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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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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08월호>
창세기 22장에는 성경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관한 가장 위대한 예표가 나온다. 아브라함은 아버지 하나님의 예표이고, 이삭은 아들 하나님의 예표이다.창세기 22장은 『이 일들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며』(1절)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시고, 또 아무에게도 시험당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다(약 1:13). 하지만 예수님은 시험받으셨고(마 4장, 눅 4장) 그것도 두 번 이상 받으셨다(마 22장). 그리고 여기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다고 말씀한다. 이런 내용을 보면서 성경을 믿지 않는 학자들과 불신자들은 "이런 것이 성경의 모순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라고 빈정댄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신성"에 대해 시험받으신 것이 아니며, 그분께서 당하신 시험들은 "인성"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창세기 22장에서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그가 악을 행하도록 유혹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독자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와 그가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고 있는지를(히 11:17-19) 보시기 위한 시험이었다. 특히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라 불렸느니라.』(약 2:23)고 말씀하는데, 이 시험은 "친구로서의 우정"을 재어 보기 위한 것이었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친히 하시려는 일에 대해 말해 줘도 되는 그런 신실한 사람으로 여기시게 되었다.
이에 필자는 아브라함의 신실함에 대하여(갈 3:6-9)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우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시험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성도를 들어 쓰시기 전에 그가 얼마나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그릇인가를 보시기 위해 시험하신다. 잭 T. 칙이 만든 만화전도지 중에 <홀리 조>가 있는데, 그 내용은 실제 미 육군에서 복무했던 어느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토대로 하고 있다. 막사에서 소등이 되고 나면 그는 언제나 자기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막사에서의 첫째 날 밤 함께 생활하던 병사들은 기도하는 그에게 전투화를 던졌다. 그런데 그는 그 전투화들을 모두 닦아서 다음 날 그들의 침대 옆에 놓아두었다. 또 그날 밤에는 동료 병사들이 그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셋째 날 밤에는 그가 기도하고 있었는데 주위에서 공포탄을 쏘아 댔다. 끝내 부사관이 막사로 들어와서 "동작 그만! 저 친구는 그런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도 않잖아!"라고 했다. 그 그리스도인 병사는 "전우들"의 조롱 같은 것은 상관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믿음을 지켰다. 그런 모습은 시험받을 때에야 비로소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다.
오늘날에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유행하고 있다. "너는 항상 이길 수 있어. 네 자신을 믿어!" 그러나 한 사람의 인격은 "이기는 것"에 달려 있지 않다. 상황이 좋을 때 이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예컨대 봉급이 올라가거나 건강이 좋으면 누구나 즐거워한다. 그러나 인생에서 패배를 경험할 때는 그 반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은 건강해도 알거지가 될 수 있다. 사랑과 결혼에서는 승리했다 해도 병에 걸릴 수 있다. 건강, 결혼, 재산 등 모든 것을 잘 갖추었어도 마귀가 그 사람의 자녀들을 망쳐 놓을 수 있다.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을 시험받게 하시고 그분의 말씀도 연단받게 하셨는데(시 12:6, 창 3:1), 당신은 전혀 시험받지 않고 살게 될 것이라 생각하는가? 고통, 박해, 조롱, 외로움, 낙담, 가난 등으로 당신도 시험받게 될 것이다. 시험을 어떻게 통과하고 견디는지를 보면 그의 "영적 체질"을 알 수 있다. 시련의 정중앙에서 욥은 『그가 나를 연단하시면 내가 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말했는데, 그것은 시험을 견뎌냈을 때나 해당되는 고백이다.
아브라함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시험받았다. 『네가 사랑하는 네 독자 이삭을... 드리라』(창 22:2). 사랑하는 것들로 시험받지 않았다면 사실 시험받은 게 아니다(요 21:15). 필자가 군 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 중 하나는, 어떤 사람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사랑하는지 보면 된다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성도가 사랑하는 것을 시험하신다(마 22:37,38). 창세기 22장을 욥기 1,2장의 상황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마귀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주님 앞에 나오자(욥 1:7, 벧전 5:8),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 종 아브라함처럼 신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마귀가 반문한다. "그야 주님께서 그를 부자로 만들어 주시고 아들도 주셔서 그런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은 내 친구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것이지. 내가 무엇을 하라고 해도 그는 순종할 것이다!" 이때 마귀가 도전한다. "하나님, 지상에는 주님의 '친구'가 없습니다. 주님보다는 제게 친구가 더 많습죠. 저를 위해 자기 아기를 악어에게 던지는 엄마들도 있고, 저를 기쁘게 하려고 자기 자식을 불태우는 부모도 있습죠. 천하의 아브라함도 별 수 없을 겁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럼, 한번 시험해 보도록 하자!" 그런 후 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사랑하는 네 독자를 내게 번제로 바치도록 해라!"
