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주석 분류
생명의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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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5년 05월호>
마태복음 14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연민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천국이 거부당해 연기되는 것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양떼들인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신다. 아직까지 예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지만 최후의 선지자 침례인 요한마저 죽고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한다. 왕국이 거부당한 이후 유대인들이 환란에 들어가도 그들은 여전히 방황하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먹이실 것이다.1. 침례인 요한의 죽음
14:1,2 『그때에 영주 헤롯이 예수의 명성을 듣고 그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침례인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났으므로 그의 안에서 능력 있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더라.』
마태복음은 침례인 요한에 대해서 세 장을 할애한다. 3장에서 침례인 요한의 사역, 11장에 모든 선지서와 율법의 마지막, 그리고 14장에서 침례인 요한의 죽음이 그것이다.
침례인 요한은 11장에서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는 14장 이전에 죽었으며, 여기서는 헤롯이 침례인 요한의 부활에 대해서 놀라고 있다. 그리고 과거의 일로서 침례인 요한의 죽음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2절의 『능력 있는 역사』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10장에서 천국복음을 위임받은 제자들에 의해서도 일어났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헤롯의 반응인데, 그의 반응은 그가 현대의 성경학자들보다도 성경을 더 많이 알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
『그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났으므로』(2절)
헤롯은 엘리야가 “주의 날” 이전에 부활하여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것은 성경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나는 반응인데, 요한복음 1:21에서는 제사장들이 침례인 요한에게 그가 엘리야냐고 물었고, 마태복음 16:14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엘리야라고 말했었다. 특히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예레미야”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예레미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었다. 이들은 모두 “주의 날”, “재림”, “대환란”과 관계있는 사람들이다.
14:3 『헤롯이 그의 아우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 때문에 요한을 붙잡아 결박하여 감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였음이라. 그리하여 그가 요한을 죽이려 했으나 무리를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겼음이라. 그러나 헤롯의 생일이 되었을 때에, 헤로디아의 딸이 그들 앞에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한지라.』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하는 것이 부당하다.”』(4절)는 말은 레위기 18:16에 근거한 말이다. 『너는 네 형제의 아내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지 말라. 그것은 네 형제의 벌거벗음이니라.』
헤롯의 두려움은 마태복음 21:26에 제시된 바리새인들의 두려움과 유사했다. 그들은 군중들을 두려워했다. 헤롯은 요한의 사역과 가르침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며 그를 보호하였고, 그의 말을 듣고 많은 일을 하였다. 누가복음 23:8에서는 요한에게 기대했던 것 같은 표적과 이적을 예수님에게서 기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요한을 죽였다. 이는 그의 두려움이 사람들에 대한 것임을 나타낸다.
그는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두려워했다(마 10:28).
① 그는 그의 양심을 두려워했다(14:2).
② 그는 요한을 두려워했다(4절)
③ 그는 군중을 두려워했다(5절)
④ 그는 사람들이 비웃을 것을 두려워했다(9절)
⑤ 그는 자기가 한 약속을 깨는 것을 두려워했다(9절)
그는 두려워해서는 안될 모든 것을 두려워하였고,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것은 비단 헤롯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모든 죄인들의 태도와 동기이며, 그들의 종교성이다.
요한이 목베임을 당한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요한은 엘리야의 유형인데(눅 1, 마 17, 요 1), 엘리야의 유형으로서 그는 목베임을 당해서 죽어야 한다. 계시록에서 엘리야도 같은 방법으로 죽게 된다(계 11:3-10).
헤롯은(헤롯 안티파스) 빌립의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서 자기 아내(아레타스의 딸)와 이혼했다. 헤로디아는 빌립의 질녀였다(요세푸스 Ant. XVIII, V. 2). “헤로디아의 딸”은 말 그대로 헤로디아의 딸이다. 웨스트코트와 홀트를 따른 굳스피드(Good- speed) 역본에는 “헤롯의 딸”이라고 되어 있다. 아무리 로마의 왕이라고 할지라도 자기의 딸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춤을 추게 할 것인가? 이 춤은 정확하게 제시되지는 않지만 아라비아의 춤처럼 현란한 춤이었을 것이다.
14:13,14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배로 그 곳을 떠나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시니, 백성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 고을에서 걸어서 그를 따라가더라. 예수께서 나오셔서 큰 무리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시어 그들의 병을 고쳐주시니라.』
13절 이하의 부분은 마가복음 6장, 누가복음 9장, 요한복음 6장에서도 제시된다. 이 부분은 사복음서에서 눈에 띠는 장면으로서 군중들을 먹이시는 기적이 나타나는 부분이다. 장소는 갈릴리 북쪽 해안이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가엽게 여기셨다. 가엽게 여기신 것은 9:36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목자 없는 양무리 같은 이스라엘의 상태를 보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종교지도자들은 메시야를 거부하였고, 천국은 그들에게서 멀어져갔다. 얼마 후면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여 죽으시게 된다. 왕과 왕국이 없는 상태,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교사들 외엔 지도자들이 없는 상태, 그 상태의 백성들을 바라보시며 주님은 가슴 깊이 연민을 느끼신다.
