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마태복음 주석 분류

선포된 “왕국의 법령”- 산상설교의 성경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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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4년 07월호>

왕국을 전파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초기 사역은 여기에서 커다란 한 획을 긋는다. 산상설교라고 알려져 있는 마태복음 5-7장의 내용은 많은 사람, 심지어 비기독교인들에게까지 위대한 교훈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이 설교에 있는 내용 중 많은 구절들이 암송되고 있으며, 5:3-10의 “팔복”이나 6:9 -13의 소위 “주기도문”, 또 7:12의 소위 “황금률” 등은 제도적인 기독교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공부했던 대로 마태복음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리고 있다는 것과, 마태복음 4장에서 예언된 왕국이 현실로 자리잡는다는 것을 기억해 본다면, 5장에서 7장에 이르는 이 설교 역시 왕국의 관점으로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5:1 『주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오더라.』

예수님은 여기서 산에 앉으셨다. 재림 때 예수님은 다윗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다윗의 보좌에 앉지 않으셨지만 무리를 보시고 그들에게 뭔가를 가르치기 위해 ‘앉으신다.’
이 사건을 좀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4장으로 돌아가보자. 4:17에서 예수께서는 “천국”을 전파하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은 계속적으로 “왕국복음”을 전파하시면서(23절) 왕국의 표적을 보이셨다. 그것은 백성들의 질병과 허약함을 고친 것이며,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 정신병자, 중풍병자들을 고쳐주신 것이다(23,24절). 왕국표적은 이스라엘에게 메시야와 그의 왕국이 가까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자 갈릴리와 데카폴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으로부터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다(25절). 이 지역은 사마리아를 제외한 팔레스타인 전지역이다. 자, 왕이 나타났고 왕국이 선포됐다. 그리고 그 왕 앞에 백성들이 모여들었으며, 그들이 모여든 지역은 왕국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법령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이때 예수님은 모여든 무리를 보시고 산에 앉으셨는데, 그가 말씀하신 것은 보통 설교자와는 달랐다. 그는 권위있게 말씀하셨다(7:29). 이때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바로 “왕국의 법령”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산상설교를 대하기 전에 먼저 몇가지 사실들을 고찰해보자.
1. 산상설교가 행해지는 이 때에는 그리스도인이 한 명도 없었다. 그리스도인은 사도행전 11장에서 등장한다(11:26).
2. 이 때에는 단 하나의 지역교회도 없었다. 교회는 마태복음 16장에서 등장한다.
3. 이 때에는 열두 사도조차도 선임되지 않았다. 그들은 마태복음 10장에서 선임된다.
4. 이 때는 십자가 사건 이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에 대한 지식이나 거듭남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5. 산상설교는 왕국이 전파되는 연속선상에 있는 사건이며, 산상설교가 끝난 이후인 8-9장에서도 계속적으로 왕국복음에 따른 표적이 나타난다.


6. 그러므로 이 설교의 청중들은 십자가 사건 이전에 위치한 유대인들이며, 이 설교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구분이 뚜렷이 나타난다.