헤롯왕은 침례인 요한의 설교를 기쁘게 들었고 그의 말을 따라 이것저것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여자 아이에게 한 맹세를 지키지 않으면 "체면에 먹칠할까 봐" 침례인 요한을 죽이게 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다가 지옥에 간 사람인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요 12:43). 흔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된다.
2. 신실한 친구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으로 간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모리야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곳으로 갔다(창 22:2,3). 하지만 우리는 이와 반대되는 경우를 많이 목도하게 된다. 한 형제가 우리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라기 시작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강력한 설교를 싫어하는 아내가 다른 교회로 옮기지 않으면 "우리 사이는 끝장"이라고 남편에게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다. 얼마 안 있어 그들은 떠났고 주님을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로 전락해 버렸다. 또한 어떤 청년이 『펜사콜라성경신학원』에 와서 공부를 했다. 그런데 아내가 강력한 설교, 줄어든 수입, 각박한 트레일러하우스 생활, 우글거리는 바퀴벌레, 플로리다 주의 높은 습도를 견딜 수 없어 했다. 그래서 남편을 설득하여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서는 주님의 사역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경배도 드리지 않게 되었다. 이런 경우들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신실한 성도는 주님께서 그를 보내시는 곳으로 가기 마련이다. 사람의 의견 따위는 중요치 않다. 아브라함은 모리야 땅으로 가는 것에 대해 사라의 생각을 묻지 않았다. 여호수아도 자기 부인에게 주님을 섬겨도 될지를 묻지 않은 채 『나와 내 집은 주를 섬기리라.』(수 24:15)고 선포했다.
3. 신실한 친구는 부활을 믿는다(창 22:5). 아브라함은 청년들에게 『나와 아이는 저기로 가서 경배드리고, 다시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말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린다면 어떻게 두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있겠는가? 아브라함은 불순종하려고 작정했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이삭을 일으키실 수 있음을 믿었다고 말씀한다(히 11:19). 창세기 21:12에서 주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이는 이삭 안에서 난 자가 네 씨라 불릴 것임이라.』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다. 설령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들을 번제로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리셔서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을 믿었던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믿음이다! 구원은 어떻게 받는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받는다(롬 10:9). 구원의 기쁜 소식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해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이다(고전 15:3,4). 이것을 믿지 않았다면 구원받지 않은 것이다(고전 15:2). 신실한 사람은 부활을 믿는다. 욥은 기록된 성경이 없었고 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하시지 않았을 때도 부활을 믿고 있었다(욥 19:26,27).
4. 신실한 친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의견을 같이한다(창 22:6,8). 성경은 아브라함과 이삭 『두 사람이 함께 가더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예표적으로 아들 하나님이 죄인들의 죄들로 인해 죽으셔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께서 서로 완전히 동의하셨음을 보여 준다(요 6:38-40). 예수님께서는 그분 앞에 놓인 즐거움을 위해 십자가를 견디셨고(히 12:2),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다(빌 2:8-11).
그리스도인들끼리도 사소한 것들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 그러나 지상에서 성도라면 누구나 동의해야 하는 주요한 사항들이 있다. 예컨대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요 1:14, 딤전 3:16).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구원받지 않은 자들이 죽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믿는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녀에게서 나셨음도 믿는다. 즉 예수님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다. 게다가 죄인이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자기 의를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이런 점들에 대해 동의하고 있다면 이런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함께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연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이다. 모든 교회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누가 그랬는가? 도대체 왜 연합해야 하는 것인가? 모든 교회들이 다 거듭난 성도들로 구성된 것도 아닌데 왜 연합해야 한단 말인가? 성경이 말씀하는 유일한 연합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영적인 연합이며, 그 몸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구속 사역을 믿는 것이다(갈 3:26,28). 예수님 밖에서는 어떤 연합도 있을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은 불의한 자들과 함께 멍에를 메는 짓에 불과하다(고후 6:14-18).
