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경기장에서 분류
신약에 나오는 경기들을 통해 배우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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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7년 09월호>
고대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는 여러 가지 경기가 펼쳐졌다. 신약성경은 그중에서 세 가지 주요 경기를 언급하고 있는데, 경주와 권투와 레슬링이다. 특히 경주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각각의 경기들은 운동선수의 삶을 묘사해 주며, 믿음의 경주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독특하고 중요한 관점들을 제공하고 있다.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경주"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빌 3:14) 천상이라는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다. "권투"는 우리 안에 있는 대적, 곧 육신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나타낸다. 『또 내가 그처럼 싸우되[fight] 허공을 치는 자같이 아니하노라.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 후에 어떻게 해서든지 내 자신이 버림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전 9:26,27). 또한 "레슬링"은 영적인 악과의 싸움을 보여 주는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이는 우리의 싸움[wrestle]이 혈과 육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정사들과 권세들과 이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악에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엡 6:12).
이상 세 가지 경기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전쟁과 믿음의 경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이 있지만, 각 경기들에서만 발견되는 서로 다른 고유의 특징들도 지니고 있다.
우선 달리기 경주가 보여 주는 핵심 진리는 다음과 같다. ① 경주자가 완주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듯 완주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완주할 수 있다. ② 경주자는 있는 힘껏 달려야 한다. ③ 경주자는 결승선에만 집중해야 한다. 이와 무관한 것이나 잠시 지나쳐 가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④ 경주자는 결승선에 도달하기까지 인내해야 한다. 지쳐 떨어져 나가 버려서는 안 되며 불굴의 자세로 끝까지 버텨야 하는 것이다. ⑤ 경주자는 중단 없이 전진하는 일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지체해서는 안 된다. ⑥ 경주자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믿음의 경주는 장애물이 많은 코스임을 기억하라. ⑦ 경주자의 마음은 가장 고귀하고 가장 고상한 승리를 얻기 위한 결의에 차 있어야 한다. 그보다 더 낮은 목표에 결코 만족하지 말라. 이같이 행한 승리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천상의 위대한 심판자께서 주시는 영광으로 가득한 상이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고후 5:10, 빌 3:14).
경주는 그리스도인의 희생과 믿음의 선한 싸움에 대한 진리들의 진수를 보여 주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그 어떤 운동 경기보다 더 많이 인용되는 것이다(행 20:24, 고전 9:24, 갈 5:7, 빌 3:14, 딤후 4:7, 히 12:1,2 등). 어떤 사람의 사고의 방향은 늘 그의 인격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인생은 내면의 생각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경기장의 경주로에는 다양한 것들이 놓여 있다. 더 멀리 나아가게 해 주는 발판이 있는가 하면, 경주를 가로막는 장애물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만날 때면 항상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를 올바르게 분별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올바른 목표를 향해 철저히 분투하도록 해 준다면 효과적인 발판이 될 것이지만, 경주로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목표에 고정되어 있어야 할 시선을 옆이나 뒤쪽으로 돌리게 하고 있다면 반드시 피해야 할 장애물이 된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경주에 대해 말할 때,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에 손을 뻗쳐』(빌 3:13)라고 말했다.
사실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바울의 간증은 빌립보서에서 더욱 진가를 발휘한다. 그는 자신의 영적인 삶과 섬김을 경주에 적용했는데, 어떤 다른 서신서에서도 이렇게 집중적으로 강조하지는 않았다. 빌립보서 3장에서 볼 수 있는 그의 경주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경주자의 부르심과 힘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다(4-7절). 그의 이상적인 목표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다(8-14절). 그리고 경주자의 복된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어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주실 그날이 도래하는 것에 있다(20,21절).