2.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14:15-17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그에게 와서 말씀드리기를 “이 곳은 외딴 곳이고 시간도 지났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로 들어가 각자 양식을 사 먹게 하소서.”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갈 필요가 없느니라.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더라. 제자들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라고 하니』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복음서에서 모두 강조하는 사건이다. 이 때의 상황을 사복음서를 맞춰보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데, 먼저 그들은 외딴 곳(desert place)에 있었다. 그리고 “시간도 지났다”(15절). 마가복음 6: 35에서는 “때도 저물었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는 저녁먹을 때가 지났다는 의미로, 그들이 음식을 먹을 만큼의 빛이 있었다는 것으로 볼 때 아마 5시나 7시 사이였을 것이다.
여기서 외딴 곳은 일종의 광야로서 풀밭으로 구성된 곳이었다.
제자들은 이 표적 앞에서 믿음없는 대답을 하였다(막 6:37, 요 6:7-9). 예수님은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이 사람들이 먹을 빵을 사겠느냐?”고 시험하시면서 자신이 하실 일을 암시하셨으나, 빌립과 안드레는 보리빵 다섯 덩어리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는 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안된다고 대답했다(요 6:5-9). 이에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50명씩 혹은 100명씩 무리지어 앉히신 후(막6:39,40), 음식을 축복하시고 빵을 떼어 주셨다(마14:19).
이 사건은 요한복음에서 매우 커다란 영적 의미를 제시한다. 사복음서 중 세 개의 공관복음이 사건 자체를 기술한다면 요한복음은 그 사건의 영적 의미를 기록하는데, 이 사건이 바로 그렇다. 요한복음 6:31-35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리빵 다섯 덩어리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사람들을 먹이신 이적을 베푸신 후에 “생명의 빵”에 대한 위대한 가르침을 주신다. 『내가 생명의 빵이니라.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며, 또 나를 믿는 자는 어느 때나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예수님은 생명의 빵이시다. 이것은 신약교리로서 우리가 구원받는데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즉,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위대한 가르침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도 소유한다(요일 5:11,12).
그러나 로마 카톨릭은 예수님이 빵이시라는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잘못 이해한다. 그들은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이것은 나의 몸이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더불어 이 빵이 예수님의 “실제적인 몸”이라고 해석하여, 미사때마다 “실제적인 예수님의 살과 피”를 “성체”를 통하여 먹고 마실수 있다고 한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은유적으로 해석하면서도 이 부분에서만은 “문자적”으로 잘못 해석한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살며 나도 그 사람 안에 사느니라』(요 6:56)는 말씀은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는 말씀이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6:63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제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이라는 이 말씀은 영적인 진리로 이해해야 한다. 즉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는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의 말씀을 먹는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마태복음에 와 있다. 우리는 마태복음을 교리적으로 공부하는데에 있어서 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떠한 교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는 책이며, 마태복음의 메시지들은 직접적으로 유대인과 관계된다.
이 사건은 예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환란기간 중에 광야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으로 부양받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환란 중에 광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계시록 12장에 나타난다. 출애굽 사건이 환란을 통과하여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는 모형이라는 것을 우리는 마태복음 2장에서 배웠다(히 3,4장). 이스라엘이 출애굽 당시에 광야에서 “하늘의 양식”으로(느 9:15, 시 78:24; 105:40) 부양받았듯이 환란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부양하실 것이다. 그들의 조상들중 많은 사람들은 완악하여 떨어져나갔다.
이스라엘도 환란 중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떨어져나갈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남은 자”들로 안식의 땅(천년왕국)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11,12장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거부당하시는 것을 보았다. 13장에서 천국은 신비의 형태로 유대인들에게서 감추어진다는 것을 보았다. 이제 그들은 “외딴 곳”(광야)에 와 있다. 그래서 이것은 환란 중에 하늘의 양식을 받을 유대인들에 대한 묘사이다.
그래서 광야의 돌로 빵이 되게 하라고 한 사탄의 첫 시험은 의미가 깊다. 그는 예수께서 재림 때 하실 일을 초림 때에 성취하라고 예수님을 시험한 것이다(마태복음 연구 제 4장 참조).
