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교리 강좌 분류
“삼위일체”를 가르칠 자격이 없는 교회들
컨텐츠 정보
- 799 조회
- 목록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10월호>
“삼위일체”를 가르칠 자격이 없는 교회들박승용 / 성경침례교회 담임목사
우리나라 교회들 가운데 99% 이상은 “삼위일체”를 가르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삼위일체의 진리를 삭제한”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 등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변개된 성경들에는 삼위일체 교리가 보존된 본문, “요한일서 5:7”이 없는 것이다. 『이는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 분이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세 분은 하나이심이라.』 자신의 성경에 이 본문이 있는지 확인하고, 없다면 그 성경을 쓰는 교회에서 지금 당장 빠져 나와야 한다. 이는 성경이 “진리를 상실한 사람들”에게서 빠져 나오라고 명령하기 때문이다(딤전 6:5).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시고 한글을 통해 섭리로 보존하신 <한글킹제임스성경>은 삼위일체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간수하고 있다. 『[6절]이분은 물과 피로 오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니라. 증거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이시기 때문이라. [7절]이는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 분이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세 분은 하나이심이라. [8절]또 땅에서 증거하는 것도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요, 이 셋은 하나 안에서 일치하느니라』(요일 5:6-8). 6절에서 『물과 피로 오신 분』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경건의 신비”(Mystery of Godliness)이다! 『경건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 성령으로 의롭게 되셨으며, 천사들에게 보이셨고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셨으며, 세상에서 믿은 바 되셨고 영광 가운데로 들려 올라가셨음이라』(딤전 3:16).
또한 8절에서는 “땅에서 증거하는 셋”에 관해 언급하면서, 바로 그 “셋,” 곧 『성령과 물과 피』가 “하나” 안에서 일치한다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삼위일체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성령』(7,8절)은 하나님의 “영”에 해당하는 “성령 하나님”을, 『물』(8절)은 하나님의 “몸”에 해당하는 “아들 하나님,” 곧 『말씀』(7절)을, 『피』(8절)는 “하나님의 피”(행 20:28)로서 하나님의 “혼”에 해당하는 “『아버지』(7절)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 세 분께서 하나 안에, 곧 몸의 형태로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총체적인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드러내신 분으로서,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형상”(골 1:15)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변개된 개역성경은 “7절 말씀”을 삭제했으면서도 마치 그대로 간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6절 말씀의 “뒷부분”(“증거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을 떼어다가 7절을 새로 만들었다. 개역개정판 역시 똑같은 수작을 부렸는데, 다만 개역성경과 차별화하기 위해 6절이 아닌 8절 말씀의 “앞부분”(“증언하는 이가 셋이니”)을 가져다가 7절을 만들었다. 공동번역성서, 표준새번역, 쉬운성경 등도 이와 동일한 범죄를 자행했다. 이런 변개된 성경들을 통해 “사탄”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단 한 가지인데, “삼위일체”의 진리를 제거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격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일서 5:7”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딤후 3:16),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사도 요한”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벧후 1:21) 기록한 구절임이 분명하며, 특히 이런 사실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필사본들과 번역본들을 통해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아래 “열 가지 증거들”은 이송오 목사의 저서 <요한일서 5:7 삼위일체의 강력한 증거>, pp.21-23에서 발췌 편집한 내용임].
1. 시리아어와 라틴어로 각각 바르게 번역되어 보존된 성경들, <구시리아역본, A.D. 170>과 <구라틴역본, A.D. 200>은 이 본문을 고스란히 간수하고 있다.
2. 이 구절은 A.D. 200년경에 “타티안”(Tatian)이 쓴 글에서 발견되었고, “터툴리안”(Tertulian)도 이 본문을 인용했다.
3. A.D. 250년에는 “시프리안”(Cyprian)이 그 구절을 인용했고, A.D. 350년에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와 스페인의 감독 “프리실리안”(Priscillian)이 그 본문을 인용했다.
4. A.D. 415년에는 “카르타고 공회”에서 이 구절을 언급했고, A.D. 439-534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가 이 본문을 인용했다.
5. A.D. 450년에는 “제롬”(Jerome)이 “유스토키움”(Eustochium)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본문을 인용했는데, 당시 그는 “왜 어떤 사본들에서는 그 구절이 삭제되어 있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고 한다.
6. A.D. 510년에는 “풀겐티우스”(Fulgentius)가 이 구절을 인용했다.
7. 5-6세기의 <구라틴역본> 필사본 “r”에서 발견되고, A.D. 750년의 “코덱스 비안부르겐시스”에서도 발견된다.
