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주석 분류
길 잃은 양을 찾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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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12월호>
마태복음 18장의 맥락은 전체적으로 산상설교와 비슷하다. 이 두 부분은 환란기간과 천년왕국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확증하시기 위해 17장에서 재림의 모습을 보여 주신 이후로 18장부터 “천국”이라는 용어와 더불어 천국에 관한 가르침을 더 구체적으로 하시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18장 이후의 장들에서 천국이 임하기 전의 모습과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조건과 천국이 임하는 상황과 천국 내에서 어떤 일이 펼쳐질지를 보게 된다. 우리는 이미 18:1-10에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
18:11-14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는 것이라.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면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산으로 가서 그 길 잃은 양을 찾지 아니하겠느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가 그 양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보다 그 양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런 어린 아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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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양, 즉 세상의 방황하는 모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은 신약 시대를 향한 분명한 진리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6장에 나온 그분의 중요한 사역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니, 즉 그분께서 내게 주신 모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 또 이것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니,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라. 그리고 내가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39-40). 우리는 모두 방황하는 양들이었으며, 목자 되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목숨을 버리시고 양의 문으로 인도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양이며(행 20:28, 벧전 5:2),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목자이시다(벧전 2:25; 5:4). 이것은 틀림없는 진리이다.
그러나 여기 또 하나의 양무리가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9:36에서 불쌍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자 없는 양으로 보셨다. 이 사실, 즉 이스라엘이 양이라는 사실은 구약에서 더 명확하게 제시된다(렘 13:17,20; 23:1-3; 50:6,17, 슼 9:16; 10:2; 11:17; 13:7).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의 양이다. 그들이 하나님 안에 있을 때는 우리 가운데 평안히 있는 양이며, 그들이 하나님 밖에 있을 때는 잃어버린 양이다. 마찬가지로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은 항상 목자로 묘사된다(렘 23:2). 그리고 그 목자가 옳게 인도하면 좋은 목자요, 잘못 인도하면 나쁜 목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초림 당시에 이스라엘이라는 양무리를 인도하는 목자들, 즉 바리새인, 서기관 등의 종교지도자들이 백성을 그릇되이 인도하기에 그들을 가리켜 “삯꾼”(요 10:12) 또는 “이리”(마 7:15)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러한 상황을 “목자가 없어 흩어진 상태”(마 9:36, 렘 50:17)로 보셨다.
특별히 이스라엘은 “잃어버린 양”이라고 불린다(렘 50:6). 그리스도인이 양이라고 불리는 것은 분명히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다. 이방인에 대해 “잃어버렸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는 아직 양이 아니다. 양무리에 들어온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서는 “잃어버린 양”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잃어버린 영혼”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다르다. 이스라엘은 잃어버린 상태에서도 역시 “양”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흩어진 그들을 모으시겠다고 구약에서 여러 번 말씀하셨다(렘 23:3, 슥 9:16).
“잃어버린 양”이라는 표현은 마태복음 10장에서도 발견되는데, 거기서도 그 말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사용되고 있다. 『이방인들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인의 성읍에도 들어가지 말고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
그러므로 마태복음 18:12의 “길 잃은 양”은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11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잃어 버린 자를 구원하려는 것이라』는 명제 자체는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말로, 교회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말로 부족함이 없으나, 마태복음의 전체적인 흐름으로 볼 때, 12절의 “잃은 양”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마태복음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 첫째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그분의 백성이었기 때문이다(마 1:21). 교회가 구원받는 것은 그 다음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초림 때에 그분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면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엄청난 축복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이방인들은 단지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을 통해 얻는 축복만을 누려야 했을 것이다.
“자기 백성”(마 1:21)을 구원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기본적인 목적이었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는 것이 예수님의 우선적인 사역이었다(마 10:6).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이방의 개들에게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까지 말씀하신다(마 15:24). 마태복음 15장의 카나안 여인의 딸이 치유된 사건은 교회가 계시되기 이전에 이방인들이 받을 은혜에 대해서 보여 준다. 『주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자녀들의 빵을 가져다가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이 옳지 않도다.”라고 하시니 그 여인이 말하기를 “그러하옵니다, 주여, 그러나 개들도 그들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니』(마 15:26-27). 즉, 이방인에게 주어진 은혜는 “부스러기 은혜”였다.
사도행전 3:25-26에서 베드로도 이 사실을 강조했다. 『너희는 그 선지자들의 자손이며 또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 고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일으키사 너희를 복 주시려고 먼저 너희에게 보내어 각각 자기의 악한 행실로부터 돌아서게 하셨느니라』(행 3:25-26). 베드로는 여기서 “먼저 너희에게”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너희”는 두말할 나위 없이 유대인이다.
말했듯이 이 비유를 영적으로 해석해서 그리스도인에게 교훈적인 설교를 할 수 있고, 복음을 전할 때에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직접적으로 유대인에게 적용된다는 것과 교회시대에 완전히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볼 때, 이 구절 역시 환란 때에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과 연관시킬 수 있다. 이들은 믿음과 동시에 행위가 있어야 하는데, 이들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태이다. 이때 예수님은 이들을 찾아다니며 도와 주신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 이것은 환란시대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래서 본문은 잃어버린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여 천국, 즉 천년왕국으로 들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양이라고 불리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경우에서만 가능하다. 첫째, 요한복음 10장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사용될 때(요 10:16). 둘째, 마태복음 25장에서 행위로 구원받은, 양에 속한 민족(마 25:31-46). 그러나 두 경우에 있어서 이방인들은 “구원받은” 사람들만 양들로 취급당한다. 잃어버린 자들은 결코 양이 아니다. 잃어버린 자들에게 양이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오직 유대인뿐이다.]