14:22-25 『그리고 나서 곧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 주께서는 무리를 흩어 보내시더라. 무리를 보내신 후 주께서는 기도하러 따로 떨어져 있는 산으로 올라가셨는데 저물었을 때에 거기에 홀로 계시더라. 한편, 그 배는 이제 바다 한가운데 있었는데 바람이 거슬러 불므로 파도에 시달리고 있더라. 밤 제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다가오시니』
예수님께서 5000명을 먹이신 장소는 갈릴리의 북동쪽 지역이고, “건너편”은 카퍼나움이다(요 6:17).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일시적으로 흩으셨으나, 그들은 다음날 더 많은 빵을 얻으려고 이 곳까지 예수님을 따라 왔다(마 14:35, 요 6:22).
이 구절은 몇가지 적용이 가능하다.
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높은 곳”에서 그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
② 성도들이 있는 현세대는 “밤중”이다(요 9:4,5, 사 11:20, 마 13:43, 막13:34,35, 살전 5:1-10)
③ “바람”은 성도들을 대항하여 분다(전 11:4, 엡 4:14).
④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분은 새벽녁인 밤 제 사경에 오신다(말 4장, 출 32장, 마 13장, 벧후 3:8).
여기에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큰 “깊음”이라고 표현되는 “바다”에 관한 지식이다. 예수께서는 셋째 하늘 아래 있는 거대한 “유리 바다”를 통과하여 재림하실 것이다(창세기 1:1-4에 관한 주석 참조). 예수께서 기도하러 가셨다가 밤중에 바람이 부는 바다를 걸어 오시는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하나의 모형이 된다.
14:26-29 『제자들이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그를 보고 불안하여 말하기를 “유령이다!”라고 하며 무서워 소리지르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곧 일러 말씀하시기를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니라. 그러자 베드로가 주께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에게 명하여 물 위로 주께 오라 하소서.”라고 하니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그에게 가려고 물 위로 걸어가더라.』
배에 있던 제자들 중 가장 믿음이 좋은(적어도 이 사건에서는) 베드로도 “만일 주님이시거든”이라고 의심을 품었다. 이에 앞서 이들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유령이다.”라고 하며 무서워했다.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보았을 때도 무서워하여 어떤 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눅 24:37). 이들은 실제로 걸어오신 예수님,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보고 어떤 희미한 영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14:30-31 『그러나 바람이 사나워지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니 가라앉기 시작하는지라 그가 소리질러 말하기를 “주여, 나를 구해 주소서.”라고 하더라.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드시고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오 믿음이 적은 자야, 어찌하여 의심하였느냐?”고 하시니라.』
베드로의 의심은 바람이 사나워질 때 그의 믿음을 꺾었다. 그는 바다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 때 베드로의 간구는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준다.
베드로의 간구는 아주 짧은 것이었다. 『“주여, 나를 구해 주소서”』(30절). 예수께서는 이 기도에 “즉시로” 응답해 주셨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많은 기도를 드린다. 그 많은 기도 중에서 어떤 것은 거절되기도 하며, 어떤 것은 한참 후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구원”에 관한 기도만은 예외없이 “즉시로” 이루어진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제단에서 몇 시간 동안 고민할 필요가 없다. 미사용 기도서에서 적절한 기도문을 찾을 필요도 없다. 주기도문
이나 사도신경을 외우느라 시간낭비 할 필요도 없다. 베드로가 한 유일한 기도는 “주여, 나를 구해 주소서.”였다. 만약 당신이 구원을 받기 원한다면 지금 주님께 간구하라.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이 기도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지체없이 응답하여 주실 것이다. 이 시대에는 주님께 가기만 하면 누구나 구원받는다.
14:32 『둘이서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치더라.』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그쳤다. 영적으로 이것은 주님을 맞아들일 때 평안함이 온다는 것에 적용할 수 있겠다(엡 2:13,14). 그런데 8장에는 예수님께서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셨을 때에도 주님께서 명령하실 때까지 파도가 일었던 사건이 있다(8:24-26).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유형으로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주님께서는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꾸짖으셨다.
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와서 주께 경배하며 말씀드리기를 “참으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더라.』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가 마태복음에서 네번째 등장한다. 그런데 첫 두번은 사탄이 시험하는 과정에서 말한 것이고(마 4:3,6), 세번째는 마귀에게 사로잡힌 두 남자에 의해서 불려졌고(마 8:29), 정상적으로 제자들의 입에서 이 말이 불리워지기는 여기에서 처음이다.
예수님은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딤전 3:16). 마귀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이심을 의심하게 만들고, 성경변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도록 구절을 삭제하지만(행 8:37), 그 분은 여전히 베드로의 고백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마 16:16).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