우리는 이 본문을 영적으로, 교훈적으로 교회시대에다 적용시키기 이전에 먼저 교리적으로 정확한 위치에 놓아야 한다. 교리적으로 정확하게 적용시킬 때, 이 본문은 메시야 왕국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결코 교리적으로 교회에 적용되지 않는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산 몸이지만, 여기에 모인 청중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백성”일 뿐이다. 이 왕국이 “땅에 속한”, “유대인의” 왕국임을 기억해보자.
왕국 때 유대인에게 적용되는 본문들은 은혜시대에 교회에 적용되는 본문과 많은 부분에서 상충된다. 그래서 성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성경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무턱대고 성경을 믿으려고만 하는 사람은 이러한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 자기에게 적용되기 어려운 부분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이건 이러이러한 의미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몇가지 살펴보자. 마태복음 5:22에서 『어리석은 자라 하는 자는 누구나 지옥불의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데, 고린도전서 15:36에서 바울은 『너 어리석은 자야』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바울은 지옥에 가게 되는가? 또 마태복음 5:29,30에 따라 서 오른 쪽 눈과 오른 손이 범죄한다고 눈과 손을 잘라 버리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 성경은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하기에 이 계명도 문자 그대로 지켜져야 한다. 또 마태복음 7:1에서는 『판단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나, 고린도전서 2:15에는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되어있다. 마태복음 5:18-20에서는 율법의 계명을 지켜야만 한다고 말하나 로마서 3:21에는 『율법 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각 구절들은 모두 문자적으로 정확히 지켜져야 할 구절들인데 말이다.
자, 우리는 마태복음이 유대인에게 제시되는 복음이라는 것을 이미 공부했고, 이제 다루려고 하는 산상설교가 왕국의 법령임을 앞에서 보았다.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위에서 제시한 성경의 “차이”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들이 세대주의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인데, 산상설교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이 문제를 굳이 강조하는 것은 많은 성경교사들과 설교자들이 산상설교를 그리스도인에게 “교훈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넘어서서 “교리적”인 적용까지 하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5:3-10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 구절은 우리가 “팔복”이라고 알고 있는 구절이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에 근거하여 복을 향유하려고 한다. 하지만 3절에서 “천국”을 주목하라. 영이 가난한 사람은 셋째 하늘에 있는 낙원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소유한다. 이 천국은 침례인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3:2과 4:17에서 각각 전파하셨던 그 천국이다.
5절에서 땅을 유업으로 받는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들이다. 이 왕국은 땅에 속한 왕국이기에 땅에 대한 소유권을 언급하신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천년 왕국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
께 통치하기 위해서는 다스릴 땅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땅에 대한 소유권을 “온유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해야” 얻는다(롬8:17, 딤후2: 12). 그러나 왕국에 참여할 유대인들은 시편 37:11에 따라서 온유한 자라야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 그리고 이 땅에 대한 유업은 유대인에게나 그리스도인에게나 선물이 아니라 행위에 따른 보상이다(눅19:12-17).
8절에서는 마음이 순결한 자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다. 이 말씀은 시편에서도 강조되는데, 시편 24:3-5에서는 순결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주의 산에 오르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선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순결한 마음으로 살지 않더라도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후5:10, 고전3:11-15).
9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조건이 화평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기 때문에, 즉 거듭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받았다(요1: 12). 비록 거듭난 성도들이 사람들 사이를 화평케 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구절은 이사야 52:7의 말씀과 연결되는데, 이사야에서 말하는 화평의 복음이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 통치를 선포하는 “왕국(천국)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재림 때에 “화평의 통치자”가 되신다(사9:6). 그러나 그 분은 초림 때에는 결코 화평케 하는 자가 아니셨다. 오히려 그 분은 “혼란케 하는 자”(trouble maker)였다(마태복음연구 3월호 참조). 비록 많은 사람이 사탄이 주관하는 세상과 친해 보려고 하고, 진리와 비진리의 사이를 “화평케” 하려고 하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로 통치하시기 전까지 이 땅에는 결코 참된 화평이 없을 것이다.

5:13-14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 그러나 그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쓸모 없어진 소금은 밖에 내어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성읍이 숨겨질 수 없느니라.』

유대인들은 땅의 소금이자 세상의 빛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빛”은 될지언정 결코 “소금”은 될 수 없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한다. 그리스도인들은(교회는) 부패된 세상에 빛을 비추어 한 사람이라도 더 그 세상에서 빠져나오도록 길을 인도하지만, 땅 자체를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는 부패된 세상으로부터 피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땅의 부패를 방지하는 사람들이다. 유대인은 항상 땅의 상태와 관계된다(창12:1-4, 말4:6, 마13:44, 롬11:1-20). 그들이 올바르게 행하면 땅도 복을 받지만 그들이 올바르지 못하면 땅도 저주를 받는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들의 맛을 잃었을 때, 그들은 내어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힌다(렘 52). 예레미야에서는 바빌론으로 잡혀가기 이전에 “내어버려진다”는 예언이 13번이나 나온다. 앞으로 적그리스도 치하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지만, 그들이 그들의 메시야께 돌아와서 온전한 왕국 백성이 되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은 유대인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12:1 -3).