『이와 같이 이런 어린 아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4절).
이것은 마태복음 18:1-10의 설명에 대한 연장인데,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이 어린 아이 하나를 대접하는 것과 같은 관점에서 설명되고 있다. 본문과 연결되어 마태복음 25:45은 『왕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이들 중에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또한 마태복음 10:40-42과도 같은 맥락인데, 그 상황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행위가 필요한 상황이다(교리적으로 교회시대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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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18 『또 네 형제가 네게 죄를 짓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만 있을 때 그에게 그의 잘못을 일러주라. 만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너는 네 형제를 얻은 것이라. 그러나 만일 그가 네 말을 듣지 아니하면 너 외에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말을 입증하게 하라. 그래도 그가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교회에다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이교도나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요, 또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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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형제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것은 “용서”라는 측면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개인적인 책망 이후에 교회적인 책망이 있게 된다. 우리는 바울 사도가 이단들을 다루는 곳인 디도서 3:10,11에서 이와 비슷한 말씀을 볼 수 있는데, 그래서 이 구절은 교회시대에 적용이 가능하고, 여기에서의 교회는 지역교회로 볼 수 있다. 『이단 종파에 속한 사람은 한두 번 타이른 뒤에 거절하라. 네가 알거니와 그러한 자는 타락하고 죄를 지어 스스로 정죄받는 자이니라』(딛 3:10,11). 그래서 이 원리는 신약 지역교회의 징계의 원칙이기도 하다. 이와 비슷하게 교회의 징계를 다루는 부분으로서는 고린도전서 5장과 고린도후서 11장을 들 수 있다. 특별히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잘못된 자들을 쫓아내라고 말하고 있다. 『밖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나니 그러한 악한 사람은 너희 가운데서 쫓아내라』(고전 5:13).
그런데 성경에서 용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고려되고 있다. 먼저 개인적인 잘못에 대한 용서는 무조건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심지어 세리들도 자기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행한다(마 5:46, 눅 6:32-36). 바울도 이것에 대해서 로마서 12:17-20에서 강조하여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만일 그가 목마르거든 마실 것을 주라. 이렇게 함으로써 네가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을 것이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하고 있다(롬 12:20,21).
왕국의 법령을 다루는 산상설교에서도 용서는 매우 강조되고 있다. 구약의 율법보다 더 엄격한 왕국의 규례를 지켜야 하는 왕국백성들은 자기 죄에 대해서는 눈을 빼고 손을 자를 만큼 엄격해야 하나(마 5:29-30),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에 관하여는 매우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천대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이렇게 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는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태양을 악인과 선인 위에 떠오르게 하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비를 내리심이라. 만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으리요? 세리들도 그같이 아니하느냐?』(마 5:45-46) 이처럼 완벽한 의를 주제로 하는 산상설교의 내용은 마태복음 18:22 이하에서 반복하여 설명된다.
그러나 교회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좀 다르다. 이때에는 무조건적으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잘못을 시인하고 돌이키는 것에 기초해서 용서해야 한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바로 교회적인 문제이다. 한 사람이 잘못했을 때 먼저 한두 명이 가서
그의 잘못을 지적하여 돌이키게 한다. 그러나 그가 그들의 책망에도 돌이키지 않고 교회의 책망에도 돌이키지 않으면 그는 교회에서 추방당하기까지 한다(고전 5, 고후 11).
여기에서 교회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17절이 18절과 연결되는 문맥임을 주목하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요, 또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어지리라』(18절). 이 말씀은 16:19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과 유사한데, 16장에서는 베드로가 이러한 권세를 가졌지만 여기서는 사도들이 이러한 권세를 받는다. 그리고 17절과의 연결된 문맥으로 볼 때, 17절의 “교회”는 18절의 “너희”, 즉 사도들임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교회”라는 말은 반드시 신약 지역교회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교회란 불러냄을 받은 “모임”인데,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의 “교회”(행 7:38)라고 불렸다. 바울서신에서 “교회”는 대부분 “지역교회”를 의미하지만 그 중에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즉 보이지 않는 특별한 집단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심지어 사도행전 19:37에서는 이교도의 신전도 “교회”라는 명칭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말 자체가 모두 신약교회는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교회는 “집단”이라는 의미의 사도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러한 권세는 사도들에게 위임되었다. 즉 어떤 문제에 있어서 한 형제의 잘못을 징계할 때, 개인적으로 그를 꾸짖어도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사도들)가 꾸짖게 되는데, 그때 그가 말을 들으면 사도들이 그를 용서하고, 그가 말을 듣지 않으면 그들은 그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결정에 따라서 하늘에서도 결정이 내려진다. [마태복음 16:19만 인용하여 사도 베드로에게 이 권세가 주어졌고, 그 권세가 카톨릭 교회에게 계승되었으므로, 교황은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있다고 말하는 로마의 해석은 전적으로 틀리다.] 예수님께서는 왕국복음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권세를 주셨다고 이해되는데, 주님은 마태복음 19:28에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를 따르는 너희들은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새 세대에,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말씀을 하시어 제자들에게 대단한 권세를 부여하신다. 그들이 묶고 푸는 권세는 그들이 심판의 자리에 앉을 권세만큼 큰 것이다.
그러나 “교회”라는 말이 여기에 사용되어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마태복음이 비록 왕국복음을 다루고 있을지라도, 신약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책은 마태복음이다. 그것은 그들이 교회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인데(엡 2:20),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본문이 지역교회의 징계에 관한 교리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맨 처음 교회는 유대인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행 2장). 바울이 에베소서 3:6에서 교회를 유대인과 이방인의 연합체라고 말한 것은 그 다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