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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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그리스도인으로 생을 끝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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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04월호>

『그러므로 그가 말씀하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라. 그리고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고 하셨느니라』(엡 5:14). “죽은 그리스도인”은 그보다 앞서 잠든 성도들처럼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말하지 않는다.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라는 말씀은 해당 그리스도인이 허물과 죄들 가운데서 죽어 있는 죄인들과 어울리고 있음을 책망하시는 것이다. 본문은 『향락 속에 사는 여인은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라.』(딤전 5:6)라는 말씀과 동일한 맥락이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다(눅 9:60).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이 “향락 속에 살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 그가 말씀대로 생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고, 성령님께서 그를 통해 역사하시지도 않는다. 댄스파티 때나 착용할 멋진 나비넥타이로 자기 목을 조르고 있는 사람의 꼴이 바로 오늘 살펴볼 “죽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대변한다.

첫째, 죽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그저 의무를 실행한다고 해서 우리 자신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증명할 수는 없음을 알아야 한다(눅 17:10). 영적인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행한다. 그러나 죽은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영적인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착각한다. 마르다가 그러했다. 자신은 일을 많이 하니까 영적이고, 마리아는 단지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고 있으니 영적이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언젠가 한 교회의 사모가 자신의 아들들을 염두에 두고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기를 수 있을까요?”라고 내게 물어 왔다. 그러나 나 자신도 어떻게 사람을 영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내게 뾰족한 수가 있었다면 “영적인 사람이 되는 법”이라는 과목을 만들어서 가르쳤을 것이다. 무슨 학칙들을 만들고 기독교 학교를 졸업하게 한다고 해서 그가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펜사콜라성경신학원의 졸업생들 중에서 결혼 생활도 정상이고 외양도 번듯한데, 실제적으로는 주님을 위해서 별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둘째, 죽은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이 현재 자기가 영적임을 증명한다고 착각한다. 물론 나는 당신이 과거에 축복을 받았기를 바라지만, 그때 받은 축복의 명성으로 살 수는 없다. 『형제들아, 나는 내가 붙잡은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다만 한 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에 손을 뻗쳐』(빌 3:13). 하나님께서 과거에 당신을 축복하셨는가? 그때 받았던 축복들을 노트에 써 놓고 헤아려 보라. 하지만 이제부터는 과거의 축복들을 뒤로하고 앞으로 받을 축복을 오늘 하나님께 구하라. 죽은 그리스도인은 항상 과거에 머물러 있다. 밥존스대학도 1968년에 주님 곁으로 간 밥 존스 시니어의 명성을 오늘까지도 우려먹고 있다. 그때 이후로 주님께로부터 더 이상 축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해인가 내가 받았던 가장 큰 축복은 감옥에서 죄수들이 무릎 꿇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본 일이었다. 내가 들은 가장 감동적인 소리는 죄수들이 바닥에 무릎 꿇고 기도하려고 시멘트 바닥 위의 철제 의자를 뒤로 미는 소음이었다. 얼마 전 감옥에서 설교했을 때는 무리 뒤편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는데 그 소란 때문에 설교를 듣지 못하자 죄수들이 의자를 앞으로 옮겨와 설교에 경청했다. 내가 간절히 바랐던 일들을 주님께서 드디어 이뤄 주신 것이다!

셋째, 죽은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경건하고” “올바른” 기준들을 세웠기 때문에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밥존스대학이나 펜사콜라기독교대학 같은 곳의 교수진은 자기들이 이런저런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의복 규정을 준수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영적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차적 성별”이나 “의복 규정” 등을 아무리 잘 지킨다 한들, 인간이 세운 기준은 고약한 시체 냄새를 풍길 뿐 그리스도인이 생기를 회복하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것들은 사나운 성질, 거짓말하는 혀, 성경을 믿지 않는 불신, 탐욕스러운 마음, 교만, 돈을 사랑함, 게으름, 투덜거림, 불평 등을 고쳐 줄 수 없다. 아무리 외적으로 완벽하게 보일지라도 영적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에 어떠한 도움도 줄 수가 없다.

