 가운데 퍼졌다(28,29절). 『그때 피느하스가 일어나 처벌하자 그 재앙이 그쳤으며 그 일이 모든 세대에 걸쳐 영원무궁토록 그에게 의로 여겨졌도다』(30,31절). 주님께서는 이 사건에 대해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피느하스가 그들 가운데서 나를 위해 열심을 내어, 이스라엘 자손으로부터 나의 진노를 돌이켰으니, 내가 나의 질투심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진멸하지 않았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보라, 내가 그에게 나의 화평의 언약을 주리라. 그와 그 뒤를 잇는 그의 씨가 그것을 가지리니, 곧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이는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열성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라.』(민 25:11-13)라고 말씀하셨다. 이를 계기로 레위 지파 제사장직은 천년왕국뿐만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지게 된다(사 66:21, 렘 33:18,22, 겔 43:19). 피느하스처럼 『하나님을 위하여 열성』을 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복된 일이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열성을 내는 성도를 눈여겨보시고 그를 택하시어 들어 쓰신다. 열성이 없는 사람에게 무슨 일을 시킬 수 있겠는가? “악하고 게으른 종”(마 25:26)이라는 책망을 듣게 하시려고 부르시겠는가? 지식이 조금 부족해도, 인품이 덜 성숙되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위해 열심을 내는 성도를 가치 있게 보신다. 성도들이여, 『일에는 게으르지 말고 영 안에서 열심을 내며 주를 섬기라』(롬 12:11). 『견고하라, 흔들리지 말라,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아니한 줄을 너희가 앎이니라』(고전 15:58).
일곱째, 이스라엘은 두 번째 반석 사건 때도 주님을 노하시게 했고, 모세는 『패역한 너희는 이제 들으라. 우리가 이 바위에서 너희에게 물을 나오게 해야만 하겠느냐?』(민 20:10)라며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주체를 자신과 아론에게 돌리는 경솔함을 보여 곤란하게 되었다(32,33절, cf. 민 20:2-13). 또한 이스라엘은 재판관기 시대에 그 땅의 민족들을 멸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섞여 살면서 우상을 섬겼고(34-36절), 심지어 자식들을 마귀들에게 제물로 바침으로써 주님의 진노를 샀다. 결국 이방에게 넘겨져 압제를 받아야 했던 그들을 주님께서는 삼손, 바락, 입다, 기드온, 드보라, 톨라, 야일 등의 재판관들을 통해, 또 사울, 다윗, 히스키야, 요시야 등의 왕들을 통해 여러 번 구해 주셨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자기들의 책략으로 주님을 격노케 했고, 자기들의 죄악으로 인해 낮아져야 했다(37-43절). 이스라엘의 역사는 주님의 모든 능하신 행적(2절)에도 끄떡 않는 “구제불능의 육신”을 보여 준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 낼 것인가?』(롬 7:24)
『그럼에도 그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고통을 주시하시어 그들을 위해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마음을 돌이키셨으며 그들로 하여금 그들을 사로잡아간 모든 자들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44-46절). “그럼에도”에 주목해 보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그들이 고통 가운데 부르짖으면 그분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마음을 돌이켜 그들로 사로잡혀 간 땅에서 도움을 받게 하셨다(단 3:29,30; 6:25-27, 에 8-10장). 이스라엘이 그들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박은 이후로는 그러한 긍휼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이제 곧 대환란으로 들어갈 것이고, 그때 다음처럼 기도할 것이다. 『오 주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방 가운데서 우리를 모으시어 주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드리게 하시며 주의 찬양을 환호하게 하소서』(47절). 주님께서는 대환란의 극심한 고통을 겪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또다시 그들을 돌아보사 구원해 주실 것이다. 그렇게 회복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정통치를 기뻐하며 외칠 것이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받으실지로다. 모든 백성들은 “아멘.” 할지어다.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48절).
자식이 잘못해서 매를 댔다가도 연한 살에 도드라진 매 자국을 보고서 내심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 부모는 없다. 참된 부모는 징계를 즐기지 않는다. 비록 “죄”로 고난당한다 해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분을 두려워하며 죄에서 돌이켜 “많이 아프다”고 말씀드려 보라.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마음 아파하시며” 구해 주실 것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주께서도 자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라』(시 103:13,14).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