5:20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뛰어나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산상설교의 핵심은 “의”(義)이다. 17-19절의 문맥으로 볼 때 이 “의”가 “율법의 의”와 관계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의는 율법의 의보다 훨씬 엄격하다. 그래서 이 설교는 구약의 율법 이상으로 엄격한데, 여기서는 마음의 범죄도 범죄에 해당한다(마5:21, 22, 27, 28). 당시 바리새인들은 “시대의 양심”이었다. 400년의 침묵기간 중에 가장 경건한 유대인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사두개인들처럼 자유주의자가 아니었고, 에세네파처럼 금욕주의자도 아니었으며, 과격하게 로마제국에 대항해 싸웠던 사람들도 아니었지만, 종교적으로 완벽하게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근본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이 비록 예수님께 “위선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예수님을 대항해 싸우는 데 선봉에 선 자들이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는 따르지 말되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라”고 하셨다. 그들이 말하는 의는 상당히 엄격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그들의 의보다 뛰어나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신다. 왕국이 이루어지면 땅에 속한 백성들의 법은 이렇게도 엄격한 것이다.
21절 이하는 법 조항을 나열하듯이 각 주제별로 하나씩 제시하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21-22절은 “제 1조 살인에 관한 규례”, 23-26절은 “제 2조 예물과 화해에 관한 규례”, 27-28절은 “제 3조 간음에 관한 규례” ... 이렇게 나열되는 형식이다. 산상설교의 내용이 구약의 율법보다 훨씬 더 엄격하다는 것은 각 조항들에서 상세히 제시된다.
이 사람들은 까닭없이 노하면 심판의 위험에 처하며,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면 지옥불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 고린도전서 15:36의 바울은 메시야의 왕국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불에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또 이들은 오른쪽 눈이나 왼쪽 눈이 실족케 하면 실제로 잘라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온 몸은 지옥에 가게 된다 (5:29,30). 그러나 이들은 자기의 죄에 대해서는 철저해야하나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는 용서해주어야 한다. 그들은 오른 뺨을 맞을 때 왼 뺨을 내어 줘야 하고(5:38), 웃옷을 빼앗으려 하면 외투까지도 주어야 한다(5:40). 그들은 5:45에 제시된 대로 “온전해야” 하는데, 그것은 5:43-47에 있는 대로 악인에게도 선하게 행하는 온전함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는 조건이다(5:45).
6장과 7장에서도 같은 관점으로 설교는 진행된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산상설교가 “왕국의 법령”이라고 말할 때, 이것이 천년왕국에서만 지켜져야할 규례가 아니라, 왕국이 임하기 전에 왕국을 바라보는 상황,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대환란 때에도 적용되는 규례임을 알아야 한다. 다음 호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6장에서는 왕국 이전 상황에서 행해야 할 규례들이 종종 언급되어있다. 예를 들어 “주기도문”이라고 일컬어지는 기도문은 환란을 통과하는 유대인들에게 적절하게 적용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초림 때에 왕국(천국)을 제시하셨고, 그들이 그 왕국을 받아들일 만한 조건들은 형성되어 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거부할 것과 이 왕국이 연기될 것을 미리 아셨으며, 구약 예언에 따라서 영광스런 재림의 날 이전에 큰 환란의 때가 있을 것을 미리 아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왕국 이전의 상황, 즉 환란기를 이 왕국의 연속선상에 두고, 왕국 전 상황을 포함하여 천년왕국에서 행해야 할 규례들을 함께 말씀하신 것이다.
물론 산상설교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효과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영적으로
적용할 만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제시된 완벽한 의를 보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의로운 분이신가를 깨닫고 그 분을 경외할 수 있고, 제시된 내용들이 우리의 구원과는 관계 없지만 우리의 성결한 삶을 위해서 거울로 삼을 수도 있으며(5:27- 30), 우리에게는 이렇게 엄격한 율법을 주시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여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들과 달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믿음의 의를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감사할 것이다(롬10:4 -6).
산상설교의 청중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뛰어난 의를 “행해야만” 하는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우리는 이 산상설교를 영적으로 적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마태복음과 산상설교의 정확한 위치이다.
산상설교가 왕국의 법령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왕국복음을 결코 정확히 알 수 없을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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