7. A.D. 1150년의 “소문자 필사본 88,” 14세기의 “소문자 필사본 629,” A.D. 1519년의 “소문자 필사본 61”이 그 본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9. A.D. 1522년의 “에라스무스”(Erasmus)의 “헬라어 성경 제3판”은 이 구절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10. A.D. 400-600년, 1200,1300,1400년대의 “왈덴시안 성경들”에서도 이 본문은 고스란히 간수되어 있다.
이상 확실한 증거들에 따르면, “삼위일체의 교리”를 부인하는 자들은 “이단들”이고, “삼위일체의 진리”를 상실한(삭제한) 성경들은 “가짜 성경들”이며, 이런 “이단적인 가짜 성경들”을 사용하는 교회들은 삼위일체를 가르칠 자격조차 없는 “거짓 교회들”이다.
콘스탄틴 황제는 A.D.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로마 제국 내의 교회들을 자신의 권위와 통제 아래 두기 위해 가증스러운 “에큐메니컬 모임”을 개최했는데, 그것이 바로 A.D.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 공회”이다. 이 공회에서 가장 쟁점이 되었던 사안은 “삼위일체 교리”였다. 특히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하는 “아타나시우스” (Athanasius)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우스”(Arius)가 맞붙었는데, 이 논쟁은 아타나시우스의 승리로 끝났고, 아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되어 로마 제국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주장했던 아타나시우스 역시 그 교리에 대해 성경적으로 올바르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된 논쟁은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노라.』(시 2:7)라는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서 시작되었는데, 여기에서 『오늘』이 가리키는 시점, 곧 “아들을 낳은 바로 그 ‘오늘’이 언제인가” 하는 것이 최대 쟁점이었던 것이다.
앞선 니케아 공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아리우스”는 『내가 너를 낳았노라.』(시 2:7)라는 말씀, 곧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 하나님을 낳았다고 하는 이 본문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창 1:1) 이전 어느 시점에서인가 성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성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 “로고스”(λόγος)를 통해 만드셨다고 주장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그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느니라. 만물은 그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며, 이미 지음받은 것 가운데 그가 없이 지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요 1:1-3). 이 본문에 나오는 『말씀』이 바로 “로고스”인데, 그것은 “성육신하신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다시 말해 아리우스의 주장의 논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은 맞지만 그분의 본질은 성부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신”이라는 것이며, 또 성부 하나님은 시간에 제한받지 않는 영원한 분이신 반면 성자 하나님은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과 그들의 “신세계역본” 역시 이와 동일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이 “이단 교리”라는 점은 다음 구절에서 분명해진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프라타야, 네가 비록 유다의 수천 가운데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통치할 자가 너로부터 내게로 나오리라. 그의 나오심은 예로부터요, 영원부터였느니라』(미 5:2).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분”이시다. “영원한 분”이실 뿐만 아니라, “영원하신 아버지”로도 불리신다. 『이는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음이니, 정부가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경이로운 분이라, 상담자라, 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원하신 아버지라, 화평의 통치자라 불리리라』(사 9:6).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 “아들”이 “아버지”이고 “아버지”가 “아들”이라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부분을 절대로 설명할 수 없다. 어떻게 “아들”이신 분께서 “아버지”라는 이름을 취하실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삼위일체”의 신비로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나타나심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는데, 성경은 이러한 “성육신의 신비,” 곧 “경건의 신비”(딤전 3:16)를 가리켜 “아버지의 신비”(골 2:2)라고 말씀한다.
한편 니케아 공회의 삼위일체 논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소위 “정통”이 된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조 이전에 ‘피조된 것’이 아니고 ‘태어난 것’이다!” 이건 또 무슨 “해괴한 교리”란 말인가? 사실상 당시 공회에서 “정통”으로 인정된 아타나시우스나, “이단”으로 정죄된 아리우스나, 두 사람 모두 똑같은 주장을 했던 것이다. 창조 이전에 “피조된 신”이든지, 창조 이전에 “태어난 신”이든지, 결국 두 주장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의 속성,” 곧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 이전 영원 시대 어느 시점에서인가 태어나셨기 때문에, “오늘”이란 말은 만물이 창조된 이래로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해 온 그 “어떤 날”과도 관계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견해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카톨릭”의 공식 교리이며, 종교개혁자 “존 칼빈” 역시 이 가증한 누룩에 오염되었다.