권투는 가장 고된 경기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일단 경기가 시작되면 선수들은 상대방을 향해 강펀치를 날렸는데, 특히 얼굴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작가인 호머 시대에도(B.C. 900년경) 권투가 있었고, 당시 선수들은 가죽 끈으로 손을 감았다. 시간이 흘러 "카에스투스"(Caestus)가 등장하면서 여건은 더 나빠졌다. 카에스투스는 고대 로마인이 만들어 낸 복싱용 글러브로서 주먹의 손가락 관절 부분에 공격용의 금속성 돌기가 있었다. 이로 인해 선수들이 큰 부상을 당하곤 했다.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선수들은 머리와 광대뼈 있는 부분에 천이나 가죽으로 된 보호구를 착용했는데, 양 선수 중 하나가 한 손을 들어 항복하면 경기가 끝이 났다. 권투에서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결정적 타격"은 눈 아래쪽을 강하게 주먹으로 치는 것인데, 이에 대한 기술적인 용어로 헬라어 "휘포피아조"가 쓰였다. 어원적인 의미로는 "눈 아래쪽을 주먹으로 가격하다"라는 뜻인데, 실제 경기장에서는 현대 권투에서 말하는 "녹아웃"(knockout, K.O.)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9:27에서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한다"(헬, 휘포피아조, 고전 9:27)라고 했을 때, 그것은 『내가 그처럼 싸우되 허공을 치는 자같이 아니하노라.』(고전 9:26)고 했듯이 자신의 육신을 향해 강력한 펀치를 날려 복종케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자기 부인을 통해 자신의 몸을 성령님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갈망이나 안락함 또는 즐거움이 영적 전쟁의 승리를 쟁취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결코 허공을 치는 자처럼 헛되이 휘두르거나 적당히 봐주지 말고 대적인 육신을 완전히 굴복시켜야 하는 것이다.
레슬링은 상대방을 힘껏 던져서 땅에 내리꽂는 경기이다. 앞에서도 인용했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전신갑옷을 묘사할 때 우리가 어둠의 권세들에 맞서 싸우는 것을 레슬링 경기에 적용했다. 『이는 우리의 싸움[wrestle]이... 영적 악에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엡 6:12). 여기서 바울은 레슬링을 경기의 영역에서 전쟁의 영역으로 확대하여 묘사했는데, 마치 무구(武具)를 모두 갖춘 병사가 전장에서 적들과 백병전을 벌이는 모습이 연상된다. 갑옷을 입고 서로 뒤엉켜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가운데, 순간의 방심으로 적의 칼날이 옆구리에 꽂힐 수 있고, 방패로 머리에 가격을 당할 수 있으며, 또한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어둠의 권세들과의 싸움이 마치 거대한 야생 사자와 레슬링을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만큼 영적 악에 대항하는 싸움은 치열한 전투인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묘사는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영적 전쟁에 임했는지를 보여 준다. 바울은 상대하고 있는 적이 결코 얕잡아 볼 상대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어둠의 권세들을 향해 정신을 차리고 대항하지 않으면 이내 먹잇감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자만하거나 시선이 흐트러지거나 틈을 보이게 되면 면밀히 주시하고 있는 대적의 기습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레슬링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진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적이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망각하지 말라. ② 적은 지금 곁에 있다. ③ 힘을 다해서 적과 겨뤄야 한다. ④ 대적은 당신을 내리꽂기 위해 이리저리 흔들고 있다. ⑤ 어둠의 권세들과의 전투에 진지하게 임하라!
성경은 이상 세 경기 모두를 온전히 치른 본으로서 바울을 제시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는 필사의 자세로 믿음의 경주에 임했다. 『그러나 나의 달려갈 길을 기쁨으로 끝마치고 내가 주 예수로부터 받은 사역,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라면 이런 일을 전혀 개의치 아니할 뿐 아니라 나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노라 』(행 20:24). 그런데 바울이 이런 본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역시 그가 따랐던 예수 그리스도의 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경주의 본을 따랐을 때 나타나는 위력이다. 우리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과 바울의 본을 따름으로써 믿음의 경주에 임하는 다른 성도들에게 또 다른 본을 남겨야 할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고전 11:1).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