넷째, 죽은 그리스도인은 행동하기를 거부한다. 이런 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은 잘 들추어내지만 스스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의 잘못을 자신의 안일한 삶을 지속하는 변명거리로 삼는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내가 한때 담임했던 교회에서는 예배 때 소리쳐 환호하는 형제들을 “건달”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송 후나 설교 도중에 “아멘!”이라고 외치면 육신적이라고 매도했다. 자신들은 헌금을 횡령하여 다른 계좌에 넣어 놓았으면서도 거리에서 목청 높여 복음을 외치는 형제들을 비난했다. 그들은 번듯한 그리스도인같이 보였지만 실상은 차가운 돌보다도 더 차갑게 죽은 자들이었다.
죽은 그리스도인은 돼지우리에서 살던 방탕한 아들과 같다. 즉 쓸모없는 아들인 것이다. 그 역시나 아들일 테지만 잘못된 장소에 있고, 자기 이름을 불러도 들을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쓰실 수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며 자고 놀면서 일생을 소진한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 무엇도 이룬 것이 없는 채로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가? 청년, 중장년, 노년이 되도록 당신이 사는 당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 어떤 표시도 남기지 않은 사람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가? 자신의 배를 채우고 자식들을 키우는 데만 인생을 모조리 쓰고 싶은가?


죽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구원하신 주님을 위해 행동하기를 거부한다. 그는 마치 방탕한 동생의 형과 같이 자기 연민에 빠져 있다. “아버지가 저와 제 친구들을 위해서는 잔치를 베풀어 주시지 않았잖아요!” 이런 죽은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영적인 일들을 기반으로 교제하지 않고 자신과 똑같은 부류와 친구가 되어 교회에 큰 문제가 생기면 자기편으로 이용해 먹는다. 내가 사역 초기에 담임했던 브렌트침례교회의 한 부부는 성도들에게 너무나 살갑게 대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돈 때문에 그랬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어떤 사람은 교회 회의에서 자기편이 되어 줄 사람을 얻으려고 다른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소프트볼 경기를 함께하던 구원받지도 않은 동료들을 데려와 회의에 참석시켜 투표를 하게 했다. 이런 사람들은 불평하고, 불평하고 또 불평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당신이 설교자라면 당신은 부정적인 진리들도 전파해야 한다. “맞은 개가 깨갱거리는 법이다.” 설교자들은 저격하듯 설교하지 말고, 오히려 산탄총을 쏘듯 설교해야 한다. 즉 설교단에 올라서서 산탄총을 “빵!” 하고 쏘는 것이다. 회중이 설교자가 발사한 탄알이 닿는 범위 안에 있다면 총알에 맞을 것이다. 그러면 누군가는 설교를 듣는 동안 아파서 깨갱대고, 누군가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악수하는 동안 낮게 으르렁거린다. 내가 집에 오면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하고 마침내 왈왈거리며 짖어대는 누군가가 있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돌보다 더 차갑게 죽어 버린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악용하고 자신들의 죄들을 정당화하며 움직이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내가 구원받았으면 됐지 뭐! 나는 그것으로 만족해! 나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란 말이야!”라고 말하는 침례교인들이다.


참된 영적 실행은 일종의 희생을 요구한다. 당신이 그 값을 치르지 않는다면 당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당신의 “무임승차”를 알아차린다. 영적이지도 않은데 영적인 척하며 사람들을 속일 수는 없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말하기를 “아니라, 내가 반드시 값을 치르고 네게서 그것을 사리라. 내가 값을 치르지 않고는 주 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더라. 그리하여 다윗이 은 오십 세켈로 그 타작마당과 소들을 사니라』(삼하 24:24). 다윗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으면서 주님을 위해 뭔가를 한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무언가 희생한 것도 없고 이룬 일도 없다면 당신의 간증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다.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린 아브라함을 보라. 그는 분명히 무언가를 희생했다(창 22장). 그것은 그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었다!