그런가 하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노라.』(시 2:7)라는 말씀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적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에델버트 벌링거, 찰스 베이커, J.C. 오헤어, E.C. 무어 등)이다. 그래서 이들은 “새로운 탄생”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약속된 “민족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 시대에는 “입양,” “살리심,” “구원” 등은 있을지 몰라도 “새로운 탄생”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에 의하지 않고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 중생[regeneration]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re- newing]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딛 3:5)라는 말씀 앞에서 입도 뻥긋 못하게 된다. 물론 “이스라엘”이 “아들”로 불리기는 한다(출 4:22).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족적인 아들”로서 그렇게 불리는 것이지 시편 2:7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그 『아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시 2:2)로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거룩한 시온 위에 세우신 『왕』(시 2:6)이시며, 지상의 모든 왕들과 재판관들이 두려움으로 섬기고 떨림으로 즐거워하는 가운데(시 2:10,11) 입을 맞추고 경배해야 할 바로 그 『아들』(시 2:12)이시기 때문이다. 결단코 “민족적인 아들”이 아닌 것이다!
또한 미국의 배교한 근본주의자들은 『오늘 내가 너를 낳았노라.』(시 2:7)라는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적용하는데, 이는 그 본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언급하는 문맥에서 인용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상식 이하의 주장인데, “낳았노라”를 가리켜 “부활”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주장대로 시편 2:7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언급하는 문맥에서 인용된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들의 자녀인 우리에게 어떻게 동일하게 이루셨는가를 선포하노라. 시편 둘째 편에도 기록되었듯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노라.’ 하셨고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사 다시는 썩어질 것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실 것에 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윗의 확실한 자비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행 13:33,34). 그런데 이것은 “낳았노라”가 “부활”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보다는, 오히려 “동정녀 탄생을 해야 부활할 수 있고, 부활하려면 동정녀 탄생을 해야 한다는 진리”를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노라.』(시 2:7)라는 말씀이 가리키는 사건은 다름 아닌 “동정녀 탄생”이기 때문이다.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오늘”은 창조 이전 영원 시대가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신 “초림 때”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 하나님을 낳으신 사건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성육신하신 사건” 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 천사가 대답하여 그녀에게 말하기를 “성령께서 너에게 임하실 것이며, 가장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덮으리니, 그러므로 너에게서 탄생하실 그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리라』(눅 1:35).
삼위일체에 관한 어리석은 논쟁의 시발점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는 그가 A.D. 230년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세기 1:1 이전 영원 시대 어느 때인가 태어나셨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아타나시우스”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아타나시우스 신조 31조”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성부의 본질을 지니시고 창세전에 낳음을 입은 하나님이시다.」 이런 가증한 이단 교리는 변개된 성경들에서도 확인되는데, 대표적인 구절이 “요한복음 1:18”이다. 『아무도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only begotten Son], 그가 하나님을 분명히 밝히셨느니라.』 이 구절에 나오는 『독생자』가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에는 “독생하신 하나님”(only be- gotten God)으로 변개되어 있다. “독생하신 하나님”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높여 주는 표현 같지만, 사실 이것은 앞서 지적한 대로 “태어나신 하나님”을 말함으로써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하나님”(아리우스와 여호와의 증인들) 혹은 “태어나게 된 하나님”(로마카톨릭과 존 칼빈)과 동등한 의미가 된다.
이렇듯 변개된 성경들은 “한 분 하나님”이 아니라 “두 하나님”을 만드는 이단 교리를 양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인격이 육신으로 나타나신 분”으로서, 결코 또 하나의 “다른 신”이 아니시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들이라고 불리는 (많은 신들과 많은 주들이 있어도) 우리에게는 오직 한 분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분께로부터 났고 우리도 그분 안에 있으며 또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있고 우리도 그분을 통하여 있느니라』(고전 8:5,6). 『너희가 너희를 부르시는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한 몸과 한 분 성령이 계시니 한 분 주요, 한 믿음이며, 한 침례이고 한 분 하나님, 곧 모든 것의 아버지시니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며 모든 것을 통하여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엡 4:4-6). 성경은 분명 『한 분 하나님, 아버지』와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한 분 성령』을 말씀하고 있지, 그 어디에도 “두 분 하나님”이나 “두 분 주” 또는 “두 분 성령”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사실이 이러한데 언제까지 사탄이 변개한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을 붙들며 “이단 교리”를 고집하려는가? 이제는 그만 그곳에서 떠날 때도 되지 않았는가?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열을 일으키고 공박하는 자들을 주의하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