5. 신실한 친구는 대속을 믿는다. 창세기 22:8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제에 쓸 어린양으로 마련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변개된 성서들은 이 구절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for himself) 친히 준비하시리라."로 변개시켰다. 이렇게 변개되면 위대한 예표적인 진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는 『어린양』이 누구이신지 신약이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친히 어린양이 되신 하나님, 곧 예수님이신 것이다!(요 1:29) 이처럼 <킹제임스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린양으로 마련하셨음을 보여 주고 있다. 없는 단어(for, "위하여")를 임의로 첨가함으로써 중요한 예표적인 진리를 파괴해 버린 것이다. 신실한 성도라면 누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들을 위해 대신 죽으셨음을 믿는다(롬 5:6, 벧전 3:18). 말하자면 선행이나 침례, 교회 출석, 헌금, 십계명 등 자신의 노력으로 죄의 대가를 지불하려 하지 않고 대속 제물이신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고후 5:21).
6. 신실한 친구는 결과에 관계없이 행동한다. 아브라함은 모리야 땅으로 가서 제단을 세우고 나무를 놓고 아들을 묶었다. 자기 아들을 죽이기 위해 자기 손으로 직접 묶은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116세나 된 노인이 17세의 아들을 묶을 수 있었는가?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묶도록 스스로 내어 준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마 26:53)을 부르실 수 있었지만 스스로 십자가를 향해 가셨다(마 26:39). 아브라함은 이제 이삭을 제단에 놓고 칼을 높이 들었다. 그는 실제로 자기 독자에게 칼을 대려 했고, 그 결과를 하나님의 손에 맡겼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교육받고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믿음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다. 즉 믿음이라는 것이 "보이는 증거"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결과에 상관없이 행동하는 것이며, 어떤 결과를 낳는다 해도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번은 찰스 웨슬리가 그의 형제인 요한 웨슬리에게 "하나님께서 내게 날개를 주시면 날 수 있을 텐데."라고 말했다. 뜻밖의 말이었지만 그는 이렇게 받아쳤다. "하나님께서 나보고 날라고 하신다면, 나는 하나님께서 날개도 주실 것이라고 믿겠어."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면 뭐든지 할 것이고, 또 그렇게 하도록 해 주실 것도 믿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이다.
마귀는 아브라함에게 "정말로 네 인생의 '웃음'(이삭)을 네 손으로 죽이려는 건 아니지?"라고 속삭이며 회유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요지부동이었다. "두 번째 이삭"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을 때도 그분은 마귀가 뭐라고 지껄이든, 또 죄인들을 통해서 자신을 얼마나 때리고 모독하고 조롱하든(막 15:30,31), 그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마귀에게 "그래, 덤빌 테면 덤벼 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사 50:8).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구하려 하지 않으셨기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으셨다. 아브라함은 모든 결과를 주님께 맡기고 이삭에게 칼을 꽂으려 했는데,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셨다(창 22:12). 이처럼 아브라함이 자신의 믿음을 보여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약속을 다시 확정해 주셨다(창 22:17). 또한 아브라함이 신실했기에 오늘날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창 22:18, 갈 3:8,9).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필리핀 주둔지에 배속되었던 일본군 히루 오나다 중위는 1974년 3월 11일에 마침내 항복의 의미로 그의 일본도를 필리핀 정부에 넘겼다. 전쟁은 1945년에 이미 끝난 상태였으나 오나다 중위는 1974년까지 계속 필리핀 루벵 섬에 혼자 머물면서 게릴라전을 펼치며 항전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가 상관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명령은,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단 한 명의 병사만 남는 한이 있더라도 그 병사를 이끌고 계속 싸우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1945년 종전 당시 "왜 계속 싸우려 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나는 항복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 나의 일념은 오직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나중에 이 소식이 일본까지 전해져서 비행기를 타고 필리핀으로 날아온 그의 전 사령관이 종전을 알리고 항복을 명령한 후에야 오나다 중위는 항복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 구원받지 않은 일본 군인보다 못한 성도들이 너무 많다. 그에게서 "신실함"을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에 숫양을 마련해 주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불렀다(창 22:14). "여호와이레"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실 것이다"라는 뜻이다. 주님과 화해하기를 원하는 죄인은 그분께서 친히 마련해 주신 구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후 5:19). 당신은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구주를 믿음으로 영접했는가? 언젠가 구원과 관련하여 존 R. 라이스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구주를 마련해 주셨고, 당신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바로 그 '죄인'을 내놓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구주를 마련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살이와 죽음의 때, 심지어 사후에도 능력 있는 구주가 되어 주신다. 그때가 되면 "여호와이레"의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구주 예수님을 신뢰한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지 절감하면서 감사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