여호수아 또한 『나와 내 집은 주를 섬기리라.』(수 24:15)라고 선언했다. 여호수아의 아내도 앉아서 그 말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고, 출애굽한 후에 40년 동안 광야의 장막에서 생활했으며, 또 다른 20년 동안 남편이 전쟁터를 누비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아마 여호수아의 아내가 오늘날의 여자들과 같았다면 “어디 한번 보자구요! 내 의견은 묻지도 않았잖아요!”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그의 아내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당신은 주님의 종인가? 여호수아는 주님의 종이었다(수 24:29). 내 책상에는 “주의 종, 피터 S. 럭크만”이라고 쓰인 명패가 있다. 당신도 주님의 종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을 섬기고 있는가? 당신은 주님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의 욕망을 섬기고 있는가?

다섯째, 죽은 그리스도인은 열매 맺는 능력을 상실한다. 주님께서 삼 년 동안 열매를 찾으시다가 결국에는 나무를 자르라고 하신 말씀이 있다(눅 13:7). 그러나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뿌리도 없으면서 열매도 아닌 것을 열매인 척 가장하는 데 능숙하다. 주님은 싹, 가지, 잎, 뿌리 같은 것이 아니라 열매를 찾으신다. 자, 교회에 이런 팻말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열매맺는침례교회 : 삼 년 동안 우리 교회의 회원이 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 년이 지나도 열매를 맺지 않으면 쫓아낼 것입니다!”
어쩌면 열매 맺지 못하는 그 나무는 자랑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얼마나 멋진 나무인지 보라고!” 나뭇가지들은 뿌리에게 “어이, 거기 흙 정말 좋지 않아?”라고 묻는다. 뿌리는 “맞아. 너도 따뜻하게 햇볕을 쬐고 시원한 비를 맞으니까 좋지?”라고 한다. 다시 가지가 나뭇잎들에게 말한다. “산들바람에 하늘하늘 날리니까 정말 기분 죽이지 않니? 나는 정말 멋진 무화과나무야!” 그런데 정작 열매는 하나도 없다. 그래서 주님은 “잘라 버려!”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일이 미국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성경은 이것을 “이카봇”이라고 부른다.


“이카봇”은 “영광이 떠났다!”라는 뜻이다. 이전에는 뭔가를 했는데 지금은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없다. 당신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오페라에서 노래하던 가수가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건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것이 바로 이카봇이다. 수학 천재, 재능 있는 화가 혹은 음악 천재가 당구장에서 당구나 치고 있는 것을 본 적 있는가? 이카봇이다!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난다. 또한 가족들도 이카봇이 되고, 교회들도 이카봇이 되고, 학교들도 이카봇이 되고, 한 나라의 국민도 이카봇이 된다. 영광이 떠났다! 언젠가 아름다운 채소와 꽃들로 가득하던 정원이 잡초로 무성해진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이 바로 이카봇이다!
여섯째, 죽은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성경을 읽는 것을 기뻐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주님께 이겨오는 것을 즐거워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성경을 비평하는 학자들 때문에 성경에 대한 믿음 자체를 잃어버려서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 학자, 그 교수의 잘못이다. 안타깝지만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그런 일을 당한 그리스도인은 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이겨오는 일도 중단하기 마련이다. 당신도 혹시 이런 상태인가? 성경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의 기초를 떠나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한다(히 6:1).

길을 가려면 중도에 하차하지 말고 끝까지 가라! 유다는 중단했다. 데마도 포기했다. 그들은 믿음의 길을 지속하지 않았다. 당신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은가, 죽은 그리스도인으로 생을 끝내고 싶은가? 『그러나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단순히 듣기만 하는 자가 되어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약 1:22). 말씀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죽어 가기 십상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다시 영이 죽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에서 아무 쓸모도 없고 활동도 없으며 열매도 없는 죽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당신은 듣고 읽은 말씀을 실행해야 한다. 『잠자는 자여 깨어라. 그리고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 이 말씀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말씀임을 명심하라!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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